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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Jan 28. 2018

우리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산다.

<자유의 언덕>

나는 개인적으로 물리적 현실을 가장 온전히 재현할 수 있는 매체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공간의 제약이 분명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물론 영화가 재현하는 현실은 물리적 한계를 이미 뛰어넘은 지 오래다. 영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영화라는 말들이 구분 없이 섞이는 것처럼, 영화와 현실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지 않을까. 영화는 단편적이라고들 하지만 각자의 인식에 갇혀있는 현실 역시 큰 범주에서 단편적이긴 매한가지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이 있다. 시간의 편집. (이 글에선 공간을 잠시 배제하도록 하자) 영화에서의 시간은 분절된 시간의 연속체일 뿐, 흐르지 않는다. 물론 전형적인 전개 구조 속에서는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과연 현실에서의 시간은 흐르는가? (물론 이는 영화가 촉발한 생각은 아니지만) 뉴턴이 말했던 것처럼 시간은 ‘절대적이고 참되고 수학적'인가? 시간은 완전한 연속체일까? 인식론의 대부, 칸트는 뉴턴의 생각에 의문을 가진다. 엄밀히 따져보면, 애초에 우리가 절대적 시간이라고 불리는 무엇을 경험한 적이나 있을까 싶다. 시간은 마치 영원한 듯 보이지만,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당연히 우리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원성'을 '절대성'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절대적이라고 한들,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시간이 절대적이라는 '생각' 역시 가능하다. '시간은 무엇인가의 연장이며 지속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시간은 나라는 존재 앞에 있었다. 시간이 없는 곳에는 그때도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이미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현실과 가장 닮은 매체인 영화 역시 현실의 물리적 재현을 넘어, 다양한 변주를 통해 감독의 주관적 세계를 표현한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하나의 세계다. 이러한 지점에서 단순히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대한 의문이 아닌, ‘시간'을 해체하고 재조립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을 짚어보자.



<자유의 언덕> 줄거리

BCM이라는 한국의 한 어학원에서 만난 일본인 ‘모리’와 ‘권’은 깊은 관계였지만, 어떤 이유로 ‘권’이 ‘모리’의 고백을 거절한 듯 보인다. 추측컨대 권은 건강 문제로 지리산으로 입산해야 했던 것 같고, 모리는 다른 동료들과의 갈등으로 일본으로 귀국한 것 같다.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권을 잊지 못한 모리는 권과 연락이 닿지 않음에도, 무작정 한국으로 들어와 권을 기다린다. 모리는 권의 집 문 앞에 메모를 붙이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한다. 그 기다림의 과정에서 모리는 ‘지유가오카(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에서 만난 ‘영선’과 몇 번의 잠자리를 하고, 영선을 악질 남자 친구에게서 구해주기도 한다. 또,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고 있는 ‘상원’과 몇 번의 술자리를 가지기도 한다. 모리는 권이 돌아오기 일주일 전, (아마 권을 만났을) 어학원에 자신이 쓴 편지들을 맡긴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권은 모리의 편지를 읽고, 모리가 머물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찾아가면서 둘은 재회한다. 



쏟아진 시간들 

줄거리만 보면 무엇이 특별한 영화인가 싶지만, <자유의 언덕>은 기승전결이 명확한 관습적인 영화가 아니다. 홍상수는 <자유의 언덕>을 통해 기존의 영화들에서(동시에 현실에서) 선형적으로 그려졌던 시간이라는 관념을 흩트린다. 영화는 모리가 권에게 쓴 편지 순대로 전개되는데 사실 순서라고는 할 수 없다. 영화 초반부에 권이 계단을 내려가다 모리의 편지 묶음을 놓치는 장면에서 그 의도가 명확히 드러난다. 바닥에 쏟아진 편지들을 줍는 과정에서, 편지들은 써진 순서에 상관없이 섞인다. 편지에 날짜가 적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구성된 편지처럼 <자유의 언덕>의 시간은 언덕을 넘나들 듯 자유로이 요동친다. 


홍상수는 모리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의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영선은 자신의 강아지를 찾아준 모리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모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시간』이라는 책에 대해 묻는다. 모리는 설명한다. ‘시간은 실체가 없음에도 우리의 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냈고, 그렇기에 우리가 꼭 정해진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지 모를『시간』책의 저자에게 시간이란 ‘삶’으로 치환되는 총체적인 어떤 것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담아야 한다고 천명한 아폴리네르의 생각과 닮았다. <자유의 언덕>에 나타난 시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속 시간은 인과에 따른 순서로 이어지는 ‘흐름’, ‘연속’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다. 



