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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Apr 27. 2018

기록한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Visages, villages (Faces, Places)

좀 지쳤다. 공부가 지겹지는 않았으나 시험은 싫었다. 감상문을 쓰기에 앞서 이런 말을 뱉고 싶었고,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영화와 다큐멘터리는 다르지 않느냐고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결국 똑같지 않나. 우리의 삶도.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찾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에 힘을 쏟는다. 역시 얼마 못 가 지친다.  

 

와중에 보고 싶었던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참여하고 있는 연구와 관련한 자료를 찾다가 발견했다. 우연히. ‘Agnes Varda’ 그녀 작품의 성찰성에 대한 글이었다. 그녀는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였다. 단순한 형식성의 성찰은 아니었다. 이런 말 웃기지만, 참 바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의 영화 제목들이 좋았고, 그녀를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이 좋았다. 시험이 끝났고, 잠을 좀 잤다. 새벽께 일어나 다른 과제를 마무리하고 그녀의 다큐를 틀었다. ‘Visages, villages’ 그녀는 JR이라는 사진가와 함께 외딴 장소들을 찾아 사람들의 얼굴을 찍고, 크게 출력해 어딘가에 붙이는 작업을 한다. 벽들, 기둥들, 급수탑, 기차의 화물칸 등. 일상적인 삶들을 기억하는 방식인 듯 했다. 

 

사실 이 글보다는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정리하고 싶어 이 글에선 영화를 보며 들었던 생각의 단편들을 두서없이 모아 둘 계획이다. 

 

그녀와 JR은 어떻게 만났나. 그들은 이제까지 만나지 못했고, 만나기 위해서 만났다. 지루한 우연의 선후관계는 중요치 않다. 모든 일은 우연이고, 우리는 어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필연이 되면 그 모든 과정은 운명이 된다. 그래서 아마 관계맺음이 그토록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겠지. 그들도 누군가의 얼굴을 만나기 위해 공간들을 찾아간다. 사진기와 트럭 한 대면 누군가를 만날 채비가 끝난다.  

 

그들은 그렇게 만난 누군가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아니, 잊을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만난 얼굴들이 바로 기억의 공백 속으로 사라지지 않게”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뿐. 자신의 모습이 혹은 자신이 아끼는 누군가의 모습이 커다랗게 출력되어 그들 앞에 설 때, 사람들은 어떤 벅참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저 거울에서 마주치는 자신의 모습과는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누군가의 얼굴, 초상이라는 건 그런건가보다. 어떻게 보여지느냐 역시 중요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그 얼굴로 기억하니까. 정확히는 서로와 서로가 주고받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감정이 그 속에 들어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단지 얼굴일 뿐인, 어떤 얼굴들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느낀다. 그러나 기억은 사라진다. 언젠가 벽은 갈라지고 집은 무너진다. 내리는 비에 조각날 것이고, 부는 바람에 날릴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기억도 흔적만 남는다. 병에 걸리면 아예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한다. 단순히 기억하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그 얼굴을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건, 기억하겠다는 것이 아닐까. 잊을 수밖에 없음에도 잊지 않으려 노력하겠다는 것. 혹은 잊을 수 없다는 것. JR도 누군가의 초상을 집 벽에 붙이는 작업을 끝낸 뒤, 바르다와의 대화에서 그런 말을 한다. “얼마나 오래 그 집을 지킬까요. 나에게 집은 여기저기인데”. 우연히, 잠시 만난 사람들을 기억한다는 건 무엇일까. 그게 ‘집’과 같을 수 있을까.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 느꼈던 어떤 것들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염소의 뿔을 자르지 않고, 물고기들의 초상을 급수탑에 붙이는 것처럼. 레비나스는 말했다. 얼굴이 얼굴로서 드러나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열린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에 대한 기록은,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정한 의미로서의 기록은 그저 그들을 담는 것이다. 어떤 기교도,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기록도 정말 필요한 것일까. 모든 기억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일까. 나는 해변으로 밀어버린 독일군의 요새 잔해 만큼엔 사진을 붙이지 않기를 바랬다. 그 요새는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래서일까. 해변에 붙인 사진은 파도에 금방 쓸려갔다. 그들 역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두렵기도 했다. 기억을 위한 그 기록은 파도를 타고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쉽게 스러져 흩어진다면, 우리의 노력은 그저 허망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기억한다. 그녀는 JR에게 고다르를 소개시켜주기 위해 근 5년 만에 그의 집을 찾아간다. 잘은 몰라도 자끄가 죽은 후로 둘의 관계도 어려워진 듯 하다. 약속까지 해놓고 고다르는 나타나지 않는다. 집을 찾아가보니 그녀만이 읽을 수 있는 암호만을 남겨뒀다. 그녀는 고다르가 좋아했던 빵을 문에 걸어놓고, 대답을 남긴다.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고맙지 않지만, 그럼에도 고맙다는. 88세. 어떤 감정에도 초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고다르를 탓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일렁인다. 아마 아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있겠지. 그녀를 위해 자기 할머니를 만날 때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JR이 선글라스를 벗어 보인다. 그렇게 여전히 일렁일 수 있는, 순수한 그녀의 눈망울과 마주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기록하고 기억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건 결국 자신만의 방식이 될 수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기록하며 기억하며 사랑해야하지 않을까.


인상적인 그녀의 사진 몇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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