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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이브리지 Mar 26. 2023

안중근 묵념

[10년 후 더 빛나는 책] 안응칠 역사(안중근 지음)와 하얼빈(김훈)

안중근은 1895년 황해도에서 선교하던 빌렘 신부에 의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909년 하얼빈 의거 직후, 천주교 8대 서울대교구장이고 명동성당을 설립했던 뮈텔 신부에 의해 정치적 이유로 제명되었다가 84년 만에 다시 복권된다.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 날이다.   


안중근은 자주독립은 각 나라가 스스로 지키는 것이지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며, 당시 일본이 주장하던,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한다.”는 것을 거칠게 비난하였다.  


하얼빈 의거

소설가 김훈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의 현장을 간결하게 두 줄로 표현하여 끝낸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간결한 그의 소설을 읽는 데는 예상보다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20세기가 시작하는 전후의 대한제국의 실상, 동아시아의 외교 정세와 열강의 움직임, 그리고 막 한반도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천주교를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의거를 계획한 것은 언제인가?

안중근을 읽으며 유난히 하나의 질문이 맴돌게 된다. 처음으로 의거를 계획한 것은 언제인가? 안중근 스스로 답하기를 언제 이토를 죽일 생각했는 지를 모른다고 했고, 의거 전에 한 번도 이토를 본 적이 없고 얼굴도 모른다고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된 닷새 후 한 농민이 기차를 타고 가는 이토에게 짱돌을 던지는 일은 당시의 민심을 말하여 준다. 이후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안중근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아버지와 상의하여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계획하고, 먼저 중국 산동과 상하이를 다녀왔으나, 상하이에서 르각 신부를 만난 후, 그의 조언에 따라 고국을 떠나지 않고 교육 사업을 하는 것으로 변경한다. 그러나,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는 홀로 집을 떠나 연해주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의병에 합류한다.  


그의 의병 활동은 성공적이지 못해 한 달 반 만에 끝나고, 같은 뜻을 품은 동지들이 가까이에서 전사하며 마음속에 큰 짐을 지게 된다.


의병 실패 후 연해주에서 회한의 날을 보내었다. 1909년 9월 그는 갑자기 이대로 있으면 안되겠다 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 그의 의거 계획의 시작이다. 을사조약, 고종 폐위, 군대 해산의 역사 속에서 결정적으로 의병 전쟁에서의 패배가 그로 하여금 큰 결심을 하게 한 것이다.


자주독립

안중근이 큰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거까지의 삶의 과정도 있겠지만, 의거 후 5개월 간 감옥에 있는 동안 취조와 법정에서 보여준 그의 의연한 자세에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이웃을 도와주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를 때린 청나라 의사를 팼던 사건으로 인하여 법정에 여러 번 들락거렸고 진술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취조와 법정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필요성을 주장하고 일본이 주장하던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한다.”는 말을 맹비난했다. 동양평화는 일본이 아닌 각 나라의 자주독립에 있다고 선언한다.  


세상의 변화를 바르게 읽기

의거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잃었다. 다음 수순으로 일본은 동양 평화를 확산하고 문명을 개화한다는 명목으로 통치권을 수탈할 차례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 의거가 다음 해의 국권피탈을 앞당겼다고 볼 수 없다.  


당시의 가까이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정치, 경제 권력자들은 어리석게도 세상의 변화를 빨리 읽어서 일본에 기대어 이익을 얻는 데 열중했다고 한다. 세상의 변화를 빨리 읽거나 주어진 일을 빨리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현재의 변화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지금도 균형 외교와 자주 국방 그리고 경제적으로 탄탄할 때 동일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국가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묵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국립현충원과 효창공원을 가 볼까?”라고 물었을 때 아이는 흔쾌히 “그래!”하고 답한다.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가서 300개가 넘는 묘역과 위패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오늘을 묵념한다. 아이는 책에서 읽었던 이름을 찾고는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 날 안중근과 우덕순은 역사 속으로 걸어갔다.”


by 웨이브리지, 글모음 https://brunch.co.kr/@way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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