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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Jul 27. 2017

혐오사회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한 혐오,  인간이라는 사람에 대한 사랑.


 내가 생활했던 내무반 책장에는 오카다 다카시의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라는 책이 꽂혀있다. 어처구니없는 제목이었다. 누군가를 싫어하면서 그 이유도 제대로 모른다면, ‘얼마나 가볍게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일까’ 생각했다. 한 마디로 말해 내 기준에서 실격된 인간들이나 읽을 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주 잠깐 시선이 스쳤던 그 책의 제목이 이후에도 계속 떠올랐다.


 사실 책의 ‘제목’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담긴,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떠올린 것이다. 나는 인간을 혐오한다. 그러니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라는 질문은 내게 습관적일 수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으로서의 인간이 혐오스럽다. 다자이 오사무의『인간 실격』이나, 나쓰메 소세키의『마음』의 주인공들처럼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혐오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라도 혐오할 수 있다. 아니, 혐오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스스로를, 인간을 사랑한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혐오사회

 불완전한 인간 종()’이라는 조각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맞춰보는 관계. 그 관계들의 집합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다. 그런데 사실상 이 관계 속에서 조각들이 서로 맞물리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대부분의 조각들은 어긋난다. 인간관계는 필연적으로 마찰을 경유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서로 맞물리는 과정에서 정전기가 아니라 벼락을 맞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아니, 맞춰보려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지도 않고서 서로에게 감전되어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익명성이 보장된 사이버 공간은 천둥소리로 온 동네가 시끄럽다. 인터넷 뉴스의 살벌한 댓글란은 물론이고 게임이라도 하려고 LOL(League Of Legend)에 접속하면 온갖 욕설과 혐오·비방들에 정신이 없다. 글이라도 잘못 올리면 일베의 표적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마찰을 일으키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혐오’는 일면 부정적인 감정으로 보이지만, 위험에 대한 경고로 기능한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보호하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감정이다. 인간의 이 생리적인 혐오감은 마사 누스바움의『혐오와 수치심』에서처럼 생리적 분비물(콧물, 정액 등)과 같이 인간이 불결하게 느끼는 것에서 기인하는데, 이러한 생리적 혐오감의 대상들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일으켜 청결 유지나 전염병 확산 방지 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타인의 불쾌를 일으키는 혐오가 있다. 인위적인 혐오로서,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없이 만들어진 자의적이고 편협한 기준 아래, 비단 사회적 소수자뿐만 아니라 자신과 구별되는 모든 타자들로 혐오의 확장이 이루어진 경우다. 특징적인 것은 대부분의 혐오가 언어의 형태로 배설된다는 점이다. 이 글에 담고 싶지는 않지만, 몇 가지 끔찍한 혐오발언들을 살펴보자. 김치녀, 똥꼬충, 틀딱충, 파퀴벌레, 똥남아 등 혐오발언들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생리적 혐오의 대상(김치 냄새, 항문, 틀니 소리, 징그러운 외형의 벌레, 대변 등)들을 은유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합리화된 은유의 과정을 거친 혐오발언에는 각종 집단에 대한 차별의 잔혹한 역사가 퇴적되어 있으며,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적대적인 타자(他者)’도 아닌 더러운 으로 취급되어 존엄성을 박탈당한다. 손택이『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지적한 맥락과 비슷한 방식으로 혐오의 대상들에게는 혐오스러운 상상적 낙인이 찍히며, 혐오감은 혐오적 속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염된다. 이때 혐오는 보호로서의 경고가 아니라 차별의 동인이 된다. 그렇게 여성들은 유리천장을 깨다 머리가 깨질 지경이고,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사람은 ‘종북’, ‘친일파’로 매장 당한다. 성소수자들은 1년에 한 번 있는 퍼레이드도 혐오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진행해야만 한다.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난민, 무슬림 등 ‘다문화적’ 소외자들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틈새조차 없다.


