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야기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on Aug 01. 2018

엄마에 다녀왔다

경주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었다. 경주는 나의 고향이다. 누군가에게 고향은 향수를 일으키지만, 나에겐 그저 어릴 적부터 살았던 곳이다. 아무런 감정도 없을 수야 없지만, 딱히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나를 자극하지는 못한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감기도 하지만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하기도 한다. 오히려 반대랄까. 경주에 가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왠지 모를 긴장과 걱정이 앞섰으니. 다시 또렷해진 초점은 마치 내가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느낌을 준다. 언젠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당분간은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혹은 시간을 내지 않을 것 같아서. 


 

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렸다.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결국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할 것을 알지만, 언제나 엄마와의 만남 그 직전에 똑같은 고민을 한다. 엄마는 표정이 별로 없다. 근심이 얼굴이 되버렸다. 요즘은 좀 낫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의 표정을 보고 싶다. 짐을 내려놓고 엄마를 기다렸다. 사실 나는 언제나 엄마에게 안기고 싶다. 당황하는 엄마의 표정을 대수로워하지 않고, 넉살 좋은 아들처럼 빨리 집에 가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다고 얘기하는 상상을 했다. 언제나처럼. 지금도. 엄마가 도착했다. 경주에 내려온 나를 봐도 엄마는 활짝 웃지 않았다. 왔냐는 말 한마디와 함께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내가 경주에 간다고 했을 때도 그러라고 하곤 말았다. 그래도 나는 엄마의 속내를 모르진 않아서,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이것이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 역시 과연 그때와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생각한다. 매미가 지겹게 운다. 어떤 이야기들은 지금 꺼내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 또 어떤 이야기들은 나중에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평소 말수가 없는 엄마와 차를 타고 가는 그 시간을 꽉꽉 채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 대화들 중 태반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엄마는 기억할까.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가끔 눈의 초점을 흐린다고 했지만, 언제나 나의 의지는 아니다. 나는 집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했다. 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릴 것이고, 나는 그 시간 동안 짐을 풀 것이기에. 그렇지만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흐른다. 밥을 먹었고, 짐을 풀었다. 내 가방 속에는 엄마를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래서 나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서로를 위해,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시간은 이미 늦었다. 엄마는 잠자리를 깔고,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렇게 또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시간은 너무 빠르다. 밤이었다. 엄마가 잠들기 전 잠시 엄마 옆에 누웠다. 같은 방향으로 누웠지만 우리는 그저 티비를 봤다. 평소에는 보지 않는 티비를. 엄마가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엄마는 잠이 오냐고 물었다. 설명할 수 없어 아니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다시 티비를 봤다. 자주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엄마는 나의 안경을 머리 맡에 뒀고, 나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뒀다. 잠시 잠이 깬 나는 안경을 찾아 썼다. 다시 많은 것들이 또렷해졌다. 나는 나의 잠자리를 찾아갔다. 


 

아침이 되면 엄마는 없다. 잠에서 완전히 깨기 전까지는 엄마의 목소리가 잠시 들렸지만. 냉장고를 열면 내 눈높이에 놓여있는 요거트와 바나나 우유. 그런 것들. 흔적만 남아 있다. 그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나서 소파에 앉아 티비를 봤다. 지금은 내 방 침대에 앉아 글을 쓴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보내준 반찬들과 과일이 있다. 또 티비를 보며 멍하니 있었던 시간. 어떤 약속을 했던 것처럼 엄마는 점심 시간만 되면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엄마는 직장으로 돌아가기 전 나를 시내에 태워줬다. 나는 엄마가 사무실에 있을 동안 카페에서 글을 썼다. 엄마에 대한 글은 아니었지만, 엄마를 위한 글이었다. 정확히는 엄마와 거의 상관이 없는. 그렇게 글을 쓰다 오후가 지나면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는 와중에, 어떤 하루의 저녁은 별안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데리러 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지났지만 엄마는 연락이 없었다.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고,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갑자기 엄마에게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잠시 바빴다고, 미안함을 전하는 엄마의 말에 한없는 안도를 느꼈건만, 나의 대답은 고작 할 일이 많았으니 괜찮다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딱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무언가, 내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기에 이 글을 쓰고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무엇을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별다른 일 없는 5일을 보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엄마는 일을 해야했고, 나는 글을 써야했다. 엄마는 나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주기 위해서, 나는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옳을까. 눈을 감고 깜깜한 상태에서 고민한다는 건,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상태를 방증하는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터미널에 데려다 주고 돌아갈 줄 알았던 엄마는 나를 배웅하겠다며 함께 차에서 내렸다. 버스 시간이 남아 우리는 터미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잠시 이를 닦으러 갔다. 내가 돌아오니 엄마는 엄마의 엄마 얘기를 했다. 작년 1월 이래 볼 수 없게 된 나의 할머니. 우리 엄마가, 사랑하는 엄마. 그 이야기에는 소상한 추억이 주는 즐거움도,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작별을 맞은 사람의 슬픔도 없다. 후에 내가 삶을 되돌아볼 때 느끼지 않길 바라는 단 하나, 후회 뿐이다. 그 후회와 후회에 대한 후회 뿐이다. 엄마는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이를 닦으러 간 사이, 엄마는 할머니가 떠올랐던 걸까. 그럴 때면 아들인 나는 무슨 얘기도 할 수 없어서, 아들 같지 않은 대답이나 하고 만다. 후회되느냐고. 엄마는 그렇다고 답했다. 무서웠다. 나는 할머니를 보내드릴 때 조금도 울지 못했다. 
 
 

시간은 흐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시간은 분명히 흐른다. 버스를 타러 가기 전 헝클어진 엄마의 머리를 정리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선 후, 나는 엄마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있을 엄마를 위해 그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한 마디를 더 하지 못했다. 왜 이토록 어려울까.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반투명 시트지가 붙은 유리에 비친 건 흐릿한 내 얼굴 뿐이었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면, 엄마는 언제나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없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발과 손을 동동 구르며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멀리에 있으려는 아들에게 엄마는 그저 이모티콘을 하나 보낸다. 그럼에도 엄마와 나는 서로를 아무 표정없이 바라본다. 그건 나의 부족일까. 나에게 향하는 엄마의 마음이 한없기 때문일까. 


 

나는 이제껏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답장을 보냈다. 

나도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없겠네.
 
 
엄마는 나에게 곧 집이었는데.
 
어느새 엄마는 엄마가, 집은 곧 집이 되었네. 


 

매거진의 이전글 드랙쇼, 휴머니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