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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Dec 16. 2023

하루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기록법


경험을 지혜로 만드는 기록


드디어 블프가 끝났다. E커머스 기업들은 매년 하반기가 되면 블랙 프라이데이 준비에 열을 올린다. 그 말은 즉, E커머스에 다니는 회사원들은 하반기가 되면 "내 몸 하나 갈아서 매출을 당겨보자."는 무언의 서약을 하고는 일 폭주 기관차에 탑승한다는 뜻이다. 블프가 끝났다는 건? 아주 오랜만에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신을 차려보니 12월 첫째 주다. 블프가 끝나면 비로소 한 해가 마무리되는 기분이다. 연남동 카페 콘하스에서 오후 원격 근무를 하며 블프 회고록을 작성했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기록 인간.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계획하고, 회고하고, 정리하고, 기록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 어쩌면 기록하기 위해 실행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 회고 기록이란 “경험을 지혜로 만드는 과정”이다.

기록은 더 많이 적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간결하게 가지 치는 작업이다.


기록은 나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기록하는 그 순간, 나의 경험을 내 것으로 단단히 붙들어 각인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려면 지난 경험 중에서 엑기스를 벼리고 벼려야 한다. 몇 개월의 업무 중에서 남겨야 할 핵심은 무엇일까.


이때 가장 효과적인 질문이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다.


했던 일을 주르르 나열하는 기록은 뿌듯함은 남을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눈에 안 들어온다. 열심히 기록하고도 효용이 크지 않다. 심지어 나조차 잘 안 보게 된다.


하나의 키워드,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을 만큼 줄이고 또 줄여나가는 게 나의 기록 작업 방식이다.


한눈에 일의 목적, 실행, 결과, 개선점을 정리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했는지, 왜 했는지, 무엇을 잘했고, 무엇이 아쉬운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눈에 보인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서 꼭 잊지 말아야 할 마무리가 있다. 회고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인데, 바로 감사함을 기록하는 것이다. 지난 경험을 마무리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 감사다. 끝나고 나서 남는 감정이 감사함이 아니라면 굳이 귀한 시간과 노력과 감정을 쏟을 의미가 있었을까?


일이 끝나고 나면 가장 먼저 나에게 말해준다.

수고했어. 잘 해내주어 고마워.

나의 수고로움 덕분에 오늘 밤도 무탈하게 보낼 수 있어.

그리고 내 옆의 동료, 회사, 가족에게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기록한다.


퇴근하고 카페를 나서는데, 마법처럼 유튜브가 영상 하나를 추천해 줬다. (혹시, 나를 지켜보는 것 아닐까?)

기록학자 김익한의 기록법.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영상을 단숨에 보고 김익한 교수의 책 [거인의 노트]도 주문했다. 영감 가득했던 영상 메모를 아래에 남긴다.





기록학자 김익한의 [기록 방법]


영상 링크는 여기


1. 잊어버리기 위해 메모하지 말라. 그러면 반드시 잊는다.

2. 메모하면서 나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3. 기록형 인간은 전략형 인간이다.

4. 기록하면 누적적 삶을 살 수 있다.



일상 기록  

    2~3시간마다 1줄씩 무엇을 했는지 기록  

    하루를 마무리하며 보면 나의 하루가 영화처럼 펼쳐짐  

    시간을 압축적으로 살 수 있음  

    과거와 현재가 착 달라붙는 느낌  

    내가 무엇을 했는지, 좋아하는지, 잘하는지 잘 알 수 있음  


생각 기록 / 구상 기록 / 플래닝  

    하루 계획은 4~5가지 큰 덩어리로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계획. 반드시 목적을 상기.


지식 기록  

    수동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말고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리  

    책을 읽는 것은 내 궁금증을 해소하는 과정.  

    고민하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책에서 찾아서 내 답을 만들어야 한다.  

    책 보면서 메모하는 게 아니라 굵직하게 읽고 책 덮고 내 생각만으로 정리하라.  





기억을 내 마음대로 다루는 법


김익한 교수님의 영상에 영감을 단단히 받고는 그날부터 바로 [일상 기록]을 시작했다. 2~3시간마다 1줄씩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달만 하면 뇌 구조가 바뀐다기에 궁금해서 따라 해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1줄, 회의 끝나면 1줄, 점심 먹고 책상으로 돌아와 1줄, 퇴근하기 직전에 1줄, 일상 기록 노트를 늘 가지고 다니면서 딱 1줄씩만 썼다. 1줄이라서 1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 순간의 감정과 행동에 대해 짧게 기록한다.


2주 동안 일상 기록을 하면서 뇌 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뇌가 기억을 zoom-in & zoom-out 하는 기능을 장착한 것이다. 기억하려고 노력하거나 애쓸 필요 없이 자동으로 즉각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아이패드에서 지도를 두 손가락으로 늘렸다가 줄이는 것처럼 내 뇌에 저장된 하루의 촘촘한 기록을 압축해서 중요한 기억 위주로 요약했다가, 필요할 때는 다시 주름을 쫙 펴서 세세한 순간을 볼 수 있게 된다.


