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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ques Oct 30. 2022

"차이콥스키의 <사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눈사태> 빅토리아 토카레바


"이고리는 영화관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영화를 보여 주지 않았다. 홀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의자를 피아노 쪽으로 옮겨 갔다.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사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주문에 의해 썼다고 한다.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눈사태>, 지식을만드는지식, p.40


러시아에 대해 말하기 껄끄러운 시대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아티스트에 대한 보이콧이 줄을 이었고 일부 클래식계에서는 기존에 예정되었던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을 프로그램 목록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흔적을 지우려든 이들도, 문화를 정치와 연결시키는 것은 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모두 이해가 가기에 개인적으로 러시아의 유구한 문학과 예술을 동경해 왔던 내 마음 역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내 인생의 첫 러시아는 새해와 크리스마스의 열기가 한창이던 2017년말과 2018년 초,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는 정교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 달력 기준으로 1월 7일이 크리스마스 인지라, 연말에 러시아를 방문한다면 새해와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화려하고도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아래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기다렸던 사람들 속에, 나 역시 혼자였지만 더없이 행복했고 곳곳에 눈덮인 도시의 건축물들로부터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분장을 한 발레리나들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유치원생 시절 미술학원에서 들려주었던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이 나에게 다가온 첫 클래식 음악이었고, 이 때부터 러시아는 나에게 짝사랑 그 자체였다.



첫 러시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중고서적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빅토리아 토캬레바의 <눈사태>. 한겨울,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라는 짧은 소개글을 읽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방금 갔다온 그 도시 어딘가에 실제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주인공 이고리. 욕망을 우선시했던 나머지 결국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과 사랑 그 모든 것을 읽고 한때 자신이 버렸던 가족에게 돌아가는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아주 조금의 동정심이라도 느끼는건, 피아니스트라는 낭만에서 비롯된 감상적인 느낌일 수도 있겠고, 서구의 바람이 몰아치던 1980년대에 시대의 혼란을 어떻게든 감내해야 했을 그 부담이 전해져서일 수도 있겠다.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이기에 페이지 곳곳에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문장을 수놓는데, 러시아의 작품이기에 단연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를 연주하는 대목이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홀에서 그가 이 작품을 연주할 때, 금지된 사랑의 대상인 옐레나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극장 마지막 열에서 말없이 그의 연주를 감상하는 장면은 당장 영화로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생생하고 절절하다. 나 역시 혼자서 연습하곤 했던 작품이라 더욱 반가웠던 <사계>는 1월부터 12월까지 12개의 소품들로 이루어진 피아노 모음곡으로, 각 월에는 그 시기에 어울리는 제목이 달려 있다. 저 위의 문장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차이코프스키는 1875년 12월부터 다음해 11월까지,  <누베리스트>라는 잡지의 편집의 부탁으로 본 잡지에 매달 한 곡씩의 곡을 발표하고 이 곡들이 하나씩 모아 오늘날의 <사계>가 되었다. 책에서는 네 가지 곡이 소개되는데, 그 포문을 여는 곡은 "트로이카"라는 제목이 붙은 11월이다.


"<11월>의 음향이 탄식처럼 울렸다. 이고리는 차이콥스키가 곡을 쓰던 바로 그 순간에 느꼈을 감정을 똑같이 느꼈다. 그게 가능할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https://youtu.be/VKOrfUS0ZCA



다른 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밝고 경쾌한 작품임에도, 이고리는 이 곡을 작곡했을 즈음의 차이코프스키의 연배와 자신의 나이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시간의 흐름을 실감한다. 반평생이 흐른 시간, 우리는 지난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을까. 모스크바의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서 보았던, 트로이카 썰매의 그림이 눈에 선하다. 이어서, 내가 이 모음곡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곡이 등장한다.


"이고리는 <가을>을 끝내고 마침포를 찍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았지만 옐레나 겐나디예브나는 환호하지 않았다. 박수를 치지 않았다. 뒤집어 말하면,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잠자코 기다렸다. 보수주의적인 숙련된 지각이었다."


세월의 무게를 안고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10월에 해당하는 <가을> 또는 <가을노래>는 아련하고 처연하다. 그 슬픔의 무게가 내 마음마저 짓누르기에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 그 연주를 듣는 관객들도 곡이 끝난 후 몇 초간 고요한 적막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곡에는 쉽게 환호성이나 박수를 보낼 수 없다.  


https://youtu.be/cSPthwOl73A


"<뱃노래>를 연주했다. 그는 동시 통역자가 마을 전달하듯이 침착하게 연주했다. 기교를 부리지 않았고 사적인 고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다만 정화하게, 차이콥스키만을 연주했다. 멜로디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 만큼 독창적이라서 곡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엇다. 나머지 모두는 얼굴에 눈이 세 개 있는 것처럼 군더더기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를 처음 알게 된 곡이 바로, 6월에 해당하는 <뱃노래>이다. 이 곡 역시 <가을> 못지 않게 정적이고 침울하게 시작하다가, 중간 부분에서 러시아 민요풍으로 전환되고 다시 도입부의 선율로 돌아오며 차분하게 마무리된다. 재미있게도, 어렸을 때 배우 이영애의 LG카드 CF광고에 이 음악이 등장하였는데, 그 때 배우보다도 이 음악에 깊이 매료되어 무슨 음악인지 한참 찾았던 기억이 난다.


https://youtu.be/BvAsyHsGimA


조용히 피아노 선율에 잠긴 옐레나에게 이고리가 선물하는 마지막 곡은, 2월에 해당하는 <사육제>이다.


" 또 하나의 곡은 <사육제>였다. 매울 기술적인 곡이다 .기술은 피아니스트 이고리의 강점이다. 힘과 때림의 충만함은 기술이다. 이고리는 건반을 두드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한 번도 특별하게 쳐 보지 못했다. 그에게 음악은 인간의 욕망을 초월하는 굉장한 그 무엇이다. 이를테면 신앙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마지막 음절을 연주했다. 마지막 음이 공기 중에서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조용히 피아노 뚜껑을 닫고 일어섰다."

 

<사계>를 이루는 곡들이 전반적으로 정적인 소품인 가운데, <사육제>는 연주할 때 일정 수준의 기교를 요한다. 소설의 배경이 겨울이기에, 겨울의 끝자락을 장식하는 이 곡의 선율을 떠올려보니 동적인 선율 속에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암시된다.


https://youtu.be/9gNFP8mirtA


"옐레나 겐나디예브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고리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칫하면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불륜 이야기는 러시아라는 스산한 공간, 피아니스트라는 낭만적인 인물,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들과 함께 한 편의 슬프고 격정적인 서사로 완성된다. 그의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렸던 옐레나처럼, 나도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2019년 11월 초겨울 어느 날, 대관령에는 첫눈이 내렸고 그 곳에선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예정되어 있었다. 서서히 내리는 첫눈을 맞으며 콘서트홀로 향했고, 루간스키의 섬세하고 강렬한 타건으로 연주되는 쇼팽과 프랑크의 곡들은 오래토록 가슴이 남았다. 앵콜곡으로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스크랴빈의 에튀드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던 리사이틀의 후에는, 운이 좋게도 사인회가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 그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앨범을 가져가 그로부터 사인을 받았다. 그 순간, 옐레나의 눈물을 지긋이 바라보았을 이고리의 눈빛을 그려보았다. 그로부터 약 3년이 지난 2022년, 러시아의 만행 이후 이제는 이 추억도 포근히 남길 수 없게 되어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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