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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Jun 20. 2017

<엘르>

형용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미셸, 그녀의 양가성

한때 ‘애쉬걸’로 불렸던 그녀, 미셸은 같은 동네에 살던 27명의 이웃들과 6마리의 개, 두어 마리의 고양이를 죽인 사이코패스 살인자의 딸이다. 살인 사건이 그녀의 책임은 아니었건만, 그녀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10살 이후 39년간 그 재를 뒤집어쓴 채로 살았다. 일생동안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의 딸로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완전히 씻어낼 수 없을 만큼 그녀의 몸 구석구석 알알이 박힌 재들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흔적은 옅어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는 해냈다. 가리면 충분할 만큼 남부럽지 않은 삶을 일궜다. 남들 역시 어디 한 구석에는 더러운 것들을 감추고 살지 않는가. 이혼했지만 자신을 아껴주는 전 남편 ‘리처드’도 있고 절친한 친구 ‘안나’도 있다. 안나와 함께 게임 회사를 운영하며 일적으로도 성공했다. 가끔 식당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끼얹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



그렇게 겨우 일상다워진 일상은 아버지가 피범벅이 된 채 문을 두드렸던 39년 전 그때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한낮에,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괴한에게 몸을 맡겨야 했다. 괴한이 돌아간 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나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고 목욕을 한다. 욕조의 거품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지만 괜찮다. 손으로 몇 번 휘저으면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 듯하다. 시시때때로 그때의 일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때 저항할 수 있었다면, 고양이가 괴한의 눈이라도 할퀴었다면. 집의 모든 자물쇠를 바꾸고, 베개맡에 망치를 두고 잠이 든다. 그래도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다. 경찰은 지긋지긋하다. 태연한 척 엄마를 만나지만 엄마는 그녀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어 더 심란해졌을 뿐이다. 



강간범의 위협은 끊이지 않는다.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괴한은 소름 끼치는 문자까지 보내온다. 겨우 안정된 삶이다. 이 삶만은 지켜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리처드, 안나, 안나의 남편 로버트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고백한다. 강간을 당한 ‘것’ 같다고.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대담하고 태연한 것이 아니라 무감한 것이었다.



사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고통에 대한 무감각에서 나온다. 그녀는 안나의 남편 로버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섹스를 즐기는 정도의 사이다. 강간당했다는 말을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로버트는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와 욕구를 해소하려 한다. 화를 내야 마땅한 상황임에도 그녀는 조용히 손을 움직인다. 아들 뱅상과 그의 여자 친구 조시도 마찬가지다. 아들 부부의 집세를 내주려고 하지만 뱅상과 조쉬에게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조쉬의 출산 소식에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가 본 건 피부가 까무잡잡한 아이였다.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그녀는 일단 입을 닫는다. 교통사고를 당해 목발을 짚을 정도로 다쳐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한숨을 내쉴 뿐이다. 그녀는 10살 이후로 쭉 이렇게 살아온 것 같다. 그녀 자신을 둘러싼 부당한 것들을 부당하게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죄인이었으니까. 쓰레기였으니까. 피해자로서의 그녀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언제나 가해자였다. 부당하다 생각하면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니 누가 자신에게 욕을 하든, 오물을 퍼붓든 그녀는 감내해야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골이 났는지, 그녀는 이제는 부당한 것이 부당한 것인 줄은 알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때때로 그녀의 무의식이 소리친다. 그녀를 때린 리처드와 이혼하라고, 자신을 때리려는 뱅상에게 소리치라고. 



그녀는 고통에 무감각한 동시에 욕망에 사로잡힌 양가적인 존재다. 로버트와의 관계로도 부족해 옆집 유부남인 패트릭을 망원경으로 염탐하며 자위행위를 하기에 이르고, 기어코 패트릭을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한다. 그녀는 파티에 온 패트릭을 온 시선으로 갈구하며, 패트릭을 향한 몸짓은 갈수록 대담해진다. 그녀와 패트릭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지지만 절정의 순간에서 패트릭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그녀를 밀어낸다. 이 와중에 강간범은 그녀의 침대에 ‘미안하다, 참을 수 없었다’는 말과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고 사라지더니, 어느 날, 그때처럼 또 갑자기 그녀를 덮쳤다. 이번에는 운 좋게 강간범의 손에 가위를 꽂았다. 복면을 벗겼다. 패트릭이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패트릭을 쫓아냈다.



하지만 점점 헷갈린다. 그녀는 어릴 때의 일로 무감한 걸까.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이 말했듯 온갖 수치심에도 자신의 행동을 막을 수 없는 걸까. 교통사고를 당한 그녀는 패트릭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는 패트릭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고, 패트릭은 ‘필요했다’고 말한다. 패트릭은 그녀와 뱅상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그녀는 좋다는 뱅상의 말에 못 이긴 듯 초대에 응한다. 뱅상이 술에 취해 잠이 든 후 패트릭은 그녀에게 지하실로 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합의하에 이뤄진 관계지만 패트릭은 ‘이렇게는 안 된다며’ 다시 그녀를 강간한다. ‘도저히 안 되겠다’, ‘미안하다’는 패트릭의 말이 이제야 이해된다. 패트릭은 마조히스트 성향의 변태 성욕자였다. 그녀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패트릭이 강간범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패트릭의 요구에 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 그녀도 어느 정도는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패트릭과 정상적인 관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순수한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패트릭의 사랑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욕망을 채우고 싶었을 뿐이니까. 어쩌면 그 이유는 평생 동안 외면했던 고통과 마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녀처럼 죄의식을 내면화해야 하는 삶은 고통을 제대로 느낄 새가 없다. 받아들이기조차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의 그녀는, 아니 그 누구도 그 어마어마한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때 일 이후로 한 번도 아버지를 찾지 않은 것처럼, 그녀가 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방법은 회피가 아니었을까. 보지 않고 사는 것. 그녀는 고통을 받아들여 극복하는 것 대신에 고통을 회피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살인 사건을 다시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끝내 보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그래서 그녀는 그 모든 고통에도 태연한 듯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오던 그녀는 ‘강간’을 당하면서 자신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더러운 방식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강간에서 오는 고통을 통해.  