회사원이라면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점심 메뉴를 고를 때 "어제저녁에 뭐 드셨어요?"라는 간단한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는 경험을 종종 했을 것이다. 1달 전이 아니라 어제저녁인데 이렇게 기억이 안 난다고? 놀랍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못 한다. 어제저녁뿐인가 뿌듯하게 회의를 잘 끝내 놓고도 갑자기 날아드는 동료의 화살 같은 말 한마디에 "회사 생활 진짜 다 싫어."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나의 하루를 촘촘하게 기록하면 내 일상 자체가 콘텐츠가 된다. 기록은 내 삶의 스냅샷이다. 스냅샷을 연결하면 스토리가 된다. 모든 콘텐츠에는 스토리가 있다. 아래 그래프를 살펴보자. 이 그래프를 보면 누구나 국내 OTT시장 규모가 매년 일정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순해 보이는 이 그래프를 그리려면 꼭 필요한 기록이 있다. 매년 국내 OTT시장 규모 추이를 기록해 두어야 이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 2012년, 2018년, 2020년에만 기록했다면 절대 그래프를 그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성장 속도와 폭을 알 수 없고 그냥 단순하게 '성장했다'에서 끝나버린다.



일정한 주기로 촘촘하게 기록한 과거의 경험은 점(dots)이다. 점이 모이면 선이 되고 선은 방향을 가리킨다. 제각각의 방향을 가진 선이 모이면 그림이 된다. 내 삶을 한 편의 작품으로, 그림으로, 스토리로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서는 촘촘한 기록이 그 시작이다. 나만의 필터를 입히고 단순화하고 정제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아무것도 없이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다.


아래 그림은 BTS RM이 사랑한 아티스트이자 국내에서 가장 비싼 생존작가 타이틀로 유명한 이우환 작가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점으로부터 시작해 선을 이룬다. 그 선은 강렬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왼쪽) 동풍 ©헤럴드경제 (가운데)(오른쪽) 점으로부터 ©한경






나의 하루를 표정으로 기록한다면?


공부 리추얼에서 하루에 하나의 표정 스티커를 붙여 기록하는 앱 mooda를 소개받았다.



저녁 7시. mooda 앱에 무표정 스티커를 붙였다. 그러고 나서 요가원에 다녀왔다가 샤워를 하는데 잠깐만, 지금 내 기분은 스마일인데? 개운하고 너무 좋은데?!!


오후 3시에는 짜증이 막 났다가 저녁 7시에 무표정이었다가 9시 반에 스마일이면 오늘 하루는 뭐라고 해야 할까?


매일 일정한 시간에 스티커를 붙여야 할지, 여러 개의 스티커를 시간대별로 붙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하루 안에도 이렇게나 많은 감정들이 왔다 가는데, 나의 지난 시간을 내가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한 것 아닌가?


mooda를 소개해준 L님의 기록에서 가수 김창완의 [동그라미 답장 이야기]를 봤다.



"너무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위에 그린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아무래도 오늘을 스티커 한 개로 표현하라고 하면 그 무표정은 아닐 것 같다.

찌그러져도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니까.


오늘 나 기분 나빴나? 하면 Yes

오늘 나 행복했나? 그것도 Yes

근데 나 억울했잖아? 물론 Yes

그래도 뿌듯했고? 역시 Yes


그러니, 어떻게 오늘의 기분을 하나의 스티커로 표현할까


아침의 내가 나인가

오후의 내가 나인가

늦은 밤의 내가 나인가


모두 나라면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여지없이 행복해지는 나만을 수집해서 기록하고 기억해 버려도 되겠다. 그래, 그렇게 하자!


이번달의 끝에 어떤 스티커들을 모으게 될지 궁금해지는 걸.





줄이고 줄이면 무엇이 남을까?


지난주 퇴근길에 [러브 포레스트] 채널에 새로운 영상이 뜬 것을 봤다. 피로와 잡생각으로 듣는 둥 마는 둥 들으며 집에 왔다. 그리고 공부 리추얼 방에서 채준 님의 기록을 보았다.


옮겨주신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죽음의 순간에 가져가고 싶은 기억은 무엇일까? “


아까 대충 들었던 명상을 제대로 들어야 봐야겠다. 마음을 다잡고 따뜻한 차 한잔을 끓여 거실 불을 끄고 고요하게 명상을 시작했다.


가이드를 따라 현재의 몸에서 빠져나와 우주를 유영하다가 밝은 빛의 길을 건너 죽음을 앞둔 나에게 도착했다. 주름이 많은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 장면이 혼자가 아니길 바랐는데 아무리 생각을 고쳐보아도 죽음을 앞둔 나는 혼자였다. 남편과 함께라면 좋을 텐데. 죽음을 앞둔 나는 한 장면을 계속해서 재생하고 있었다.


우리의 작고 아늑한 집에서 남편과 서로의 등을 쓸어주는 장면. 잠들기 전 우리의 리추얼이기도 하다. 그 기억을 간직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미래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다가갔다. 눈물 대폭발이라는 수많은 영상 댓글을 보고도 믿지 않았는데 정말로 눈물이 콱 쏟아졌다.


미래의 내가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마. 될 일은 되게 되어 있어. “


지금의 내가 주름진 미래의 나에게 말했다.

”돌이키려 하지 말아요. 매 순간 나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으니까. “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현재로 돌아가려는 나에게 무표정의 노인이 말했다.

”많이 사랑하렴. 결국 남는 것은 사랑이야. “


서로의 등을 쓸어주며 사랑을 나누는 삶.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사랑]이었나 보다. 사랑을 아끼며 살지 말라고,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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