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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Apr 19. 2024

우리가 같이 나이 든다는 게


우리가 같이 나이 든다는 게


오늘은 8번째 결혼기념일. 5시에 사무실에서 나와 아직 쨍쨍한 햇살 사이로 씩씩하게 퇴근했다. 약수역 와인바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와인과 위스키 마시면서 즐거운 대화를 했다. 제임슨 하이볼 너무 맛있었다.



내가 25살, 남편이 30살에 처음 만나 함께 한 지 이제 10년. 시간이 쌓일수록 [우리는 한 팀]이라는 끈끈함이 강하게 생긴다. 열정적인 사랑이나 가족 간의 애정, 인류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소속감이 우리 사이에 있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 30년보다 나를 만난 10년의 시간이 더 밀도 있고 가치 있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돈을 벌면서 난생처음 해본 것들을 대부분 남편과 했다. 호스텔이 아닌 비싼 숙소에 묵어보는 경험도, 살 집을 알아보는 경험도, 해외에서 렌터카를 빌려보는 것, 이천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본 것, 스노클링을 하며 물고기를 만난 것.



좋은 것을 내 힘으로 해보는 경험도 처음이었지만 타인에게 차마 보이고 싶지 않은 지질한 모습을 서로 봐주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각자의 그런 모습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 고유함을 온전히 인정해 주는 경험. “내가 어디에서 누구한테 이렇게 순수하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서운한 마음이 들 때에도 오래가지 않는다.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것은 첫 회사를 무작정 그만두고 방황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평생 꿈을 꾸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당장 몇 달 월급은 끊겼지만 꿈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막하고 두렵고 불안했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너는 계속 꿈을 꾸는 사람으로 살아. 너의 꿈을 지켜주는 게 내 꿈이야. “ 요즘 시대에 애 없는 외벌이라도 너라면 할 수 있겠다는 말을 드라마 [눈물의 여왕] 백현우 말고 또 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해야지, 결혼.



현실 감각 없이 꿈 타령을 하던 나는 결국 결혼서약서도 꿈으로 시작했다. ”첫째, 평생 꿈을 잃지 않겠습니다. “ 지금 생각하면 이건 결혼서약서가 아니라 일방적인 결혼조건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결혼서약서대로 8년 내내 꿈을 꾸는 어른으로 살고 있으니 일관적이긴 하다.



어느덧 남편은 사십 대, 나는 삼십 대 중반이 훌쩍 넘었다. 흰머리가 꽤 무성해진 우리가 사회에서 당당히 제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성장한 모습이 자주 울컥할 만큼 대견하다.





부부 사이, 생색내며 삽시다


종종 집에 돌아와서 가지런히 개어진 빨래가 바닥에 열 맞춰 정리된 장면을 본다. 아마 남편이 빨래를 개다가 미처 서랍에 넣지 못하고 저녁 준비를 하러 간 거겠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 남편을 향해 "빨래 돌리고 개 줘서 고마워!!" 외치고 빨래를 각각의 서랍에 넣는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과정이 반복되니 의아해졌다. 응? 왜 매번 빨래를 개어서 바닥에 가지런히 놓고 여기서 작업을 끝내는 거지, 누구 보란 듯이?



아...! 누구 보란 듯이?!!

이거였다. 



이럴 때 남편의 놀라운 사회생활 스킬을 발견한다. 나는 늘 집이 깨끗한 상태인 게 좋아서 빨래를 하면 바로바로 옷장에 넣고 음식을 하면 착착 정리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는데 남편은 내가 와서 볼 수 있게 잘 보이는 곳에 펼쳐둔다. 



묵묵히 소리 없이 남 모르게 하면 정말 아무도 모른다. 이왕 일한 거 칭찬도 좀 받고, 감사인사도 듣고 해야 할 맛이 나는 거지. 남편에게서 자연스럽게 티 내고 칭찬을 유도하고 생색내는 스킬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즘 내가 잘 배워서 써먹는 건 최대한 중간중간 현황 공유를 하는 거다. "와! 청소기 돌렸더니 정말 집이 깨끗해졌네?"라고 크게 말한다거나 "와! 나랑 사니까 언제나 집이 반짝반짝하지 않아? 정말 복 받았다!"라고 생색내는 것..ㅋㅋ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하루를 똑같이 즐겁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지겹다면

똑같은 일을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을 매일 다른 관점에서 다른 마음으로 다른 눈으로 해야 똑같은 일이 다른 일로 진화한다.

그것을 알고부터는 반복이 좋아졌다. 



매일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요가를 좋아한다. 똑같은 메뉴로 밥 먹는 것도 좋다. 



매일 똑같은 사람(=남편)과 우리만 아는 똑같은 농담으로 낄낄 대는 것도 좋다. 똑같은 집에서 일어나 똑같은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똑같은 회사에서 똑같은 일을 하다가 똑같은 저녁을 먹고 똑같은 저녁 루틴을 반복하고 잠에 든다.



그 반복 안에서 늘 새롭게 재미있고 의미 있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게 내가 사랑하는 삶의 마법이다.



오늘은 늦은 시간 요가 수업을 듣고 돌아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윗집에 사는 중년의 여성분과 마주쳤다. 10시가 다 되어 퇴근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고 계셨다. 갑자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해사한 미소로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굳어있던 그분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졌다.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미소를 주고받았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 끝에 이런 미소를 받을 수 있어서 참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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