 이러한 혐오발언을 단순한 욕지거리나 감정적 배설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혐오발언이 언어폭력을 넘어 실제적인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실제적인 폭력은 당연히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과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까지 포함한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혐오발언을 내면화해 스스로를 검열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혐오하며, 심할 경우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져 자신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동성애자들이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들의 우울증과 자살률은 일반인의 몇 배에 달한다.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질환의 심화는 심장병, 뇌 기억중추 손상, 인식 감퇴 가속화, 뇌졸중 위험등의 신체적 위해로 이어진다. 실제로 미국 흑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기대수명이 짧으며, 실제로 받고 있는 진료의 질도 낮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단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혐오에 대한 만성적인 긴장감(흑인들은 자유의 나라라는 미국에서 언제나 흑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화하면서 살아간다)과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소수자들은 자살을 포함한 실제적인 건강상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메갈리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남충으로 김치녀에 맞서는 이른바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여성혐오를 남녀 갈등의 문제로 변질시키면서 문제의 본질을 놓쳤고, 복수의 성격을 띠면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혐오와 차별적인 언동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남자라는 이유로 혐오스러운 ‘충’, 벌레로 존재하게 되었다.(아니, 근데 벌레는 왜 혐오스러운가?)이는 모두가 모두에게 혐오스러운 사회의 표식이자, 이젠 사회적 소수자가 아닌 누구라도 혐오스러운 ’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우리는 ‘김치녀’, ‘한남충’으로 불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행동을 검열한다. 동시에 두 눈을 부릅뜨고 타인의 행동을 살핀다. 특히 유명인들의 경우 조금이라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비판을 넘어 과도한 비난과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됐다. 이러한 ‘혐오발언(hete speech)’들이 한국 사회, 더 나아가 전 세계에 내리치고 있는 벼락과 천둥들이다. 우리 중 누구도 혐오의 대상에서 배제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혐오’라는 범람하는 파도는 사회 구성원 모두를 바다에 몰아넣고 벼락을 내리친다.


 이렇듯, 혐오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고 한국 사회는 이를 방관하고 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보려 하지만 세월호 희생자들을 비하하는 발언들이나 한국의 육군 동성애자 색출 사건 등 가끔은 어쩔 수 없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혐오발언들을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로 규정하고 법적으로 제재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은 차별금지법 제정도 미루고 있다. 혐오는 현대사회에서 이미 심각한 타인에 대한 몰이해를 더욱 심화시키며 갈등을 조장하고,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돌아올 수 있는 사회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혐오는 단순히 누가 누구를 싫어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 연대의 파괴다.


 혐오 문제의 진짜 ‘문제’는 그저 방관하게 만드는 무관심이다. 그야말로 모두가 혐오에 감전되어 혐오 문제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 세상에서, 설령 혐오발화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혐오의 감성이 성행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런 사회 공간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게 될 지경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혐오감을 느끼지 말라고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비판하는 혐오감은 건설적인 비판과 명확히 구분되는, 자기반성적인 태도를 포기하고 가볍게 이루어지는 감정적이며 유아적인 투정들이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은 이 소란이 천둥소리 같은 자신들의 울음소리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더 크게 울어댈 뿐이다. 따라서 유아적 신념이 되어버린 혐오발언은 그 자체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선동하는 파시즘적 선전(propaganda)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두가 서로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가? 다행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가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으로 품으면 서로간의 마찰은 가벼운 정전기로 승화된다. 우리는 때로 그 찌릿한 느낌을 즐기기도 한다. 또한 진정한 이해가 수반되면 이 ‘흠’조차 ‘흠’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혐오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것을 안다. 가끔 벼락을 맞는다. 나도 꽤 많은 사람들과 절연했으며, 아직도 누군가와는 마음을 나누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누가, 왜 혐오하는가?

