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승리를 바라며
<의지의 승리>, 나는 이 영화를 접할 때면 언제나 제목을 먼저 곱씹는다. 리펜슈탈이,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가 말하고자 했던 의지는 무엇일까. 물론 답하기 어려운 의문은 아니다. 당시 독일의 민족적 패배감에 대한 무력감이, 보다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동경이, 파시즘에 대한 무감각이 초래한 (어떤 말로도 정도를 표하기 힘든) 잘못된 권력에 대한 의지일 뿐이니. 의지를 (비판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으로 봤던 니체가 당시에 태어나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의 나라를 둘러봤다면 아마 죽음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통한 전면 ‘부정’만이 자신을 둘러싼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진정한 ‘의지’의 표출이자 ‘승리’였을 테니. 그렇기에 니체가 부수고자 했던 신의 재림을 불러온 ‘의지’의 ‘승리’를 영화로 표현한 레니 리펜슈탈은 물론, 그녀의 대표작인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린다. 리펜슈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2003년 당시, 씨네21 기사의 제목을 보자. ‘나치의 마녀 혹은 영화천재, 레니 리펜슈탈, 존경과 비난의 생을 마감하다’ 이 기사가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도 리펜슈탈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앞으로도 그녀의 삶은 한 가지 방향으로만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1934년의 나치 전당대회를 주제로 한 <의지의 승리>를 보면 영화천재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다. 1965년 9월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리펜슈탈 본인이 말한 것처럼 이 기록영화에는 ‘논평’이 전혀 없다. 리펜슈탈은 당시에는 생소했을 영화언어(촬영, 편집, 음악)만을 이용해 나치에 대한 완벽한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으니.
리펜슈탈이 <의지의 승리>에서 히틀러를 어떻게 재현했는가를 살펴보자. 첫 장면부터 대단하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누비는 비행기가 착륙하면 히틀러가 등장한다. 가히 메시아의 재림이라 할만하다. (이때는 bird view가 아니라 god’s view다) 특히 조각상이 시선을 떼지 못하는 듯 보이는 장면은 언제 봐도 참신한 연출이지 않을까.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영화의 주인공인 ‘히틀러’다. 영화 초입에서 히틀러는 뉘른베르크에 도착해 온갖 국민들(심지어 조각상까지)의 환대를 받으며 호텔에 도착한다. 이 장면은 단순히 히틀러에 대한 국민적 열망과 호감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은 히틀러의 1인칭 시점으로 촬영된 이 장면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히틀러가 되어 열렬한 찬사를 받는 듯한 황홀감을 경험한다. 히틀러에 이입되어 느낀 일종의 엑스터시(ecstasy)는 히틀러에 대한 관객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가능케 한다. 특히 4:3 화면비로 촬영되는 당시 카메라는 시각적 협소함으로 인해 ‘압도적인’ 히틀러의 존재감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리펜슈탈은 다양한 앵글과 숏의 구성, 카메라 무빙을 활용해 이 공간감의 제약을 극복했으며, 그 광활한 공간을 다루면서도 나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숏이 단 한 컷도 없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리펜슈탈의 의도였는지는 불확실하고 애초에 나치 선전 영화이니 당연하지만, 나는 히틀러의 ‘무소부재’함으로 읽었다. 또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중의 개개인적 정체성은 ‘규모의 군중’이라는 집단적 정체성 속에서 뭉개진다. 영화 속 대중들은 단지 ‘히틀러 추종자’라는 정체성에 복무할 뿐, 여성도, 남성도, 아이도, 군인도, 조각상도 아니다. 그에 비해 히틀러는 마치 ‘유일’신의 아우라를 가진다. 그렇기에 히틀러를 불신하는 것은 구원을 포기하는 것, 지옥행과 다름없다. 당시 독일인들이 비판적 사고를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망명 혹은 죽음뿐이었다. 아우라의 몰락을 반겼으며 자신만의 메시아를 섬겼던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는 도중 스페인에서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
<의지의 승리>는 앞서 말했듯 히틀러를 우상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나치가 곧 일으킬 전쟁을 합리화하려는 의도 역시 다분했다. 군인은 전쟁을 위한 일종의 ‘도구’다. 수전 손택이 자신의 평론집인『우울한 열정』에서 지적하듯 ‘제복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환상이 있’으며 ‘SS 제복 사진은 특히 강력하고 널리 쓰이는 성적 환상 중 하나’일 정도로 리펜슈탈의 영화 속 SS 대원들은 굉장히 섹슈얼하게 묘사된다. 히틀러를 보며 환호하는 수많은 여성들은 이러한 섹슈얼리티를 더욱 부추긴다. 또한 리펜슈탈은 캠프 장면이나 제식 장면, 전당 대회에서 부동의 자세로 서있는 장면 등에서 군인들의 육체미와 절도미, 극도로 인위적이지만 정돈된 아름다움을 한껏 찬양한다. 이는 언뜻 보면 리펜슈탈을 집요한 탐미주의자로서 옹호한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아닌가 헷갈리게 되는데, 나 역시 리펜슈탈의 또 다른 대표작, <올림피아>를 보면서 과연 리펜슈탈이 인종주의자인가 고민했던 적이 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아도르노의 말을 들어보자. ‘신화가 이미 계몽이었다... 계몽은 신화로서 퇴보한다.’ 자연에 종속되어 있던 인간은 초월적 존재인 ‘신’적 정체성을 탐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신화를 만들고, 신을 자신들의 모습으로 그려내어 자연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자연의 지배는 인간 중심의 ‘문명’을 탄생시킨다. 효율성을 근거로 하는 문명사회에서는 ‘동일성의 원리’(전체주의의 토대)에 의해 인간 자신마저 객체로 전락한다. 여기서 파시즘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따. 이러한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완벽한 신체를 가진 인간이 신인 것처럼 표현한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들은 예술이 아니라 파시즘을 예고하는 끔찍한 작품이다. <의지의 승리>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이상적인(비현실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신체를 가진 존재로 묘사되는 군인들의 아름다움은 전쟁이 야기할 끔찍한 고통에 대한 연막이자 환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환각은 파시즘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하고 비이성적인 근거다.
그럼에도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는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하다. 당시 나치 독일의 모습과 영향력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며, 기술적으로 뛰어나지만 기능적으로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추동하고, 강화한다는 점에서 영화 언어의 지평을 넓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레니 리펜슈탈이었기에 가능한 작품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많은 이들이 리펜슈탈의 천재성만은 인정하지만 개인적으로 리펜슈탈의 재능이 독보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재능은 역사적 우연 속에서 선택적으로 발현될 수밖에 없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종속됐던 인간을 과연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까. 히틀러의 지원을 불러낸 건 리펜슈탈의 재능이었지만, 히틀러의 엄청난 지원이 없었다면 <의지의 승리>와 더불어 <올림피아>와 같은 작품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수전 손택은 ‘매혹적인 파시즘’에 대해 기술할 1974년 당시에도 히피나 록 문화, 반정신의학 등을 보면서 파시즘의 전조를 읽었다. 손탁의 지적은 적중했다. 최근 전 세계적인 우경화 흐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반문의 여지가 없다. 나는 세계화시대에 걸맞는 세계시민의식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허나 자라고 보니, 나를 둘러싼 세계는 배타적인 집단의 배타적인 집단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있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게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영화 <몰락>에서 괴벨스는 이런 말을 한다. ‘난 그들을 동정하지 않아. 이것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우리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어. 그들은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 이것이 지금, 우리 모두가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를 다시금 곱씹어봐야 하는 명백한 이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