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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Apr 02. 2018

드랙쇼, 휴머니즘.

시끄럽고 어두운 곳에서 안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행복이 있기를.

생일을 맞아 친한 누나들과 난생 처음 클럽을, 그것도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클럽인 ‘트랜스’에 갔다. 최근에 자주 찾게 되는 음악인 4 non blondes의 “what’s up”이 나오고 있어 반가웠다. 요즘, 세상을 보면 탄식이 나온다.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끔찍한 동시에 놀라울 지경이다. 운 좋게도 주말 새벽에는 쇼가 있다고 한다. 거기서 난생 처음으로 드랙 퀸 쇼를 봤다. 한껏 기대했음에도, 영화 <헤드윅>이나 <록키 호러 픽쳐 쇼>를 주의 깊게 봤던 적이 있었음에도, 오, 괴랄했다.   


출처 : 클럽 “TRANCE” 인스타그램 계정, @salonciaga


드랙, 많이 들어봤지만 아무것도 몰랐다. 드랙drag은 자신의 생물학적 성sex과 반대인 성으로 분장하는 행위를 이른다. 남성이 여성 분장을 하면 드랙 퀸queen, 반대 경우는 드랙 킹king, 이들의 쇼를 드랙 쇼라고 부른다. 나는 왜 괴랄하다 느꼈을까. 이 글을 쓰며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한 언니들의 쇼를 곱씹는다. 언니들은 기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서 여성 팝스타 음악에 맞춰 몸짓을 털었다. 형형색색의 조명 아래서 더욱 진해지는 언니들의 여성성은 시각적으로 강렬한 동시에 의문을 불렀다. 여자인가? 남자인가? 그 모호함을 온몸으로 내보이는 언니들의 공연을 보다보니 그 질문이 얼마나 가벼운지를 깨닫게 됐다. 


여자와 남자, 일상에서 섹스과 젠더gender는 거의 동일한 ‘성별’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학문 영역에서는 두 용어를 구분한다. 섹스는 말그대로 섹스, 젠더는 개인의 성 인식과 관련한 사회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에 대해 “‘여성’이라는 범주는 권력 체계의 생산물이며, 젠더는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된다”고 설명했다. 섹스와 완전히 불가분 관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태어나 살아가는 환경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사회 구성물적인 개념이기에 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출처 : youtube 캡처,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 S7 EP3


 이러한 점에서 언니들의 쇼를 보면, 인간이라는 하나의 총체적 존재를 남/여로 이분화하는 생물학적 성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시도이자, 기존의 젠더 관념을 파괴하는 공연 예술이지 않을까. 남성도, 여성도 아닌 모습의 언니들은 ‘여성’으로 분장했다기보다는 아예 새로운 젠더를 창조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언니들은 수염을 붙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드러내기도 한다. 간성intersex이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만들어낸 이분법적 사고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언니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드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취미일 수도 있다. 어떤 언니들은 드랙할 때만 언니이고 평소에는 형일 때도 있다. 모두가 게이인 것도 아니고, 남성만 드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언니들의 모습은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인간인 것처럼, 드랙을 할 때는 언니들 모두 온전히 드랙 퀸으로서 존재한다. 젠더가 고정불변하지 않다는 사실이 언니들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그렇게 본다면 정작 립싱크를 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닐까? 우리는 그저 학습된 여성, 남성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이 아닐까? 한 마디로 우리가 자신을 남자로, 여자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언니들은 드랙 쇼를 통해 젠더를 비롯한 성별, 성 정체성 등 다양한 소수자적 담론을 아우르는 동시에 뛰어넘어 자기 표현의 예술을 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모습에 당당하다. 멍청하게도 나는 그런 언니들에게 남자에요, 여자에요?라고 물은 것과 다름없다. 도대체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나는 몰랐기 때문에 괴랄하다는, 뜻도 모르는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물론 언니들에게도 역설적인 면이 있다. 언니들이 여성의 성기를 조롱하는 뜻의 fishy와 같은 성차별적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나, 언니들의 지나친 여성성은 오히려 각각 남자와 여자라는 젠더가 가지는 사회적인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나는 그날 쇼의 진행을 맡은 드랙 퀸 맏언니가 중간중간 남자 목소리로 하는 농담을 들으며, 마치 하리수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젠더를 농담거리로 소비하는 혐오자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들의 젠더를 희롱하는 유머를 내면화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다르게 볼 수도 있다. 퀴어queer라는 단어는 원래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부정적 언어였지만, 지금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긍정적 언어로 바뀌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언니들의 드랙 쇼 역시 감춰 마땅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오히려 넘치는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차별의 언어들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언니들의 피날레 쇼를 보자. 트랜스 클럽의 피날레는 “CLOSING CLEANSING SHOW”, 제목 그대로 화려한 의상을 벗고, 진한 화장을 지우는 쇼다. 서늘한 조명 아래, 화려했던 언니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언니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렇다. 공연에 흠뻑 빠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이태원 클럽과 같은 어두운 곳이 아니라면, 언니들은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니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만큼만 다를 뿐인데, 언니들의 다름은 보여지는 순간 전시품이 된다. 그런 언니들의 민낯을 보면서 생각한다. 쇼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드랙 퀸이 아니라 한 인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섹스와 젠더 같은 기준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고작 몇 가지로 구분짓는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고,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에 옳고 그름을 따진다. 누군가는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러 소수자 중 차별적 시선이 그나마 덜한 신체장애인들의 패럴림픽은 마치 일어나지도 않는 일처럼 여겨진다. 똥남아, 파퀴벌레…, 결국 ‘벌레’들이 모여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까지 감시하는 잘못된 문화가 굳어진다. 소수성과 희소성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인간은 ‘구분’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노력한들 그 설명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어떤 성별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기 이전에 그저 인간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어울릴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회의와, 누군가에게 어울림을 강요하지 않는 배려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기적인 인간 종種들이 맺어나가는 관계는 마찰을 경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마찰이 서로를 돌아보게 하는 가벼운 정전기에 그칠 것인지, 벼락이 되어 서로를 내리치게 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나는 그날의 이태원 클럽 트랜스가 마치 지하 벙커처럼 느껴졌다. 언니들의 드랙쇼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보이기 위하여, 과장된 몸짓을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올까. 여전히 어둡고 시끄러운 곳, 보여지지 않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곳에서 안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행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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