 폭력 사건을 조사할 때도 가해자의 동기가 중요한 것처럼, 혐오 문제도 혐오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혐오의 주체는 누구이며, 도대체 어떤 이유로 혐오하는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혐오의 주체는 특정하기 어렵다.(동성애자 혐오와 같은 경우 교회라는 혐오 집단이 존재하긴 하지만, 수많은 혐오자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는 하나의 집단일 뿐이고, ‘교회’라는 것 역시 뭉뚱그려진 집단일 뿐, 그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관점으로 나뉜다) 반복하지만 우리 모두는 혐오의 대상이면서 혐오의 주체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점이(이 글 역시 그렇다) 우리가 혐오 문제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로 작용하는 동시에, 혐오의 주체에 대해 알아야 할 당위성을 부여한다. 혐오의 주체, 그들은 결국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혐오감이란 앞서 말한 것처럼 때로는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혐오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천박한 인간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며 누군가에게 혐오감을 느끼더라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나, 그 중에서도 예외가 되는, 마치 사회적으로 용인된 것만 같은 혐오발언들이 존재한다. 주로 익명성이 보장된 사이버 공간에서 더 활발하며, 개인적으로 느낀 바로는 여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슬림, 난민,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주여성, 성 노동자 등이 한국에서 주요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수집단인 사회적 약자들이다. 어떻게 이들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단순한 분노를 넘어 실제적인 위협을 가할 정도의 폭력성으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약자에 대한 폭력을 어떻게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무감하게 느끼게 됐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진부한 얘기부터 시작하자. 자본주의 아래 소모품으로 전락한 인간은 빼앗긴 정체성과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적인 질서가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라는 ‘환상’은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부과하며 ‘성과-피로사회’를 만들어냈다. 이 질서를 극복하고 성공한 극소수의 사람은 추앙의 대상이 되고 대부분의 실패한 사람은 낙오자가 된다. 한때 이러한 성공과 실패의 관계는 타고난 능력의 불평등을 이유로 정당화됐지만, 수저론이 보여주듯 도 선천적인 능력이 됐다. 결국 한 번 낙오된 사람은 좀처럼 정상으로 돌아가기 어렵고 성공한 사람은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까 노심초사한다. 이 과정에서 질서를 빗겨나가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들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고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우리가 공리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현재 널리 퍼져있는 사회 형태 내에서 그러한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물음을 남겼다. 결국 주어진 질서 안에서 어느새 자신을 잃어버리고, 이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경계한다. 더 이상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성공한 극소수 역시 자신의 것을 나눌 생각이 없고,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 경계심은 위를 향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양극화를 가속화하는 신자유주의는 인류가 최초로 발명한 영구기관인 듯, 99.9% 대 0.1%이라는 양극화를 지키고 서있는 자본이라는 장벽은 너무나도 견고하다. 아래 방향으로의 계층 이동만 활발한 세상에서 비교적 나은 삶’, ‘괜찮은 사람이란 없다. ‘쌍용차 사태’를 다룬 공지영의 소설『의자놀이』에서처럼 모든 삶이 최악이고 모두가 약자가 됐다. 조현훈 감독의 영화「꿈의 제인」의 제인은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라 말한다. 더 불행한 삶과의 연대를 말하거나 이무영 감독의 영화「한강 블루스」처럼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흐릿하지만) ‘더 한 사람도 많다’는, 더 불행한 삶을 보며 위안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꼰대가 된다. 더 이상의 인내가 불가능한 이들의 공허하고 헛헛한 마음속에서 쌓이고 쌓이는 것은 오로지 분노뿐인데, 이를 마땅히 해소할 대상이 없다. 이 분노는 결국 이때까지 차별받으며 살아온 고단한 삶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로 향한다. 이제까지 비가시적인 존재로 외면 받던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 됐다. 비가시적인 존재였던 만큼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그들이 약자라는 것만은 분명히 안다. 그래서 ‘그들인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 몰아가기도 수월하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 발밑에서 우리의 불행을 위안하는 개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질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설명해서도 안 된다. 