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cques Aug 08. 2022

<라스트 나잇 인 소호> (2021)

Last Night in Soho

작년 연말은 여러모로 저에게 힘든 시간이었어요. 이미 몇몇 지인들에게는 여려번 이야기했던지라, 혹시 지인들 중에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있다면 지겨워하실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이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대하지 않을거라 믿고 다짐했던 소식을 저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고, 안타깝게도 제가 원했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 버렸기 때문인데요. 행여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 상황을 대비해서 온갖 상황설정도 해 보았지만, 새벽 3시에 기습적으로 날아온 메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더군요. 하필 왜 제가 잠을 자지 않던 그 시간에 메일이 와버렸는지. 충혈된 눈을 최대한 진정시킨 채 출근을 했는데 그날따라 일도 잘 안되고, 제 일이 아닌 일로 지적을 듣고, 눈치없는 동료는 핀트에 어긋난 질문을 하고. 모든 게 견딜 수 없어 퇴근시간만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그날 경복궁 근처의 서점에서 독서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갈아타려던 버스는 정류장에 제가 있는 걸 못봤는지 그냥 지나가 버리더군요. 다음 버스까지는 10분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날 한파가 몰아쳐 서 있는 것 조차 쉽지 않았고. 이 모든 상황들이 서러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어요. 서둘러 정류장 뒷편의 인적없는 골목길에 들어가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계속 울고, 늦게 도착한 독서모임에서는 애써 표정을 감추려 노력했었지요. 당시 저 빼고 모임에 참여했던 모두가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더군요.  


제가 세상 서러운 듯 울고 있는 동안 핸드폰에서 흘렀던 노래 하나가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직전 주말에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Last Night in Soho)>를 관람했었는데요. 이 영화를 하나의 주제로 정리한다면 머나먼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현실에 대한 자각, 그리고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바래왔던 꿈을 이루지 못할 때의 절망, 그리고 설사 꿈이 실현되었더라도 나에게 펼쳐지는 또다른 현실이 주는 실망감, 끝까지 만족할 수 없는, 그래서 영원히 꿈꿀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속성을 공포장르라는 외피 속에서 생생히 재현해 낸 영화였지요. 비록 후반부로 갈수록 촘촘한 설정이 조금씩 누그러져 아쉬웠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던 제 상황과 너무나도 맞아 떨어졌기에 더욱 몰입해서 관람했었습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주인공 '엘리'가 꿈속에서 1960년대의 세상과 조우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환상의 세계에 진입하고, 이 환상 속에서는 '엘리'의 분신과도 같은 금발 머리에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엘리' 자신과는 전혀 다른 외모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안야 테일러 조이가 분한 '샌디'는 후반부 진실이 드러나기 전까지, '엘리'에게는 꿈이자 이상, 그리고 무한한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 등장하는데요. 전쟁 이후 호황기를 이루며 한없이 행복할 것만 같았던 60년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엘리'가 처음 60년대의 세상을 만났을 때 시작된 노래, Cilla Black의 You're my world입니다.


https://youtu.be/Zf1ePdKUTec


당신이 나의 세상이며, 당신 없는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당신이 있어야 내가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하는 이 노래는 멜로디가 애절하면서도 깊은 향수를 자아내는데요. 원곡은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 Umberto Bindi가 부른 "Il mio mondo(나의 세상)"이라는 노래이고, 제가 좋아하는 이탈리아의 뮤지션 Gino Paoli가 공동으로 곡 작업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어쩐지, 이 애절한 멜로디가 제 귀를 계속 사로잡더군요. 60년대 이탈리아 노래가 품은 특유의 감성이 저를 자극할 때가 있거든요. 원곡에서는 마치 연극무대에 오른 화자가 독백을 하듯이 내뱉는 느낌이라면 실라 블랙의 노래에는 감정이 한껏 깃들여 깊은 사랑을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안야 테일러 조이의 목소리로 이 노래가 다시 등장을 하는데요. 사랑을 이야기하는 서사에서 사랑 이상의 것을 발견하기를 좋아하는 저이지라, 역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다다르고 싶은 세계, 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며칠 후에는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것 같았던 그 곳에 다다르지 못했고 아직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곳이 저려오는 것이 느껴져요. 언제쯤이면 이 노래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거나,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예전의 기억을 회상할 수 있을까요? 그 날이 온다면, 저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https://youtu.be/0QL-PUokBq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