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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Mar 21. 2018

다큐프라임 <청년, 평범하고 싶다>

할 수 있을까?에 대답하기 위해서.

청년평범하고 싶다 

28살이 되던 해, 이진희 씨는 원하지 않았던 어둠을 만났다.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보통의 날들을 살아가고 있었던 진희 씨는 한순간에 메탄올 실명 피해자가 됐다. 운이 나쁘게 이렇게 사고를 당했거든요 대기업에 휴대폰 부품을 납품하는 하청업체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다 일어난 일이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애한테 보탬이 되고도움을 줬으면 그런 공장에  갔을  아닙니까 진희 씨의 부모님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만 같다. 절박한 마음으로 찾아가는 병원의 의사들 모두 시신경이 손상되어 각막 이식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진료실을 나가며 의사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진희 씨의 아버지, 담배를 피는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진희 씨. 그저 평범한 삶을 바라는 진희 씨 가족은 앞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보통의 날들> 

<보통의 날들>, <최저 인생>, <평범하고 싶다>, <할 수 있을까?>, 총 4부작으로 구성된 EBS 다큐프라임의 2017 시대탐구 청년 평범하고 싶다(이하 ‘청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이진희 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진희 씨는 나와 같은 대학생이었다.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 탓에 돈을 쓸때마다 ‘잔고’를 계산하는 형편은 나나 진희 씨나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 진희 씨가 공장에 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대부분의 청년들처럼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감히 비유하건대, 한국에서의 삶이 캄캄한 청년들이 비단 진희 씨 뿐일까.  


이 의문이 다큐에 담긴다. 청년은 도대체 누구인가. 한국 사회에서는 청년을 88만원 세대, N포세대달관(?)세대 등으로 일컫는다. 구체적인 청년 담론 관련 신조어들을 한 번 살펴보자. ‘오스트랄로스펙쿠스’, ‘티슈인턴’, ‘동아리고시’, ‘공시오패스’, ‘자소설’, ‘청년실신’, ‘열정페이’, ‘생민족’, ‘회의주의자’, ‘사축’, ‘찍퇴’ 등 청년의 다양한 세태들을 반영하고 있는 이 용어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무직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으로 시작해 직장인으로 이어지는 일부 청년세대의 언어들이라는 것. 청년은 도대체 누구인가하는 앞선 물음에는 결코 단순하게 대답할 수 없음에도, 이렇듯 한국 청년의 범주는 너무나 단단하고 좁은, 인서울 대학생으로 굳어졌다. 