사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소 허무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냥 싫은 것이다. 혐오감은 말 그대로 혐오()’, 감정이기 때문에 극복이 상당히 어렵다. 혐오의 긍정적 전복을 위해서는 혐오 대상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긍정적인 경험을 해야 하는데, 혐오는 애초에 접촉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싫어하는 감정을 갖게 됐는지 그 근원을 따져보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신 우리는 혐오감이 후천적으로 학습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에서 오카다 다카시는 혐오감이 마치 전염’되듯이 2차적으로도 학습된다고 말한다. 자신이 나쁜 경험을 한 적이 없는데도 주변 사람이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저도 모르게 혐오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갓난아이들은 다른 성질이 가진 냄새, 쓴 맛, 아픔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 우리가 보통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들에 호기심을 보일 뿐이라고 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혐오’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게임 ‘오버워치’에서는 각종 혐오 발언들이 쏟아지고 이를 지적하면 ‘씹선비’가 되는 것처럼 누군가는 혐오를 가벼운 농담처럼 소비한다. 나의 친구 중 한 명은 그 발언이 잘못된 것인 줄은 알지만 게임이라는 공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발화들이기 때문에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무슬림의 테러는 걱정하면서 유럽 여행은 잘만 간다. 동성애자들의 축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회적인 눈요깃거리로 (혐오스러워하든, 신기해하든 상관없이) 소비되고 있을 뿐, 그 축제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지금 20대 초반의, 인종의 문제를 제외하고 소수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불특정 남성(‘평범’이나 ‘정상’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설명하기가 이렇게나 복잡해졌다)이 모인 집단인 군대에 속해 있으면서 이 무관심을 절실히 느낀다. 한 친구는 영화「히든 피겨스」를 봤음에도 유리 천장이 무엇인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이고, 알만큼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수자들을 혐오한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의 ‘혐오’에 그저 동조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서강대 전상진 교수는 시간의 실향민으로서 맞불집회 참가자들을 규정하고, 그들의 맞불집회 참석 계기를 정보 편식과 동조자의 확대를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실제로 혐오발언이 루머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사회적 동조와 루머의 신뢰도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동조가 있을 때 사람들이 루머 메시지를 신뢰하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일종의 선동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혐오 발언의 전염성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물론 혐오자들을 이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매도하려는 건 아니다. 혐오자들의 논리 중에서는 일면 타당한 것도 있다. 허나, 혐오와 차별을 합리화할 수 있을 만한 정도는 아니다. 이를 논쟁적으로 다루지 않는 이유는 무용하기 때문이다. 혐오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그 점에서 내가 완고하듯, 혐오자들도 완고하다. 무지가 혐오의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무지의 타파가 혐오의 타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자. 백 번 양보해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위험이 된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혐오가 답일까? IS에 가담하는 외국인들의 동기 중 하나가 사회적 소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혐오자들은 이해와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하지만, 혐오와 배척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혐오한다고 해서 그들이 사라질까? 아니면 사라지게 만들 건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이길 필요는 없겠지만 정말 누군가가 혐오스럽다면, 그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져볼 만큼 대담해지라는 것이다. 무지는 두려움을 키운다. 당신들은 정말로 그들을 알고, 혐오하는가? 나 역시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어 노력한다. 나는 현실을 말하는 사람들의 현실 도피적 감각과 무지를 지적하고 싶다. 이상적이고 피상적인 말임을 안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혐오 문제의 해결책도 다양한 차원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혐오 타파를 위한 ‘틈새’ 만들기

