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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Mar 17. 2024

내맡김에서 벗어나는 내맡김


빈 시간을 인정할 수 없어서


격주에 한 번 심리 상담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스케줄 표에는 왜 빈 시간이 없냐고 물었다. 상담 센터에 오는 이동 시간을 빈 채로 둘 수도 있을 텐데 왜 상담 시간을 1시간이 아니라 이동 시간까지 포함해 3시간으로 잡아두었느냐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기분이 든다. 나에게는 휴식조차 계획된 일정이어야 했다. 해야 할 일을 해치우는 삶이 너무 싫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없는 나를 상상하는 것은 더 싫다. 나는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면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인 걸까.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구글 캘린더를 열었다. 꽉 짜인 캘린더가 숨 막히거나 싫지 않다. 빼곡한 캘린더는 내가 해야 하는 일, 즉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나는 잘 짜인 계획 안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낀다. 이상적인 계획이 아니라 현실적인 시간 속에 존재하는 [해야 할 일]은 [해낼 수 있는 일]이 된다.

왜 이동 시간까지 포함해서 계획을 짜두냐고? 이동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빈 시간을 허용할 수 없는 사람이고 이동 시간은 빈 시간이 아니다. 필요한 일,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인 만큼 그 시간 또한 정당하게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시간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동 시간까지 포함해서 일정을 계획한다.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선생님의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다. 진정한 자유는 계획의 경계와 무관하게 내가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 아닐까. 계획 안에서만 자유롭다면 그건 자유가 아니니까. 계획 밖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생산적인 삶에 조금 질리기도 했다. 비생산적이지만 소중하고 재미있고 한가하고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맞아, 나른한 시간.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시간 말고 마음을 풀어놓으며 차를 마시는 시간. 어차피 아무리 그러려고 노력해도 일주일 중 5일은 회사에서 극도로 생산적일 테니까. 이렇게 글 써놓고 뒤돌아서면 다음주 해야 할 일을 필요한 시간과 작업량으로 계산하며 구글 캘린더를 정리할 테니까. 나에게는 의도적인 비생산의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닐까.



집에 돌아와 일기장에 [내맡김]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2024년의 목표를 [거침없이 내맡김을 실천하자]로 잡았다. 지난 몇 년간 뇌과학과 심리학 공부를 하며 기록과 학습, 계획과 실천을 반복하며 탄탄하게 기본기를 쌓은 만큼 이제 나를 믿고 계획도 경계도 없이 달려보면 어떨까.





내맡김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날이 1월 초였으니까 3개월 즈음의 시간이 흘렀다. 1분기를 보내며 자주 [내맡김]을 되새겼다.


"내맡김 한다며. 그래놓고 왜 계속 촘촘한 일정표를 못 버리는데?"

"내맡김 한다며. 그래놓고 왜 정해진 시간에 못 일어나면 스스로를 혼내는데?"



나는 should be 컴플렉스가 심한 사람이다. 회사는 이래야 해, 리더는 이래야 해, 나라면 이래야지, 부모는 이래야지. 무엇이든 이상적인 틀을 만들어두고 그것에 끼워 맞추고 싶어 한다. 거기서 벗어나야 원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내맡김]을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내맡김조차 이상적인 틀을 상정하고 should be를 외치고 있었다.



내맡김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맡김은 [수용]이다. 나는 should be 컴플렉스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나는 일정표와 촘촘한 계획과 정해진 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조차 수용하는 게 진정한 내맡김이었다.



매일 계획을 세우고 실패하고 조정하고 다시 계획을 세우기를 반복한다. 일어나지도 않을 거면서 매일 밤 알람을 5개씩 맞추는 나를 보며 남편은 "이제 그냥 알람 안 맞추고 맘 편히 자면 안 돼?"라고 물었다. 그러게, 왜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시끄럽고 괴롭고 귀찮은 알람을 매일 맞추고 끄기를 반복하는 걸까.

나는 계획을 세우고 조정하는 그 과정 자체를 좋아하는 거였다.



나에게 루틴이란 [매일 6시 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6시 반에 일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루 종일 루틴을 지키려 애쓰는 모든 과정] 그 자체가 내 루틴이었다. 6시 반에 일어나려면 일찍 잠들어야 하고, 일찍 잠드려면 야근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하고, 야근을 안 하려면 일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하고, 그러려면 스케줄표가 필요하고, 하루를 제대로 보내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해야 하니까...? 이 모든 것은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 뫼비우스의 띠를 설계하고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정말이지 사랑한다.



목표 지향적인 사람들은 나 같은 과정 지향적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내 목표는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을 최대한 아름답고 즐겁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내 목표다.