물론 대학 진학률이 70%에 달하기는 하지만 30% 역시 결코 적지 않고, 지방 대학생들의 소식은 고향 친구들을 통해 알음알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또한 2018년 기준 대학 중도포기자의 비율은 6.3% 정도이며, 통계를 낼 수는 없겠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열악한 근로환경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경우도 체감상 빈번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은 언어로 재현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소외와 차별을 유발하는 지잡대 ‘똥통 정도로, 차별이라도 받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하는 현실이다. 언어로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집합적인 무관심, 곧 청년 담론에서의 탈락 및 소외를 부른다. 누구도 녹록치 못한 헬조선에서 소수자 속에 언제나 더 한 소수자가 있다는 사실은 뒷전의 문제로 취급된다.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최소한의 언어가 부재한 상황이니 그들의 연대와 집합적인 목소리 역시 묘연하다. 이는 그들을 둘러싼 문제가 사회적인 의제로 설정될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 구의역 김군 사건이나 청년이 오토바이 배달 도중 사망하는 사건 등이 이슈화되면서 이면의 청년들에 대한 인식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청년들 만해도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지적하기 위해 EBS는 <보통의 날들>에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카메라에 비친 모습 보니 어때요?” 자신들 앞에 놓인 카메라가 자신들을 둘러싼 편견의 시선처럼 느껴지진 않았을까.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그동안의 생각들을 풀어놓는다. 푸른 캠퍼스에서 뛰고 있는 젊은이들이런  마치 청년의 대표 이미지인 것처럼”, “공장이  어떻다고 저는 이런 직업에 대한 편견이 싫거든요”, “일하는 환경이 안전에   신경써져 있었으면”, “저도  따라서 가고 싶은데 꿈을 잠깐 잃어버린 느낌”, “청춘은 아직 희망적이다그런 말을 하고 싶어요” 열악한 근로 환경과 부당한 처우에 대한, 담담한 것인지 무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의 항변이 알알이 박힌다. 그럼에도 꿈을 ‘잠깐’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아직 ‘희망’적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그들에게 긍정의 답을 돌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제조업에 종사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와 대학생이었던 진희 씨의 이야기가 묶여있다는 것은 보통의 날을 살아가는 누구나의 청년도 한 순간에 청년의 범주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름이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존엄을 박탈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제조업 종사 청년들과 진희 씨, 나와 같은 대학생들, 그리고 자신의 삶이 구조적 차원의 위협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청년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있으니. 청년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나이나 직업을 기준으로 답할 수 없다. 공감을 토대로, 집합적으로 내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청년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최저 인생>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돈’이다. 올해 최저시급은 작년에 비해 큰 폭으로 상승한 7,530원, 주휴수당을 포함한 월급으로 환산할 경우 1,573,770원. 4대 보험 적용시 실급여 140여만 원. 근로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금액이라지만 미래를 바라보며 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임을 알 수 있다. 여러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생활 임금'만 봐도 그렇다. 최저 임금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 임금이며,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일자리도 많다. 특히 기업의 ‘인턴’이나 도제식 문화를 가진 예체능 업계에서는 배운다는 명목 아래 임금을 주지 않고, 또 받지 않고 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이 경우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하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1부 <보통의 날들>에서처럼 ‘좋은’ 공장에 취업하는 것 역시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5월 기준 청년들의 첫 일자리 평균임금은 200만원 미만이 83%다. 물론 여기에는 아르바이트도 포함되어 있어 실질적인 취업자 비율을 따졌을 때는 낮아지겠지만, 9.9%라는 역대 최고의 청년 실업률을 찍은 올해에도 여전히 문제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득 양극화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진다. 2000년부터 2016년까지 255% 증가했지만 가계 소득은 138% 증가하는 것에 그쳤다. 2014년 OECD의 소득점유율 통계를 보면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은 44.87%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청년’은 최저임금과 직결되어 있는 청년들의 생존 문제를 2부 <최저 인생>에 담았다. 최저임금협의회의 실태와 최저 인생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보인다. 익숙해서 더욱 와닿는 모습들이 말이다. 


청년들에게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다. 다큐를 찍을 당시만 해도 반복하여 호소했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기업소득은 청년유니온의 전 대표이자 2017년 최저임금협의회의 노동자측 위원이었던 김민수씨가 협의회에 청년들의 쪽지를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을 보라. 가장 경청해야 할 목소리에 귀를 닫은 것은 누구였나. 인간다운 생존에 대한 호소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우습다.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삶이 걸린 문제를 두고 사측과 노측은 가위바위보를 하고는 웃음을 터뜨린다. 노동자대표도 일종의 권력이 되버린 걸까. 최저임금협의회의 위원장의 행동은 과연 중립적이었나. 모처럼 27분의 위원이  참석하셨습니다 이 협의회는 과연 협상을 위한 걸까. 그리고 김영한의 비망록. 돈을 올려 달라는 이야기가 삶의 가치를 올려달란 진심이(진심으로들려지길 바랍니다” 그들 앞에 내미는 청년들의 소박한 바램은 얼마나 허망하게 짓밟히는가. 왜 기본 임금이 아니고 ‘최저’ 임금인가. 누가 인간을 ‘사용’할 수 있는가. 누가 ‘것’인지도 모르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우습다. 


그나마 올해는 최저임금이 큰 폭으로 올랐지만, 최저 임금은 여전히 난제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들 다르기 때문이다. 임금이 오른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닌 것도 맞고,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이 없을 수도 없다. 나 역시 아르바이트를 구하면서 그 영향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난리가 난 것이다. 뉴스는 연일 물가가 상승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매년 월급 빼고  오른다고 투정하던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 인상에 의견이 다양하게 갈리는 것 자체가 정책의 영향이 복합적이고, 부정적인 영향 역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단 시행된 정책에 대해 보완점을 제시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의 기사들이 올라와야 마땅하지 않을까. 일부 기사들을 제외하곤 건전한 논의가 없다. 반란표가 하나도 없네” <최저 인생> 속 최저임금협의회처럼 말이다. 여러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생활 임금만 봐도 임금 인상의 필요성에 대한 다수의 공감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난리통과의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평범하고 싶다> 