 예를 들자면, 차별금지법이나 혐오발화 처벌법, 신자유주의적 불평등 구조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구조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허나, 법과 제도의 단순 정비를 목표로 삼으면 부작용만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제정 과정에서 혐오 문제의 사회적 공론장을 확대해 충분한 여론 수렴과 설득을 거쳐, 더 많은 공감 아래에서 법과 제도가 집행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신문과 뉴스처럼 사회적 동조를 형성하기 쉬운 주도적 매체들의 자정적인 노력 역시 필요할 것이다. 즉, 혐오() 문제 해결의 본질은 공감이며, 이 공감과 법과 제도의 상보적 관계를 기반으로 접근해야 한다.


 허나,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감정의 문제에서 옳고 그름의 논쟁은 서로의 차이를 더욱 부각시키는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역설적이지만 공감은 감정이 통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혐오 발언의 무관심한, 무분별한 수용자로서 혐오 발언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자신도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잠시 여성 혐오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여성 혐오의 본질은 가부장적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여성 혐오’라는 단어는 모든 책임을 특정 대상(주로 남성)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오로지 남성들의 책임일까? 원시사회부터 이어진 구조의 문제를 지금의 남성들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혐오 발언』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듯, 혐오 발언의 책임을 개별 주체에게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혐오 발언이 가지는 ‘의 원천, 가부장적 사고의 피해자는 여성뿐만이 아니다. 남성성책임을 강요받는 모든 남성들에게도 해당한다. 내가 피 흘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당신이 피 흘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남성 역시 피해자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모두가 여성이 처한 상황에 대해 더욱 진실하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누구나 혐오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비춰보면, 혐오 문제에 있어서 오로지 피해자, 혹은 가해자인 사람은 없다. 자신이 여성이자 이성애자로서, 동성애자이자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듯. 요약하자면 혐오 문제 해결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조치는 사회 구조 문제의 해결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새를 마련한 뒤, 서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공감을 바탕으로 누구든 모든 혐오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혐오를 그만두라’고 명령할 것이 아니라, 혐오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할 수 있게 유도해야 한다. 결국 가장 급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놓는 거시적인 노력이지만, 나는 영화라는 미학적 은유를 통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고민해봤다.      



혐오발화에 대한 미학적 은유의 응수로서의 영화, 시놉시스.

EP1 TV 속에서 쉴 새 없이 머리로 박을 깨고 있는 한 여성, A가 보인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망가지는 모습으로 대중들의 호감을 얻은 유명 개그우먼이다. “예쁜 얼굴 예쁘게 쓰라”는 동료 선배들의 말에도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개그에 자부심을 느꼈다. 한 토크쇼에 출연해 ‘역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 진보적인 페미니스트와 인연을 맺고 친분을 드러내면서 네티즌들의 공분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평소처럼 TV 녹화를 마치고 분장실에서 가발을 벗던 A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매일같이 박을 깨던 자리에 피딱지들이 뭉쳐 있었다. 의사는 탈모 증상이 시작된 것 같다며 박을 그만 깰 것을 권한다. 당장에 다른 아이디어가 없는 A는 프로그램에서 돌연 하차한다. 사정을 모르는 동료들은 “예쁜 것들은 얼굴값을 한다”며 불만이다. 자신감이 넘쳤던 A지만 탈모 증상은 점점 심해지고, 두문불출하며 하루 종일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상이 됐다. 갑자기 잠적한 A를 둘러싼 네티즌들의 의혹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러다 탈모전문병원에서 A를 알아본 사람들의 목격담이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고 네티즌들은 진실을 밝히라며 담당의를 찾아내 협박하기에 이른다. 결국 A는 스스로 탈모임을 공개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에 난 상처의 검붉은 피딱지들이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EP2 엎친 데 덮친 격일까. A는 동생 B가 실형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군형법 92조 6항 위반과 성폭행 혐의였다. 익명으로 보도된 사건이지만 B는 부대 내에서 A의 동생으로 유명했던 터라 인터넷에 신상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합의하에 이뤄진 관계였지만 합의금을 노린 상대방의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군형법만은 어찌할 수 없었고 결국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겨우 흩어졌나 했던 기자들이 다시 A의 집 앞으로 몰려들었고, 충격을 받은 A는 B의 전화에 묵묵부답이다. B 또한 수치심에 더 이상 A에게 연락할 수 없다. 유일한 혈육인 A마저 잃고 혼자 남겨진 B는 괴로운 마음에 게이바를 찾지만, 게이바에는 온통 ‘Anti-B’ 포스터가 붙어있고 B를 희화화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식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이유였다. 기댈 곳 없는 B는 트랜스젠더 바를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바에 출입하기 위해 꺼낸 신분증에는 빨간 조명이 비친다.

EP3 거기서 만난 C는 말이 없는 B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B의 시선은 한쪽 벽면에 붙어있는 Anti-B 포스터로 향하지만 C는 B의 고개를 돌리고 칵테일 잔에 꽂혀있던 체리를 B에게 먹여준다. B는 C를 가만히 응시하고 C는 B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오늘도 B는 C를 찾아왔다. 오늘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 “너는 왜 남자가 될 생각을 했니?” B가 망설이던 입을 뗐다. 그때 주문했던 맨하탄 칵테일이 나왔고 C는 말없이 B에게 건배를 권한다. 잔에 든 칵테일이 찰랑인다. 단숨에 들이킨 B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엎어지고 C는 칵테일에 입도 대지 않은 채 B의 카드로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떠난다.

