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소설, 소설과 삶에 관하여.
소설을 쓴다는 건, 어떤 이야기를 쓴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지 않은가,하는 반문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물론 익숙한 이야기 같지 않은 이야기들은 많지만, (작가 중에서는 정영문, 정지돈, 감독 중에서는 고다르, 테렌스 맬릭 정도가 떠오른다)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은 본 적이 없다.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침묵도 말이다. 이야기는 말과 같은 행위로 구성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말을 할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저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겠다.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부재不在해야 하며, 부재하기 위해서는 죽음 이외에 선택지가 없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는 존재라고 불릴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부르는 말이 없는 것처럼.
그런 이유들로 우리 삶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음은 필연이다. 이야기의 총합이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소설은 삶과 닮았다. 대부분 시간순으로 ‘흘러’가며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형식적으로는 끝이 난다. 인간이나 인간을 닮은 존재들이 등장해, 무엇을 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시공간이 책 속에 있다. 아무개의 말처럼 ‘책은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소설과 삶을 구분해야 함을 망각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작가와 책 속의 인물을 동일시할 때가 있는 것처럼. 그 구분이 불가능할 때, 그러니까 소설과 삶이 미묘하고 생생하게 섞였을 때, (그래서 모든 예술은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문학이라 부르는 데 익숙하다. 허나, 소설과 삶이 완전히 같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어디까지나 재현일 뿐.
그 미세한 차이에서 나오는 미묘함 덕분에 소설 속의 세계는 푸코가 말한 일종의 ‘헤테로토피아’가 되기도 한다. 소설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행하고자 하지만 행할 수 없는 것들을 행하게 해준다. 그래서 그 행위들은 다른 방식으로 행위되며, 우리가 소설이라는 다른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허구의 세계로 상정되는 소설이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매체라는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지나치면 문학이 아니라, 단순한 욕망의 분출에 그치고 만다. 흔히, 진짜 소설과 가짜 소설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되기도 하며. 중요한 건 유토피아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하자. 단순하게 본다면, 얀 고즐런 감독의 영화 <완벽한 거짓말>은 제목 그대로 ‘완벽한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에 그친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 마티유는 <Un homme ideal(완벽한 남자)>(원제)를 욕망한다. 마티유의 욕망은 그저 작가가 되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마티유가 첫눈에 반한 앨리스는 마티유의 욕망, 그 총체적 표상이다. 앨리스는 대학에서 강의를 할 만큼 지적이며, 가족들로 보아 앨리스의 사회적 지위 역시 상당한 듯 보인다. 반면 출판사에 보낸 원고가 반려되고, 작가와는 거리가 먼 청소 일을 하고 있는 마티유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마치 하루키처럼 작품성에서 뒤지지 않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작가,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을 받는 남자다. 그리고 그 여자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남자, (마티유의 가족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완벽한 가정을 이룬 남자다. 물론 완벽하기 위해서는 더욱 완벽한 조건들이 필요하겠지만.
허나 마티유의 욕망은 완급 조절이 되지 않는다. 마티유는 원고가 반려됐을 때 출판사에 전화를 건다. 소설 쓰기에 더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담당자에게 소설을 진짜 읽어보기는 했는지 묻고, 홧김에 창문을 부순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의 죽음으로 주인이 사라진 집에 청소를 위해 들어간 마티유는 이야기가 빼곡한 일기장 하나를 발견한다. 알제리 사태를 겪은 한 군인의 이야기였다. 첫 장을 읽자마자 눈을 뗄 수가 없다. 결국 마티유는 그 일기장을 자신의 안쪽 주머니에 품는다. 마티유는 한 사람의 삶을 훔쳤다. 이름 모를 그 남자는 마티유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된다.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그 일기장의 글은 컴퓨터로 옮겨지고, 마티유는 일기장을 불태운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듯한 그 일기장 주인의 사진까지도. 삶이 소설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 남자의 삶은 이제 소설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마티유는 완벽한 남자가 될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렇게 완벽한 남자가 되기 위한 완벽한 거짓말을 시작한다. 동시에 훌륭한 작가로서의 기질 또한 충분하다는 아이러니가 보인다.
소설의 기본 전제는 ‘허구’라는 점이다. 실제 현실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든, 소설은 창작된 이야기로 구성된다. 반면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보일지라도 실제 현실과 전혀 무관할 수도 없다. 허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소설이 허구성을 전제한다고 해서 소설 속 이야기가 진짜 허구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허구로 상정된다. 한 남자의 일기장을 그대로 베껴 쓴 마티유가 스타 작가가 된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이 맥락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름 모를 한 남자의 삶만 소설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짓말을 시작했을 때부터, 마티유의 삶 역시 소설이 되기 시작한다. 표절 작품으로 스타 작가가 된 마티유는 앨리스와의 사랑에도 성공한다. 그녀와 결혼까지도 약속한 듯 보인다. 허나, 언제까지나 들키기 전까지 만이다. 마땅한 후기 작품이 없는 마티유에게 출판사는 더 이상 선수금을 줄 수 없다며 경제적으로 압박한다. 마티유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라는 앨리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티유는 불편하다. 앨리스의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선물도 감춘다. 마티유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 정당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와중에 앨리스와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휴가지에 느닷없이 스탠이 등장한다. 마티유를 의심하는 스탠의 심증은 더욱 확고해진다.
