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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Sep 12. 2017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도 서툴기는 매한가지였다.

<시인의 사랑>, 제목만 들어도 궁금했다. 시인은 어떻게 사랑할까. 시인은 누구를 사랑할까. 누가 시인을 사랑할까. 그러니까 시인이 하는,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사랑이 그저 어려운 나는 그게 그렇게도 궁금했다. 시인이라면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지도 않고, 사랑을 놓치지도 않을 것이며, 놓친다 하더라도 애달프게 자신의 사랑을 읊을 수 있고, 자신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자신답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초점이 명확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시인의 사랑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섬세하고, 아름답고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사랑이 아닐까. 나처럼 건조한 사람은 일생 겪어볼 일이 없는 사랑이 아닐까. <시인의 사랑>이라는 같은 제목을 가진 슈만의 가곡의 말을 빌리자면, 시인은 사랑 때문에 꿈에서도 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시인의 사랑>에서는 양익준이 내가 동경해 마지않는 시인의 역을 맡았다. 양익준이 분한 시인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온정의 시선을 가졌다. 소외된 누군가, 그림자처럼 흐릿한 사람들을 시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시인의 시는 그들을 대상으로 삼았을 뿐, 그들을 겉도는 시에 불과하다. 그들에 대해 쓴 시인의 시는 그저 아름다울 수는 없는 삶들을 그저 아름답게 그린다. 시인의 시선은 분명 따뜻하지만, 일면적이다. 물론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타인과 완전히 일체될 수는 없다. 허나, 사랑은 그것을 가능케 할 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가진 이면의 일부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확장하며, 더 나아가 삶의 체험들을 공유하게 만드는 것, 서로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이러한 특징은 에로스적인 사랑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랑을 포괄하는 보편적 사랑에도 해당한다.     



그렇게 본다면, 시인의 시가 가지는 문제는 단순히 이면에 대한 시선의 결여가 아니라 사랑의 결여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 없이는 이면을 느낄 수 없다. 부족한 자신을 무한히 사랑해주는 아내(전혜진)가 있지만, 시인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시인은 자신을 사랑하느냐는 아내의 물음에 그저 편하고, 잘 맞아서 좋다는 말로 아내가 바라는 말을 대체하려 한다. 나름의 고민 끝에 시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고작 막연할 뿐이다. 시인에게 아내는 동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에는 아내가 없다. 시인의 시선은 언제나 아내가 없는 곳에 머무른다. 다만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혹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게 표현된다.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사랑이 아닌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의 사랑>의 시인은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무감한 시인은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난다. 시인은 아내가 사다준 도넛 맛에 반해 찾은 가게에서 그 소년을 만났다. 시인이 소년에게 관심을 갖게 된 첫 순간은 화장실에서 소년의 섹스 장면을 목격했을 때다. 다소 황망한 경험이지만 시인은 소년에게 느낀 어떤 리비도적 충동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충동을 아내에게서는 느껴본 적이 없다. 아내와의 섹스는 아이를 원하는 아내를 위한 노동이었을 뿐이다. 그 후 시인은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되고, 자연스레 소년이 가진 이면을 보게 된다.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인줄로만 알았던 소년은 술에 취해 길거리를 쏘다니고, 다소 불량해 보이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밤늦도록 가게를 지키는 어머니에게 뻔뻔스레 돈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도 일면이다. 사실 소년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상에 꼼짝없이 누워있고 소년은 그런 아버지의 온갖 수발들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어울리는 친구들에게도 진정으로 마음을 준 것은 아니다. 분명,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일을 감당하는 서투른 방식이었을 뿐일 것이다. 시인은 그런 소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 시인은 언제나 소외된 이들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냈지만, 단지 시선뿐이었다. 그런 시인이 소년에게는 직접 다가간다. 그만큼 시인은 소년을 사랑했다. 그렇게 시인은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시인이 수업을 맡은 초등학교에서 한 아이가 시인에게 시인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시인은 대신 슬퍼해주고,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시인에게는 소년의 아픔이 모두 자신의 아픔 같다.       



타인의 고통조차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시인은 그렇게 (영화에서는 ‘턱주가리 역’을 맡은 백지원에 의해 ‘리얼 월드’라는 다소 우스운 말로 표현되는) 현실을 자각한다. 자신에게는 아내가 있다. 소년을 향한 시인의 감정을 눈치 챈 아내는 시인을 못된 말로 쏘아붙이기도 하고, 처절하게 매달리기도 한다. 심지어 아내는 임신을 했다. 그래도 시인은 소년을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없다. 시인은 소년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사랑의 크기를 실감한다. 시인은 소년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허나, 결국 시인과 소년은 헤어진다. 시인은 자신이 무감하게 살아왔던 세월만큼 굳어버린 현실을 부수지 못하고, 소년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제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시인의 사랑도 서툴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랑하는 법도 매한가지였고, 누구나의 사랑과도 다르지 않았다. 아내의 상처를 고려하지 않았고, 애써 아내에게 돌아간 후에도 소년을 추억한다. 시인이라고 그저 낭만적으로 사랑만을 좇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시인답게 한 가지는 달랐다. 시인은 자신과 나이가 한참 차이나는, 동성의 소년을 사랑했다. 아니, 사랑할 수 있었다. 사랑의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 시인과 같이 열린 시선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할 것이다. <시인의 사랑>은 그런 사랑을 통해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그렸다. 그리고 모두에게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영화에 나왔던 어떤 시들보다도 아내와 소년이 마주한 장면에서 소년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내는 곧 출산도 할 예정이고, 가족에게는 가족이 필요하다며 소년에게 시인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소년은 자신도 그런 가족이 필요하다고 소리친다. 흔히 퀴어 영화에서 다뤄지는 인정 욕구에 대한 갈구가 아니었다. 소년이 소리친 건 그저, 정말 누군가의 사랑이었을 뿐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소년이 우는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소년의 외로움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년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소년의 외로움과 시인에 대한 소년의 사랑을 이 장면에서 처음 느꼈다. 동시에 <시인의 사랑>에서 유일하게 상투적이지 않은 장면이었다.


      

허나 모두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치고는, 서브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결여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의문이 들었던 것은 소년의 어머니 캐릭터인데, 남편과 살아온 평생 동안 병수발을 하고, 돈을 벌어온 어머니가 그렇게 매몰찰 수 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영구차에서 소년과 시인을 내려놓는 장면은, 소년의 아픔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처럼 느껴졌다. 또한 시인의 아내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면면들이 있었다. 자신을 이해하려는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남자를 왜 그토록 사랑하는 건지. 사랑이라고 느꼈던 아내의 행동들이 어쩌면 아이에 대한 자신의 욕심과 번듯한 남편이 필요했던 그녀의 욕심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 정도였다. 또한 아내와 낳은 아이의 방귀 소리에 시인이 소년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처럼, 아내가 시인과 소년을 매개하는 역할로 전락할 때, 아내가 얼마나 불행할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의 사랑>에는 시인과 소년의 사랑은 있었지만, 이외의 인물들은 아무런 감정도, 생기도 없이 딱딱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사랑>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감정선을 방해하는 유머코드들이 흐려질 만큼의 시간들과, 성긴 서사를 메우고, 이해되지 않는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분명, 말할 만한 것을 말하려는 영화는 맞으니까, 아쉬운 상태로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건 내가 본 <시인의 사랑>은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것처럼 어떤 특별한 시선의 사랑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사랑을 보편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사랑은 특별한 존재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사랑은 보편타당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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