EP4 코피노인 C는 아버지가 없을 운명이었지만 어머니가 태국 남자와 재혼해 태국에서 나고 자랐다. 하루는 태국에 여행 온 한국인 중매쟁이가 일자리를 제안했는데, 태국에서의 수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C와 어머니는 한국에서 그런대로 살아갈 만한 집 한 채는 얻었다. C는 틈틈이 자신과 같은 트랜스 젠더들을 위한 모임과 봉사에 참여했다. 하루는 초등학교 동창 D가 연락을 해왔다. “시집 온 지 1년이 넘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 “남편이 잘해줘?” “먹여 살려주면 됐지” D는 마침 남편이 시댁에 갔다며 C를 초대한다. “여기서 어디로 가면 돼?” D는 C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D는 C가 트랜스젠더가 됐다는 사실을 몰랐다. 겉모습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좁은 동네라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집으로 돌아온 D의 남편은 “당돌한 년, 은혜도 모르는 똥남아 년!” 소리를 지르며 D의 설명에도 불구 손찌검을 서슴지 않는다. 밤낮 가리지 않는 폭행이 이어진다. 남편의 아침거리로 된장국에 넣을 파를 썰고 있는 D의 충혈된 눈은 몹시도 시뻘겋다. 최소 2년은 지나야 한국에서 국적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라도 된다. 본국 가족들의 생활비를 떠올리니 시뻘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EP5 얼마 전에는 남편이 바빠 남편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여성들의 집세를 거두러 그녀들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은 고사하고 현관도 없어 노크를 할 수 없었다. “계세요?” 방에서는 화장실 냄새가 났지만 화장실은 없었다. 곳곳에 곰팡이가 핀 단칸방에서 여성 3명이 살고 있었다. 한 명당 20만 원, 그러니까 한 달에 60만 원짜리 방이었다. C가 살고 있는 서울의 번듯한 투룸의 월세가 60만 원이라고 들은 것 같다. D는 그녀들이 주는 60만 원을 손에 쥐었다. 남편이 밥을 먹다 말고 전화기에다 소리를 지른다. 얼마 전에 실수로 벼의 뿌리를 뽑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E가 퇴직금을 요구해왔지만 남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E는 분한 마음에 시민단체에 D의 남편을 고발했지만 D의 남편은 신용불량자 상태라 당장 돈을 받을 수 없었다.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에, E가 집으로 찾아왔다. D는 초인종 소리에 인기척을 숨겼다. E의 전화가 울리더니 발소리가 들린다. 변호사 선임비와 중매 수수료를 닦달하는 시민단체의 전화였다. 맥없이 전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손에 끼워진 목장갑은 빨간 부분이 닳아 없어졌다.

EP6 E는 여전히 통화 중이고 E와 함께 한국으로 온 F는 거울을 보며 진한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파우더로 가려지지 않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E는 자고 있다. F는 E에게 등을 돌린 채로 이부자리에 눕는다. E는 불법체류자 신세라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오랜만에 함께 있게 된 오후에 밥을 먹다 말고 F는 갑자기 구역질을 한다. E는 “왜 조심하지 않았느냐”고 F에게 따진다. F는 말없이 밥상을 엎으며 E의 눈을 노려본다. 산부인과의 의사는 상상임신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사타구니에서 흠칫한 느낌이 든다. 피가 묻은 팬티가 화장실 변기에 버려져있다.     



