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on Sep 04. 2017

<우리의 20세기>

우리의 인생은 왜 시간이 지날수록 낡고, 망가지는 걸까.

같이 영화 <우리의 20세기>를 보고 나온 친구가 물었다. 영화가 무얼 말하는 것 같으냐고. 물론 친구의 진의를 모르진 않았지만, 나는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보여주는 영화 같다고 답했다. 이런 일이 있어서 어떻게 됐다가 아니라,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때 한 지붕 아래에 살았던 이들, 도로시아(아네트 베닝),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줄리(엘르 패닝), 에바(그레타 거윅), 윌리엄(빌리 크루덥)의 인생에 관해 말이다.     



그래서 친구의 물음처럼 영화를 본 소감, 그러니까 그들의 인생과 마주친 2시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대해 쓰려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단순히 이름만으로 나열한 것도 그 이유다. 나에게는 그들의 인생이 실존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들을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들, 또렷이 방황하는 청소년, 주체적 여성, 근면 성실한 중년 남자 등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고, 그들의 인생은 그들의 인생이니, 내가 거기다 어떤 사족을 붙이든 간에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닿았다.      



다만, 그들이 보여준 인생을 통해, 나 역시 인생에 대해 몇 글자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비록 제이미 보다는 길고 에바 보다는 짧은, 짧은 삶을 살아왔지만. ‘서툰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를 위해’라는 영화의 문구처럼 대부분의 인생은 서툴기 마련이니, 서툰 몇 마디를 보태는 것은 상관없지 않을까.     





사실 <우리의 20세기>의 원제는 <20세기의 여인들(20th century women)>이다. 나는 앞서 누군가가 돋보이는 영화가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명백히 도로시아다. 영화는 1929년에 태어나 1999년에 생을 마감한 20세기의 여인, 도로시아를 중심으로 이야기와 인물들이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우는 도로시아, 한때 주체적이고 선구적이었지만 시대에 뒤처지게 된 도로시아, 중년이 되어도 사랑이 어려운 도로시아 등 나이가 들어갊에 따라 쉴 새 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아갔던 그녀의 인생 자체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20세기>라고 생각하면 영화의 맥이 조금 달라진다. 등장인물 모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적인 캐릭터가 되고, 도로시아는 그들을 한 영화에 모으기 위한 구심점 역할을 할 뿐이다. 인물들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내내 79년에 머물러 있던 영화의 끝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도로시아 뿐이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이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나는 변화하는 세상과 발맞추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았던 도로시아처럼, 자신만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20세기의 여인들>이라는 제목보다는 <우리의 20세기>라는 제목이 더 와닿았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기록하고 싶다.  (다만 <우리의 20세기>라는 제목을 걸고 나온 한국의 포스터는 왜 여인들만 담겨 있고, <20세기의 여인들>의 포스터에는 모두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의문스럽다.)



<우리의 20세기>는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세워둔 도로시아의 포드에 갑자기 불이 붙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도로시아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이곳저곳이 낡고 망가진 포드는 어느 순간 스스로 연소되고 말았다. 오래된 포드도 언제적에는 새 것이었다. 깔끔하고 세련됐었을 것이다. 허나 그때의 포드를 기억하는 사람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도로시아뿐, 포드는 아들 제이미에게 조차 타버려도 전혀 상관없는, 그저 기름 냄새가 고약한 고물차였을 뿐이다. 불타버린 포드에 대한 도로시아와 제이미의 상반된 관점에 집중한다면 <20세기의 여인>이라는 제목과 어울리는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타버린 포드를 <우리의 20세기>의 방식으로 보려고 한다. 우리의 인생은 왜 도로시아의 포드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낡고, 망가지는 걸까. 왜 점점 불행해지는 것처럼 느껴질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두지만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이유는 단순하다. 원래 행복하기가 어렵다. 다들 어딘가 망가져 있지만 될 수 있는 한 덮어두고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그렇게 낡고 망가져 어느 날 도로시아의 포드처럼 볼품없이 타버릴까 두렵다. 앞서 말했듯 짧은 생이지만, 하루하루를 더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왜 성숙해지고 있다는 생각보다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지, 왜 이해하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편해지는 건지, 왜 모든 것들이 이전보다 버겁게 느껴지는 건지와 같은 생각들이다. 점점 단단해지기보다 이곳저곳이 해져 너덜거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양껏 행복했던 적은 고사하고, 행복해야할 순간에도 불행을 잊은 적이 없다. 언제나 낙담하는 인생이었고, 우울감을 기조로 하는 삶을 살았다. 그럴 필요 없는 이유들도 있었지만, 그럴만한 이유들만을 되새기며, 그렇게 살았다.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행복할 수 없으니 하는 변명이라고, 내 인생은 언제나 윤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세운 행복의 기준에 스스로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행복은 언제나 불행과 함께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나는 인생은 살아가며 마주하는 불행에 긁히고 치이면서 낡아갔다.      



나는 그것이 억울해서, 어떻게든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불행을 전복시켜 행복해지길 원했다. 하지만 감독은 도로시아의 입을 빌려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에바에게 말한다. 괜찮아진다고, 그런데 그러다 다시 안 괜찮아질 거라고. 말을 뱉은 도로시아도, 그 말을 들은 에바도, 나도, 관객들도 웃었다.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불행이 우스워졌다. 사실 에바 역시 자신에게 닥친, 달리 방도가 없는 불행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니. 그런 도로시아도 아들 제이미와의 관계 때문에 고민을 놓을 수 없다. 모두가 쉽게 긍정하기는 어려운 불행들을 겪지만, 그럼에도 도로시아와 모두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 감독은 또한 불행하다는 이유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나처럼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애를 쓰는 것이 오히려 더 애처로운 지도 모른다. 인생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거니까. 우리는 그저 각자의 문제를 안은 채로 우리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을 지도 모르고, 차라리 아예 따져 보지 않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엄마는 행복하냐고 묻는 아들 제이미의 말에 도로시아는 행복한지 따져보면 도리어 불행해진다고 말한다. 고민에 빠진 줄리에게는 조언하지 않고 담배를 준다. 행복을 방해하는 불행들은 고민해봐야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도로시아는 주구장창 담배를 핀다. 몸에 좋지 않은 것은 알지만,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니까 그냥 핀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불행을 켜켜이 쌓아두고 한숨을 쉴 필요도 없다는 감독의 허무주의적 긍정은 인생을 대하는 가장 실리적인 태도처럼 느껴진다.      



가장 좋았던 건 그것이 도피가 아니라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를 또렷이 볼 뿐이고, 내가 긍정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을 긍정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20세기> 속 인물들은 모두가 선명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맞서지 않고 그저 담대히 받아들인다. 나와 달리 그들에게는 인생이 낡고, 망가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흘러 끝으로 돌아가는 과정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가득 차있던 농담들처럼, 인생에 가득 찬 불행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물론 모든 일에 심각한 나의 습관적 태도가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언제나처럼 일상적 근심에 절어 찾아간 영화관에서 잠시 동안은 마냥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영화 <비기너스>로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마이크 밀스 감독 역시, <비기너스>때에 비해 밝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우리의 20세기>에 담겨진 마이크 밀스는 온전한 마이크 밀스가 아닐지도 모르고,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기분이 좋은 영화였고, 그래서 오랜만에 쓸데없이 깊게 고민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어 좋았다. 결론은 이래저래 좋아서,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엘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