결국 그녀는 뱅상과 함께 패트릭을 집으로 끌어들여 패트릭을 살해한 뒤 경찰에 신고한다. 가까운 이웃이었던 패트릭은 왜 그녀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을까.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웃을 살해했던 것처럼.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죗값(강간)을 치를 때가 돼서야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녀 주변의 고통스러운 이들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가장 먼저는 절친한 친구 안나부터. 로버트의 외도를 의심하던 안나에게 그녀가 바로 그 여자라고 말한다. 그녀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안나를 더 이상 속일 수는 없다. 리처드와 커트를 격려하며 리처드의 아이디어를 진행시켜보라고 한다. 뱅상과 조쉬에게는 차를 사준다. 친하지는 않지만 패트릭과의 삶을 인내하기만 했던 패트릭의 아내인 레베카의 삶도 고단했으리라. 가톨릭 신자여서 가능했는지,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톨릭 신자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종교는 레베카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이삿짐을 싣던 레베카는 자신을 마중 나온 그녀에게 패트릭이 그렇게 됐음에도 좋은 남자였다며, 잠시나마 패트릭이 원한 것을 줬던 그녀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레베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레베카는 또 다른 그녀다. 그녀(레베카) 역시 그녀(미셸)처럼 자신이 겪은 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패트릭은 죽었고, 아들 뱅상 부부는 행복할 듯하고, 안나는 그녀의 진심을 알아보고 용서한 것 같으니, 어쨌든 모든 것이 다 잘된 일일까. 쉽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녀는 먼저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아들의 손을 빌려 그녀 스스로의 방식으로 패트릭을 처벌했다. 그녀의 사이코패스 아버지가 파문 의식을 읊었던 그날의 아침처럼. 그녀는 이제 가해자면서 피해자다. 



전복된 것들

「엘르」에는 그 기능이 전복된 관계들이 등장한다. 첫째는, 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남녀관계의 전복이다. 미셸은 모든 부분에서 남성들을 압도하는 여성이다. 가장으로서 구실 하지 못하는 전남편 리처드, 가라테와 태권도를 구분하지 못하며 결국 외도 사실을 들킨 후 안나의 집에서 쫓겨나는 로버트, 한심한 아들 뱅상, 직장에서 미셸의 압도적인 리더십 등 거의 모든 것이 뒤집어진 남녀관계를 은유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미셸이 강간을 당함으로써 한순간에 파멸한다. 강간은 안전하게 여겨지는 ‘집’이라는 내부적 공간에서 일어나고, 이웃은 적이 된다. 회사에서는 미셸의 얼굴을 게임의 성관계 장면에 합성한 동영상이 직원 모두에게 전송된다. 미셸 회사의 오너지만 회사라는 공간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약자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미셸과 같이 태연한 듯 살아가거나, 레베카처럼 극단적인 종교적 삶을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에서 미셸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는 여성인 안나뿐이다. 미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나 결말이 말해주듯. 리처드도 미셸을 지켜주려 하지면 도리어 미셸에게 후추 스프레이를 맞고 만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도 전복된다. 미셸은 아버지의 살인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미셸이 면회를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한다. 시신이 된 아버지의 귀에 속삭였듯이 그녀는 아버지를 찾는 것만으로 아버지를 죽였다. 레베카와 패트릭의 관계도 그렇다. 레베카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 같지만, 모든 것을 알면서도 감내하고 있었고 레베카는 살아남았다. 그래도 레베카는 적어도 가해자는 아니었을까? 레베카는 패트릭이 미셸에게 행하는 범죄를 방관했다. 레베카 역시 가해자라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셸과 패트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패트릭에 의한 강간의 피해자였지만 결국 패트릭을 죽이고 만다. 미셸은 피해자였지만 가해자가 된다.



결국 영화「엘르」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혹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와 같은 단순 명확한 어떤 기준이 아니다. 사실 인간을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은 없다. 미셸과 다른 인물들처럼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가변적이고 양가적인 동시에 모순적이다. (극단적이지만) 이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 마찰을, 영화「엘르」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는 이유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엘르」처럼 복잡하고 난잡한 세계다. 이자벨 위페르가 이 영화를 두고 “한 사람의 삶에는 많은 면이 있다. 이번 영화는 그 삶을 훌륭하게 표현한 영화다”라고 말한 것처럼 영화「엘르」는 페미니즘이나 가부장적 질서 등 어떤 구조적인 관점에서 독해하려고 시도하면 피상적인 전복이 되고 만다. "이자벨 위페르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감독 폴 버호벤의 말처럼 그가 영화 속에 담은 것은 바로 이 세상이라는 필연적인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짓이다. 요약하자면,「엘르」라는 세계의 구조는 인물들의 행위와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전복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설정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영화「엘르」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한 인간이다. 미셸이 ‘엘르’라는 인칭대명사로 환원된 이유도 바로 그녀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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