저희 끼리 이야기해요. (사기업에는도대체 누가 붙는 거냐고… 그 중에서도 붙는 사람이 있고, 그런데 그 붙는 사람도 자기가 왜 붙었는지 모르잖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누군가는 그 경쟁을 뚫고 합격해 최저의 삶을 벗어난다. ‘청년’의 3부 <평범하고 싶다>에는 이렇게 가까스로 취업을 했지만 여전히 버티는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아버지가 직장 생활  해봤냐모든   해봐서  고생하는 거는 알아” 대기업에서 업무 실적이 좋았던 은호 씨가 제발로 퇴사한 뒤 아버지에게 들은 소리다. 생판 남이지만 나는 은호 씨가 퇴사를 결심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있다. 그러나 정작 은호 씨는 자신의 아버지를 납득시킬 수 없다.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살아왔는지 알지만, 자신의 희생은 희생이 아니라 소모라는 사실을.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간극은 왜 좁혀지지 않을까. ‘회의주의자’, ‘사축’, ‘찍퇴’, ‘카톡 감옥’... 직장인 관련 신조어만 봐도 직장인이 겪는 스트레스 대부분이 사내 문화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우리에게는 왜 당연하지 않은 걸까. 작년 통계를 기준으로 첫 직장의 근속개월 수는 18개월 남짓. 이직한들 크게 달라질 것이 있을까 싶지만 청년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  


충분히 아빠 나이 세대 같으면 견뎠을텐데  견디고 내려오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춘들도 많다.  먹는 것도  월급 값이야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회사를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 심리 상담을 다니면서도 퇴사는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다큐에 등장한 신영경 씨는 회사에 불만을 제기했다가 부당 해고를 당했지만 법정에서 승소해 복직했다. 당당해지고 싶었어요어쨌든 제가 좋은 선례가 됐다는  보여줘야 하니까” 버티는 삶을 살면서도 신영경 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이상을 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실  거의 지금 투명인간처럼 있어서 회사에서”, “저도 오래는  있을  같아요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힘든데 어렸을 때부터 무한경쟁사회를 겪어 온 세대에게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한국에서는 모두가 버티고 버티다, 누군가는 스스로 회사를 나오고, 누군가는 해고를 당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받아드는 성적표는 OECD 기준 자살률 1위 국가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는 “가장 모범적인 고용주를 가진 공무원이다. 2만 명도 채 뽑지 않지만 70만 이상이 응시한다. 특히 나의 친구들만 봐도 지방에 있는 청년들이 처한 현실은 더욱이 심각하다. 거의 모든 친구들이 교사, 준공공기관, 경찰 등 공무직을 준비하고 있다. 좋은 공장에 취직한 친구는, 친구의 친구로 딱 한 명 봤고,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아 다니는 친구들도 많다. 독립출판물을 내거나 팟캐스트, BJ, 유튜브나 네이버의 크리에이터 등 새로운 형태의 직업을 찾아 삶을 가꿔나가는 청년들도 있다. 더 나아가 진지하게 탈조선을 준비하는 청년들까지.  


<  있을까?> 

하지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는 삶도 막막하고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1부의 진희 씨는 말했다. 제가 일했던 (업체사장 벌은 받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현실을 어떤가. 청년 눈멀게  가해자들 재판... 결국 '엄벌' 없었다” 4부 <할 수 있을까?>는 문제제기에 해당하는 앞선 3부들과 더불어 그럼에도 희망을 찾으려는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4부에서는 아프면 환자지 xx와 같은 발언으로 청년들의 호응을 얻은 개그맨 유병재가 대만의 청년주거운동가와 스페인의 청년 정치인을 만난다. 그 사이로 한국의 대표적인 청년 정치인들이 느꼈던 어려움들이 부분부분 삽입되며 진행된다. 4부의 주제는 한마디로 청년 정치 참여의 활성화 필요성이다.

 

주거난이 청년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민달팽이유니온의 활동, 학사, 공동주거 실험, LH청년전세자금대출 등 다양한 대안이 나오고 있지만 수혜자의 수는 한정되어있다. 더욱이 대학생이 아니라면 각종 지원 사업에 지원할 자격조차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청년 범주에서 탈락한 청년들의 소외감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 참여 문제의 경우도 그렇다. 말하면 들어줄까” 20대 국회의 평균 나이는 55.5세다. 아직 청년들이 느끼는 정치적 장벽은 견고하다. 