‘완벽한 남자’를 포기할 수 없는 마티유는 더 많은 거짓말을 한다. 마치 소설을 쓰는 것처럼,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인생이 흘러가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단순히 거짓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들. 사소하게는 앨리스의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자신의 방에 찾아오도록 유도하기도 하며, 지나치게는 강도에게 피습당한 상황을 꾸민다. 머리를 창문에 수없이 찧는 그 모습은 창작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허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소설이 된 마티유의 삶은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당위적인 결말이라면,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하지만 삶 역시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스탠에 이은 또 하나의 위기는 한 노인, 로엥 보방의 친구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로엥 보방’은 바로 마티유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이름 모를 남자의 이름이다. 익명의 남자의 삶은 친구에 의해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을 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허나, 그의 친구는 로엥의 구원을 위해 마티유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마티유를 협박하고 돈을 요구한다. 그렇게 로엥의 삶 역시 소설에 갇히고, 마티유 역시 점점 더 큰 거짓말을 한다. 앨리스 아버지의 골동품을 훔치고 심지어는 그 사실을 알아낸 스탠을 실수로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다. 소설 같은 삶이지만 삶은 소설이 아니다. 삶 속에서는 가끔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그 일들에 맞서 선택을 해야 한다. 삶은 모든 순간이 선택이다.
마티유의 삶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위기마저 거짓말로 덮어 넘기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 그에게는 선택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진실을 택하는 순간, 마티유의 삶은 끝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티유는 스탠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밤중에 시신을 처리한다. 하지만 마티유에게도 끝이 다가온다. 스탠의 죽음 이후 앨리스는 마티유를 믿지 못하겠다며 밀어내고 문을 닫는다. 마티유는 벽을 사이에 두고 앨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설레던 감정을 읊조리고, 앨리스는 마음이 동한다. 그 순간만큼은 마티유도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끝은 찾아온다. 어떤 변수가 생기든, 소설은 이미 시작되었기에. 스탠의 시신을 발견한 경찰이 찾아온다. 살점을 발견했으니 곧 범인을 잡을 것이라 말한다. 마티유는 마지막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거짓말은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는 것이었다. 티비는 스타작가의 비보를 전하고, 마티유는 다시 막일꾼의 삶으로 돌아간다. 아이러니는 마티유의 삶이 끝났지만, 마티유의 소설이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남자로서의 마티유는 여전히 건재하다. 서점의 유리창이 마티유의 마지막 소설 ‘가면’의 표지 사진으로 빼곡하다. 그 포스터 사이로 보이는 것은 자신의 완벽한 남자, 마티유의 소설을 낭독하고 있는 앨리스, 그리고 얼마 전 태어났을 자신의 딸의 모습이다.
마티유의 소설을 낭독하고 그리움에 잠기는 앨리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마티유의 소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삶을 썼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고민하던 것에 관한 글. 여기서 다시 한번 소설에 대한 어떤 근원적 물음을 하게 된다. 소설은 정말로 픽션, 허구인가? 해묵은 의문이겠지만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가상과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익숙해진 지금, 다시금 환기할 필요가 있는 의문이다. 무엇을 진짜,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가상과 현실은 애초에 구분될 수 있는 개념이기나 한가? 구분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왜 현실만을 진실로 상정하는가. 우리는 소설을 통해 현실을 보면서 왜 그것을 ‘허구의 매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마티유는 거울을 자주 본다) 그 물음의 답을 찾다 보면 하나의 가정이 나온다. 허구는 진실의 반대말이 아니다. 평론 쪽에서는 익숙한 명제겠지만, 일상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허구를 ‘거짓’으로 단정 짓는다. 허구의 반대는 사실일 뿐이며 진실은 사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허나, 진실만이 가치 있는 것인가?
그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기는 할까. 보드리야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진실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가상적으로 상정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진실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실이라는 것이 실재하든, 부재하든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티유도 서점에 들어갈 수 없다. 발길을 돌린다. 그 머뭇거림의 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짧았다고 쉬운 건 아니건만, 마티유는 적어도 하나의 방향을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그래서 마티유의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말 모든 것이 밝혀졌을 때, 비로소 마티유의 소설도 끝이 날 것이다. 허나 그렇게 된다면, 다시 마티유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금 발길을 돌린 마티유는 누구인가. 그는 마티유인가?
+감독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영화의 끝에서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보벵의 친구를 죽인 그 똑같은 장면에서 차에 타고 있는 건 마티유 혼자 뿐이다. 상징적인 방식으로, 마티유는 이미 죽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러 리뷰에서 지적하듯 이야기의 개연성 부족으로 인한 몰입 방해 등과 같은 사소한 디테일들. 거기에 영화를 통해 이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동 원리를 따져보면 영화 역시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종의 액자구조처럼 현실 - 소설 - 영화라는 삼중의 구조를 완성했다면, 더욱 깊은 성찰이 담길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이라는 매체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에 그쳤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분명한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거짓말>로 단순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기도 한다.
(이미지 출처 : 구글, 네이버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