 은유적 과정을 거친 혐오 발화는 이성적 혐오보다 감정적 혐오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나는 혐오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추동의 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자유주의시대의 혐오 발화와 미학적 은유의 응수(應酬)>에서 김이설 작가의 소설을 예로 들며 혐오 발화에 대한 미학적 은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나병철 교수는 나와 상당히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대신, 나는 미학의 매체로 소설이 아닌 영화를 택했다.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따지려면 끝도 없지만, 영화는 시청각 매체라는 점에서 감각을 자극하는데 용이하고, 장면 간 결합인 몽타주를 통해 물리적 연속성에 충돌과 균열을 일으키면서 관객에게 사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능동적인 독해를 요구하는 매체다. 이는 나의 글이 말하고 있는 수동성의 타파와도 이어지는데, 영화는 수용자에게 능동성을 요구할 수 있는 매체 중 그나마 가장 대중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나 영화계 전반에 흐르는 상업적인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 흥미 위주의 독해에 길들여진 지금, 미학으로서의 영화가 추구할 수 있는 의미가 상당 부분 소실된 것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영화가 역할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다르덴 감독의 영화「로제타」가 이끌어낸 벨기에의 ‘로제타플랜’이나 한국의 ‘도가니법’을 보며 현대 사회에서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가 현실과 관계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힌트를 얻었는데, ‘도가니법’의 결정적인 촉발이 원작 소설이 아니라 영화였다는 점은 이와 관련한 한 가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현존하는 매체 중 재현력이 가장 뛰어난 매체다. 이는 영화가 그 어떤 매체보다 리얼리즘 미학의 성취를 (완벽할 수는 없지만) 가장 완벽하게 담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로제타』는 현실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현실’에 가까워 보이는 영화였고,『도가니』는 대부분의 관객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라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로 봤다는 점에서 두 영화 모두 리얼리즘 미학을 충실히 재현한다.


 모든 리얼리즘 예술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자 역설, ‘진실(real)’을 추구하지만 절대로 ‘진실’이 될 수 없는 리얼리즘은, 추구하는 것(진실)과 그 추구를 방해하는 한계(진실)로 작용하는 것이 동일한 자기모순의 예술이다. 단순한 기록으로 보이는 최초의 영화,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도 감독의 주관으로 포착된 현상이며, 다큐멘터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리얼리즘’ 하의 모든 예술은 플라톤적 예술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모방’을 가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처럼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구성된 경우나 도가니처럼 실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경우, 수용자는 자신 앞에 놓인 예술을 ‘가짜’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거리 두기가 불가능함을 느끼며 심지어는 영화 속 세계에 대한 추체험이 일어나기도 한다. 결국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과 영화라는 표현양식을 통해 세상을 대면하는 태도에 근거해서 우리는 다르덴 형제가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최초로 영화 속으로 문제적으로 끌어들였던 네오리얼리즘의 영화적 이상을 현재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영화적 이상은 레지스탕스 운동의 일환으로서 현실에 관계하는 것이었다. 모든 리얼리즘 예술에 해당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떤 리얼리즘은 보다 나은 세계의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수용자를 동요시키기도 한다.


 비록 리얼리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영화 이미지의 창조적 구성을 통해 현실에 주체적이고 실천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들뢰즈의 주장처럼, 리얼리즘 예술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처럼 시대에 맞는 창의적인 작법이 필요하다. 내가 시놉시스를 작성하면서 주안점을 둔 것도 대중적 취향과 동떨어지지 않는 동시에 창의적인 작법을 창조하려는 노력이었다. 간단히 짚자면, 나는 주인공과 조연의 구분이 사라진 옴니버스 형식(평등)을 취하는 동시에 인물들에게 정체성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따른 위계(A-E)를 부여해 형식적 평등의 모순을 폭로하며 누구든 혐오 발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면화할 필요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또한, 옴니버스 형식을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각각의 이야기에 연결고리(빨간색)를 만들어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게 했고, 육군 동성애자 군인 색출 사건이나 경험 연구 자료 등을 통해 수집한 실제의 이야기를 토대로 각색해 리얼리즘 미학의 현실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할 수 있는 만큼의 문제제기와 할 수 있는 만큼의 해결방안을 생각하느라 골몰했지만, 글을 쓰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이, 모든 연대가 흩어지고 홀로 남겨진 한 개인이, 역사적으로, 집단적으로 퇴적된 현상에 맞서 문제의식을 가진다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것들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파생시킨 삶의 방식은 혐오만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은 허무하다. 탈주와 독존마저 정당한 삶의 방식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대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학창시절 배웠던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그럼에도 있으리라고 믿었을까. 나의 페이지들과 누군가들의 페이지들이 매듭지어지면 우리는 연대를 회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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