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에 들러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의 북쪽 건물인 법보전 안에서 팔만대장경을 직접 마주하였다. 지난겨울 초입에 봄이 시작되는 이즈음으로 팔만대장경 해설 탐방을 예약하였는데, 기다리던 그날이 다가오니 잠도 설치고 긴 운전길을 단번에 달려왔다.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26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지난 2021년 6월에 제한적으로 개방을 시작하여 지금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각 20명 정도에게 단 2차례 씩 개방을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 탐방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불교에서 대표적인 삼보 사찰이다. 삼보는 법, 불, 승을 의미하며, 특히 해인사는 법보사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81,350개의 경판에 구양순체로 일관된 글씨체로 오천 이백만 자의 불경을 작성한 것이다. 각각의 경판에는 작업을 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데, 서로 다른 이름이 1,6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폈으나,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였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고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기었고, 세조 때 팔만대장경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장경판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성종 때에 완성(성종 19년, 1488년)하였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해인사에 내려와 대적광전에 나란히 글을 남기었다.
다름 없는 국가와 개인의 기원
1251년에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불교를 통해 몽고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명목으로 국가 주도로 만든 기원이었다. 한편으로는 고려 위정 세력인 무신 정권이 불교계를 회유하기 위한 일환이기도 하다. 팔만대장경이 전쟁에서 이기게 할지는 만무하다. 오히려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들과 어깨를 견주기 위해 경제를 부강하게 하고 국방을 잘 준비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원의 의미는 불경을 만드는 국가적 행사를 통해 외세의 침입을 이겨내겠다는 정신적 간절함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을 준비하거나 시작할 때 저도 모르게 작은 의식적인 행위들을 한다. 지금처럼 새 학기와 첫 출근을 시작하고 월요일 출근을 할 때는 많은 사람은 단정하게 옷을 입고 강의실과 사무실에 제일 먼저 들어선다. 매일 마주하는 작은 회의와 발표에서도 마커펜과 같이 작은 준비물을 가지런하게 놓는 것도 그 시간이 잘 되길 바라는 정성의 일부이다. 그래서 팔만대장경과 펜을 가지런히 놓는 것은 그 주체가 국가와 개인의 차이이고, 또는 규모의 차이일 뿐 다름이 없다.
언제나 지금이네
해인사를 들른다 하여 주머니에 법정 스님 책 한 권을 챙겨 왔는 데, 마침 그는 젊은 시절 해인사에서 불교 수행을 하였다 한다. 초입에 있는 일주문에서 시작하여 제일 안쪽의 법보전까지 해인사를 한 바퀴 둘러보면 가장 기억나는 문구는 결국 일주문에서 다시 찾는다. “과거 천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옛 것이 아니고, 앞으로 만년이 오더라도 언제나 지금이네(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깨달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과거도 미래도 아닌 늘 지금을 살 수 있어야 한다.”에 있다는 것이고, 법정 스님도 여러 번 이 문구를 되풀이한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