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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이브리지 Feb 12. 2023

은하의 한 글자

[일상의 소설] 아빠의 연(戀)을 떠올리며.

집에서 채 1시간 거리의 병원에 누워 계신 아빠를 간호하느라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엄마에게 저녁으로 도시락을 챙겨드리고 이제 막 집에 도착한 직후였다. 은하의 휴대폰이 울린다. 간호원이 엄마의 전화기를 가로채, “환자분 곧 돌아가실 거야요. 빨리 오세요.”라고 외친다.


이번에도 일어나실 줄 알았다.

요양원에 들어가신 후 지난 4년 동안 아빠는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의사와 간호사의 말이 있을 때마다, 시간은 걸렸지만 며칠 뒤에는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였었다.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라고 은하의 남편은 말하면서도 오늘은 재빠르게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막 잠이 들려고 했던 9살 아이도 낌새를 느꼈는지 얼른 옷을 입는다.


지난 5개월 전이 떠오른다. “못 넘길 것 같아요.”라는 말에 은하 부부와 동생네는 장례식장을 어디로 할지 상의하고 있었다. 툭툭 반대말을 던지던 의사는 그날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빠를 살려내었다. 회복이라기보다는 간신히 돌아가시지 않은 것 같다.  


은하의 뒤통수를 치다.

120km의 속도로 운전해서 30분 만에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실로 올라갔다. 시계는 밤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가쁜 숨을 쉬며 매 번 다시 일어나셨기에 아빠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엄마의 손을 잡고서 편안히 눈을 감고 계셨다. 은하는 이번에도 아빠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빠는 은하의 뒤통수를 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저녁에 왔을 때 계속 있을 것을...


음압실 마지막 만남

하루 전 날 아빠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왔다. 코로나 시기여서 아빠는 음압실로 옮겨졌다. 은하는 아빠를 따라 음압실에 혼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산소포화도를 보여주는 계기는 70에서 90 사이를 널뛰기를 하였다. 폐렴 증세가 있으면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80 이하가 유지되면 많이 위험해 보였다. 숨 쉬는 힘이 없는지 숫자는 왜 이리 널뛰기를 하는지. 은하는 아빠의 손을 잡아본다. 차가운 한기가 전해진다. 오랜 병상 생활로 신장이 안 좋아졌고 발등이 퉁퉁 부은 데다 한쪽 무릎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아빠가 오늘따라 안쓰럽다. 은하는 병원 모포를 한 장 더 달라고 하고, 아빠의 목까지 얇은 이불 두 장을 덮어주는 게 은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은하는 다음 날 아침 엄마에게 인계하고 아무 일도 없는 양 출근을 하였다. 일을 하긴 했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느라 웹 페이지를 들락날락만 하였다.


아빠의 한 글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글자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아빠는 사인할 때 항상 어질 인(仁) 위에 풀 초(艸)를 붙인 한자 한 글자로 사인을 하였다. 그리고 은하에게 씨앗 인(芢)이라고 알려 주었다. 씨앗이란 뜻으로 종자가 널리 사용되어서 그런지, 잘 사용하지 않은 한자이다. 아빠는 사용하던 한 글자처럼 세상의 씨앗이 되고 싶었나 보다.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한 글자, 자식인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한자이다. 은하는 자기가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빠를 기억하지 못할 듯했다.


다시금 불러 보는 아빠의 연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고상욱 씨의 장례식장에는 조문객이 가득하다. 고상욱 씨는 ‘동네 머슴’을 자처할 정도로 동네의 궂은 일을 많이 하였고 덕을 베풀었고 동네의 지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지한 충고와 따뜻한 말을 건네었다. 장례식은 마지막 길을 가는 이에게 덕을 입은 사람들이 인사하러 와서 육개장을 먹으며 그들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은하 아빠는 돌아가셨고 아빠의 인연은 장례식장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빠가 퇴직한 지 20년이 지났고 10년 동안 치매를 겪은 긴 세월의 단절이 아빠의 연들을 이을 수 없었다.  어릴 적 높은 다리에서 바다로 함께 텀벙 뛰어들던 친구는 지금도 그 다리 앞에서 자전거 가게를 하고 계신다. 군사 정권 시절 우리 집에 가끔 와서 아빠와 술 한 잔 하시며 은하에게 공부 잘하라고 용돈 주던 아빠 친구, 막 40살이 된 아빠가 유일하게 아는 어른이라며 주례를 부탁하던 그 당시 막 사회 초년생이 되었던 신입 사원도. 분명히 아빠도 누군가 함께 했고 그가 베풀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빠의 영정 사진은 중절모를 쓰고 웃고 계신다. 당일에는 제대로 알리지 못하였지만 아빠의 연들을 오늘 떠올린다. 그리고 은하가 아니면 아무도 모를 아빠의 한 글자도, 씨앗 인(芢).  



by 웨이브리지, 글모음 https://brunch.co.kr/@way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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