희미한 시간들의 인과

그렇다고 <자유의 언덕> 속 시간들이 분절된 것은 아니며, 우리는 시간에 대한 관습적 인식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다. <자유의 언덕>에도 일종의 인과관계로 볼 수 있는 장면들이 흐릿하게나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불분명한 인과들을 억지로 이어 붙이면, 앞서 내가 정리한 줄거리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말이다.



허나, 이 인과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영선이 자신의 강아지 ‘꾸미’를 찾아준 모리에게 식사대접을 하는 장면 후에, 또 모리가 영선의 강아지를 찾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역순의 구성이 아니다. 후에 상원과 외국인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모리는 자신이 개를 찾는 덴 선수라고 말한다. 



또한 후반부에 모리가 영선의 악질 남자 친구와 싸운 것으로 나오는데, 영선의 카페에서 영선의 남자 친구가 모리에게 무례하게 굴었을 때 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카페에서 모리가 영선을 대하는 태도가 영 딱딱하고, 영선 역시 처음 보는 사람에게나 베풀 법한 호의를 표하고 있기에 단언하기 어렵다.


더 많은 예시들을 들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인과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묶든 불완전한 이야기로 맺어진다는 사실이다. 또한 영화 속에 나타난 인과 관계라 할지라도, 영화 속의 일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이는 기억 속에서는 어떤 인과도 선명할 수 없다는 인식의 은유에 가깝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 현재, 미래 중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과거뿐일지도 모르겠다) 인과 관계가 불투명한 것처럼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시계처럼 시간을 분절할 수 없고, 우리의 기억들은 시간이나, 어떤 것을 기준으로 정렬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의 언덕>의 편지가 모리의 의해 취사선택된 기록이며, 편지가 쏟아진 것처럼 그 시간도 무작위로 섞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보면 홍상수가 생각하는 시간이란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시점들이 가진 이미지들의 종합, 어떤 총체적인 경험으로서의 기억에 가까운 듯 보인다. 이는 우리가 시간을 총체적으로, 다소 추상적이며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은유한다. 그 인식을 확장해보면 우리는 매순간 과거가 되는 시간을 온전히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꿈’이라는 환각의 이미지

<자유의 언덕>에서는 이 환상성과 연결되는 시간의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하루는 오후 5시가 되어도 모리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렇게나 게으른 모리가 과연 서울에서 이 모든 일들을 실제로 겪었을까? 사실은 아무도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모리의 말처럼 모든 것이 꿈, 혹은 상상이 아닐까. 영화의 결말 역시 모호하다. 권과 모리는 일본으로 돌아가 자식을 놓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갑작스러운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래서 영선과의 만남도 한바탕 꿈인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게 끝인 줄 알았건만, 숙취가 가시지 않은 영선이 모리가 묵는 게스트하우스 방에서 잠을 깨는 장면이 뒤따른다. 영선과 모리의 대화를 들으니, 영선이 모리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술을 마신 다음날인 듯하다. 이렇게 끝난 줄 알았던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시작과 다름없는 결말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그러니 우리는 시작점으로 돌아가 아무리 영화를 돌려보고 돌려봐도, 영화 속 사건들에 대해 그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으며, 어떻게 설명해도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결국 온전히 인식할 수 없기에 환상처럼 느껴지는 시간은 무존재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환상은 아니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홍상수 감독은 <자유의 언덕>에서 시간의 해체와 전복을 통해 시간으로부터 자유를 꾀한 듯하다. 하지만 자유로 향하는 첫 발걸음부터 언덕이다. 사실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환상은 이미 영화라는 매체의 내재적 특성에 의해 부정된다. 우리의 삶이 탄생에서 죽음으로 끝나듯, 영화에도 명백하게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그건 분명히 시간이다. 우리의 시간. 극 중 모리와 다른 인물들과의 첫 만남이 항상 ‘한국에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질문으로 반복되는 것을 보면, 홍상수 역시 인간은 시간에 매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우리는 시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지만, 결국 시간이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부딪힌다. 모리가 게스트하우스의 조식 시간(표준화된 시간으로 뉴턴의 절대적인 시간을 상징)에 대해 항의하다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장면이 그렇다.


허나, 시간에 대한 이 왈가왈부가 다 무슨 소용인가. 자신이 지금 권을 기다리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모리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곧 어떻게 사느냐다. 시간이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 즉 삶을 잘 살아나가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삶을 살아가는 것. 어차피 현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종합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순간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상관없으며, 내가 미래에 모든 희망을 걸며 살든,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살든, 당장에 집중하며 살든 자신의 '삶'이다. 우리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산다. 그래서 모리는 권을 찾아 무작정 한국으로 들어왔다. 홍상수 감독은 <자유의 언덕>에서 시간이라는 언덕을 버겁게 오르내리지만, 언덕을 만든 건 자기 자신이다. 그래도 그는 언덕을 넘는 법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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