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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Jan 05. 2018

속초 여행

더 늦게 갔어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혹은 아예 가지 않았더라도.

속초 여행을 다녀왔다.


왜 떠났는지를 말해야 한다면, 한 학기가 끝났고, 내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고 싶었다는 것 정도.

그 이상의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는 이유들로.

그렇다면, 나는 왜 구태여 이 글을 쓰고 있는가 스스로도 자문하게 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쥐어짜내 말해보자면, 지쳤다. 그런데 사실 지쳤다고 말하긴 싫다. 

마치 내 여행이 무슨 힐링 여행처럼 비칠까 봐. (근데 힐링 여행 맞다)

나는 그저 쉬고 싶은 것뿐인데, 무슨 예쁜 사진만 온통 찍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그런 여행.

(그런데 열심히 사진도 찍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그런 건 아니었고, 혹은 아니었음 했고, 그랬다고 해도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워낙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그렇다고 그 생각이 다양한 건 아니고, 

한 생각의 지연한 반복이다 보니, 생각을 하는 장소라도 조금 변화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러면 뭔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지금 하는 생각을 그만둘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는 생각들.

그런 생각이 어디 있냐고, 누군가는 위로할 수도 있는 말에 위로받지 못해 속초로 갔다.


돌아보니 별 준비 없이 떠나는 겨우 2박 3일 여행에, 내가 원했던 바는 조금 거창했던 것 같다.

그 말인 즉, 내가 하는 것들 중 제대로 된 무언가는 거의 없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고 낙담하고, 좌절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모르겠다는 것. 사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리라. 

그래도 이게 다는 아닌데. 나조차도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모를 뭔가가 분명, 더 있는데.


그래서 차라리 잘 쉬기라도 하기 위해. 여행을 가기로 했다.

헌데 잘 쉬는 방법을 잘 모른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닌 듯하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매번 하는 나로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가능할까? 눈을 뜨고 자는 걸까.

(그만큼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내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는 때는 있지만, 그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다르지 않을까.



참, 이번 학기에는 책을 썼다. 

솔직히 책을 썼다고 말하기에는 무엇하지만, 어쨌거나 글을 쓰고 인쇄까지 했다.

시간이 부족했다는, 핑계가 아닌 정당한 이유가 있다. 애초에 한 학기로는 부족했고.

할 말이 많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고,

그 많은 말들이 어지러이 뭉쳐 목구멍을 막았을 뿐이다. 

그 막힌 목구멍 틈으로 새어 나오는 말들만 겨우 지껄였고, 그중에서도 되는 대로 담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봐도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말들만 가득한 책이 됐다.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었고,

그 이유들이 아니더라도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다가 그것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것에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접어두기로 했다. 

겪어보니 그리 대단한 건 별로 없더라, 근데 나는 고작 24살이더라, 하지만 언제나 나의 나이는 고작이겠지.

그래도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참으로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

할 말이 너무 많을 줄 알았는데, 나는 그 말들을 삼키고 삼켜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무언가를 말하려니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물론 아무것도 아닌 글들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물론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들. 정영문과 정지돈 같은 작가들.

그래서인지 이번 여행에는 정지돈 작가의 '내가 싸우듯이'를 챙겼다.

얼마나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읽었는지를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책.

그저 작가, 자신이 싸우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책장을 넘기게 되는 책이다.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누군가의 생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훔쳐볼 수 있다는 건,

(물론 온전히 훔쳐볼 수 있다, 생각 않는다. 당연한 말을 변명하고 싶진 않지만, 아직까진 내가, 부족하다)

누구나에게 어느 정도의 관음증과 노출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나 역시 글을 쓰는 것이기도 하고.



허나,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왜 지쳤는가, 일진 대. 도무지 어떻게 말해야 될지를 모르겠다.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지쳤다고 말하면 너무 진부할까.

가끔 진부한 것만큼 절절한 것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여하튼 책을 쓰면서 느꼈던 것처럼,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을 뿐.

나는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없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않기로 했다. 아무 말이나 하면서.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혹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마음껏 상상하기를.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얼마간, 혼자일 필요가 있어서 여행을 떠났다.

아니 언제나 혼자였지만,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곳에 가기 위해.


여행은 떠난다는 말을 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여행이 좋은 이유가 따로 있지 않고 그 자체로 좋은 것은 그 때문이겠지.

무언가를 떠나,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내게는 떠난다는 것이, 무언가 해소된다는 말 같다.

아마 내가 속초에서 보고 온 바다보다도, 파도보다도 시원한 어떤 감정이겠지.

하지만 한 번도 해소된다고 느낀 적은 없다. 

언제나 도피였다. 망각이었다. 도망가는 것.

그럼 나의 여행은 비겁한 걸까. 세상에 비겁한 여행도 있는 걸까.


그래서 (자연스러운 귀결은 아니겠지만) 꼭 속초일 필요는 없었다. 

사실 인제에 있는 자작나무 숲을 가고 싶었다. 가지 못했다.

그러다 속초에서 설악산 케이블 카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등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고, 설악산은 보고 싶었기에. (나는 암산이 그렇게나 좋다)

혹여나 내가 가는 날, 운 좋게 눈이 날리지 않을까 해서. 

그런 혹시나의 기대와 곁에 바다를 끼고 있다는 사실에 혹해 속초로 향했다.



여기까지 사족이 길었다. (뭐 딱히 긴 건 아니지만) 길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간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왜 여행을 갔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이 글에는 그 이유가 담겨 있지 않다. 혹은 담겨 있을 것 같기도 하며.

더 중요한 건, 내 글은 그 누구도 흘릴 글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쉬워서일까.

이번 학기 내내 교수님은 읽힐 글을 쓰라고 하셨는데,

나는 읽힐 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물론, 읽힐 글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아니, 어느 정도는 알지만, 그런 글이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읽히기 위해 쓸 뿐이다. 글은 읽혀야 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니까.

내게, 글이란, 하지 못한 말들을, 조금이라도 내뱉게 해 주는, 그런 무엇 같다.

하지만 나의 글은 나 혼자만 읽을 수 있는 지독한 여백 같은 글이라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어쨌건 그렇게 여행을 떠났다. 속초로.

나는 오후가 다 돼서야 속초에 도착했는데, 물론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다.

성실한 나는, 언제나 미리미리, 일찍, 준비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다.

허나 그날은 전날 과음한 탓에, 아침 11시에 일어났다.

(이제야 내가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했는지 생각났다)

그 전날이 또렷이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엄청나게 마셨기 때문에 또렷이 기억나지 않기도 하고.

하지만 지나고 보니 잘한 일 같다. 속초는 사실 그렇게 재미있는 동네는 아녔으니.

더 늦게 갔어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혹은 아예 가지 않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요즘은 후회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었겠구나 생각한다.

어떤 여유가 생긴 걸까. 그것보다는 미련이 별로 없다. 

근데 미련이 없다는 건, 좀 별로다. 기대가 생략된 미련은 없으니까.



.

이런 경우는 환자가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환자가 자신의 멜랑콜리를 불러일으킨 상실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가령, 잃어버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의 어떤 것을 상실했는지 모를 경우,

우리는 환자가 상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통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멜랑콜리란 의식에서 떠난 (무의식의) 대상 상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지만, 

반대로 애도의 경우는 상실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무의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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