<  있을까? 대답하기 위해서> 

‘청년’ 연작의 1부 <보통의 날들>에서는 메탄올 실명 사건의 피해자인 이진희 씨와 이제껏 청년 담론에서 소외받기 일쑤였던 청년 제조업 종사자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는 청년 담론의 언어가 재현하지 못했던 소수자들의 모습을 가시화해 ‘수도권 대학생’으로 좁고 단단하게 굳어진 청년 범주에 대해 타당한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1부에서는 담백한 은유적 수사에 의한 감정적 동화를 통해 자칫 제기될 수 있었던 선동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간다. 허나 1부를 제외하면, 그들이 말했던 차별적 시선이 다큐에도 녹아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방의 대학생’, ‘고졸’ 등 청년 안에서도 소수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청년들의 모습이 조금 더 담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2부 <최저 인생>은 당시 청년 유니온 대표이자 최저임금위원회의 노측 위원이었던 김민수 씨를 따라 최저임금위원회를 추적한 결과물로, 행간이 생략된 경향이 있지만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다양한 청년들의 이야기와 결합되어 일자리와 임금 문제의 맥락에서 1부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또한 최저 임금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을 위원회에서 다소 미미한 존재감을 보이는 김민수 씨의 시선을 통해 살펴보면서 미래를 비관할 수밖에 없는 청년들에 대한 감정적 동화를 일으킨다.  


3부 <평범하고 싶다>는 어렵사리 취직에 성공했지만 직장 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버티고 버티다 스스로 퇴사하거나, 끝내 부당해고를 당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가치관이 달라지게 된 지점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촉구할 뿐만 아니라 실업과 낮은 임금의 1차원적 문제를 넘어 삶의 질을 높이는 대안의 필요성을 암시한다. 또한 사측 인터뷰와 같은 기계적 중립을 거부하고 청년의 목소리를 온전히 대변하고 있다. 


4부는 대만의 ‘새둥지 운동’이나 스페인의 ‘포데모스’ 정당을 대안의 예시로 제시하고, 그 사이에 한국의 대표 청년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엮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청년들의 일자리와 임금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던 1, 2, 3부와 달리 갑자기 주거 문제와 정치 참여에 대한 대만과 스페인의 사례를 드는 것은 다소 안일하고 산만한 결론이다. 주거 문제는 일자리 문제와 마찬가지로 생활고를 유발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분리해서 다뤄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다. 정치 참여는 청년 문제를 포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할만 하지만 표면적 사례 제시에 그친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스페인의 사례인 포데모스를 조금 더 파고 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포데모스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유로운 토론과 소통을 위한 정당 내 기구와 레디트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의 적극적 활용이 있었다. 거의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한국에서도 현재 ‘와글’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을 통해 시민의 정치 참여를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일명 디지털 민주주의로서 온라인 환경에 익숙한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보다 적합한 방식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청년 정치 참여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대안 제시는 청년 문제를 다시 한 번 환기하는 차원에서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정리하자면 ‘청년’ 연작은 ‘일자리와 임금’ 중심의 맥락적인 구성과 청년들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손현주-김민수-등장인물 개개인-유병재로 이어지는 나레이션을 통해 총 4부에 달하는 내용과 형식이 비교적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결론으로 ‘청년의 적극적 정치 참여’라는 대안까지 제시하며, 청년 입장에서 청년 담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노력한 의미있는 작업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앞서와 같은 맥락에서 표면적인 청년상像의 지루한 반복에 그친다는 점이 전부에 걸친 공통된 아쉬움으로 남는다. 1부의 제조업 종사자들과 3부의 신영경 씨를 제외하면 그다지 시선을 끄는 인물들이 없다. (나머지 인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파급력의 측면에서) 언어적으로 재현된 청년상像에 대한 담론은 이미 충분히, 반복적으로 다뤄져왔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이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된 경향신문의 2016년 신년 기획 ‘부들부들 청년’의 구성을 따른 것의 한계로 보여지는데, 언어적으로 재현되지 않은 이들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영상의 매체적 장점이 상쇄되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다. 다른 방법으로 ‘트랜스 매체’적인 접근을 했으면 어땠을까. ‘부들부들 청년’에 등장하는 청년들에 대한 추적연구를 영상으로 담는 것이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글을 이렇게까지 길게 쓰게 된 동기는 1부의 진희 씨 때문이었다. 진희 씨를 보며 내가 느낀 건 무력감에 대한 무력감이었다. 나는 메탄올 실명 피해 사건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진희 씨보다 많은 것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자문했다. 내가 무엇이라고 진희 씨보다 덜 불행한, 조금은 덜 막막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건지. 근데 나는 괜찮은데 너무 그러니까 내가 부끄러워지면서근데 어쩔  없잖아요일단 닥쳤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진희 씨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진희 씨의 작은 입가 주위에 옅게 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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