시간이 없는 건 기분 탓이 아니라


이번달에 새로운 구글 캘린더 활용 규칙을 만들었다. 시간을 유형별로 나누어 계획을 짜는 것이다. 컬러로도 구분했다.



[주황색] 개인 작업 (ex. 독서, 글쓰기)

[노란색] 밑미 리추얼 (ex. 댓글, 기록)

[초록색] 부부 생활 (ex. 대화, 산책, 식사)

[보라색] 외부 일정 (ex. 모임과 약속)

[파란색] 운동

[회색] 회사 업무

[갈색] 흘려보낸 시간



대부분의 일정은 미리 반복 일정으로 설정되어 있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노력하지 않아도 일상에 루틴이 생긴 것이다. 회사 일정을 먼저 고정해 두고 그에 맞추어 앞뒤로 아침과 저녁 루틴(일기/스트레칭/명상), 주 2회 저녁 요가, 격주 1회 상담, 남편과의 주말 식사와 대화 일정을 끼워 넣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반복되는 고정 일정을 세팅하고 나니 놀랍게도 남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회사 다니면서 주 2회 운동하고 주 1회 상담받고, 주말에는 남편과 식사를 하는 삶 자체가 빠듯한 거였다. 여기에 밑미 리추얼 메이커 활동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간간이 들어오는 외부 강의나 컨설팅 일정까지 있으니 늘 시간이 없는 건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였다.



나에게 내맡김은 빈틈없이 짜인 구글 캘린더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빈틈이란 원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 나에게 빈틈이 필요하다면 기존의 일정을 [삭제]하고 흘려보내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끼워 넣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존의 일정을 삭제하지 못해서 괴로웠다. 회사 일정을 어떻게 삭제해, 내가 리추얼 메이커인데 리추얼 일정을 어떻게 축소해, 최소한의 체력 관리를 해야 하는데 운동을 어떻게 빼먹어, 약속한 모임인데 어떻게 안 가? 맞다, 삭제할 수 없는 일정도 분명 존재한다. 지금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니 출근 1시간 전에 연차를 쓰거나 모임 전날에 약속을 취소하라는 게 아니다.



빈틈없는 일상 속에서 [흘려보낸 시간]에도 회사 업무나 운동처럼 정당한 지위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그게 내가 찾아낸 [내 방식의 내맡김]이다. 나는 2024년에 살고 있고 스마트한 구글 캘린더로 일상을 관리할 수 있는데 왜 꼭 구글 캘린더 밖에서 자유로워야 할까? 진정한 내맡김은 촘촘한 계획과 끊임없는 수정-보완-업데이트를 사랑하는 내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내 성격에 맞게 구글 캘린더를 사용하며 그 안에서 죄책감이나 자책 없이 당당하게 일정을 변경하기도 하고, 흘려보낸 시간을 계획하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내 시간을 내 손 위에 올려두고 통제하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정을 조정하면서 해야 할 일의 블록을 옮긴다. 30분 늦게 일어난 날은 아침 리추얼 블록을 30분 뒤로 옮긴다. 대신 무엇을 삭제하거나 축소할지 다시 계획한다. 급한 업무로 야근한 날은 밑미 리추얼 블록을 1시간에서 30분으로 축소한다. 이렇게 구글 캘린더를 수시로 조정하는 일은 내 시간을 시각적으로 물리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시간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심지어 물리학자들은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정신 속에만 존재한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형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으로 지구의 지배종이 되었다.



내 시간은 내 손아귀 위에 있다는 상상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애초에 [경계 설정]으로 만들어졌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경계로 하루라는 시간이 생겼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움직임을 경계로 1년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하루를 24개의 블록으로 나누어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은 시간을 창조했다. 애초에 시간은 경계로부터 탄생했는데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시간은 경계 안에서 자유롭다. 시간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내가 시간의 경계를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침체와 혼돈의 시기에 내맡기는 법


요즘 안 힘든 회사가 있을까? 이 시기는 [내맡김 실전 훈련] 같다. 직선의 길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길 위를 걷는 훈련.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노는 훈련. 운이 좋게도 기본기 훈련을 아주 잔잔하고 얕은 바다에서 할 수 있었다. 그래, 실전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서 해야 제맛이지.



나는 더 이상 파도가 잔잔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잔잔한 바다는 언 바다뿐이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 위를 걷는 것보다는 쉼 없이 넘실대는 파도를 타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파도는 원래 넘실댄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쿨하지 않다."라고 인정해 버리는 사람이 쿨해 보이는 것처럼 "삶의 파도는 원래 출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비로소 파도가 잔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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