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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Mar 17. 2024

고통의 공동체성

 hermit의 부활을 기도하며

나는 부활절이 되면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는다. 부활을 읽을 때마다 우리 사회는 특히 가진 자들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갖지 못한 이들은 얼마나 처절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뼛속까지 사유하며 나의 안일했던 삶을 반성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을 펼쳐 들었다.



<신책 중: 돌틈 사이로 피어난 꽃이 너무 귀하게 여겨졌다>


몇십만의 인간이 좁다란 곳에 모여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며 그 땅을 보기 흉하게 만들려고 아무리 기를 쓰고 파헤쳐도, 아무것도 돋아나지 못하게 땅바닥에다 아무리 돌을 깔아도, 그 틈바구니로 싹터 오르는 풀들을 아무리 뽑아버려도, 석탄이나 석유로 아무리 그을려도, 또 아무리 나무를 자르고 짐승과 새들을 모조리 쫓아버려도 봄은 정녕 봄이었다. 도회지 안에서도. 햇볕은 따사롭고 풀은 소생하여 사람들이 뜯어버리지 않은 곳이면 어디든, 잔디밭이나 산책로뿐만 아니라 포석 틈새에서도 싹터 올라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자작나무며 미루나무며 벚나무 따위에도 끈적끈적하고 향기로운 새 잎이 피어나고, 보리수 새싹은 껍질을 터뜨리고 볼록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까치와 참새와 비둘기들은 봄철답게 기쁜 듯이 벌써 둥지 틀기에 바쁘고, 햇볕에 따스해진 바람벽에서는 파리가 윙윙거렸다. 초목도, 새도, 벌레도, 아이들도 모두 즐겁고 흥겨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자란 어른들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괴롭히며 서로 남을 속이고 괴롭히기를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봄날의 아침도 아니고, 온갖 생물의 행복을 위해 신이 마련해 준 세계의 아름다움, 곧 평화와 화목과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아름다움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서로가 남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 자신이 궁리해 낸 일들만이 신성하고 중요했다. - <부활 1>, 톨스토이 -




<산책중: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음이여>


부활을 읽으며 이제 세상에 없는  절친설교 한편을 펼쳐 읽는다. 목사도 아닌 그가 생전에 남겼던 설교오늘을 살아가는 내게 '이웃의 가난과 슬픔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주제에 대한 답을 요구해 온다.




고통의 공동체성 by hermit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일생일대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앞두고 계십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예수님께서 가장 아끼시던 제자들에게 기도하러 가시는 가운데 동행하기를 요구하시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은 전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몫이며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한들 그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에도 잘 나타나는데,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심으로써 그 고난이 예수님 스스로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습니다.


혹은 당시 제자들 가운데에는 급진 정치운동에 가담했던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의 실력 행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로마의 군인들로부터 보호하거나 맞서 싸우기를 원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병사의 귀를 단번에 자를 정도로칼 솜씨가 뛰어났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검실력에 도움받지 않으시고 다친 병사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신 것일까요? 왜 그들에게 동행하기를 요구하시고 깨어있으라 하신 걸까요?


TED는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의 약자로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콘퍼런스입니다. 각계의 전문가가 20~30분 정도로 자유주제로 발제를 합니다. 그 가운데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박사의 발표내용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마음이라는 다큐에서도 일부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시각적으로 누군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보는 경우, 우리의 뇌는 각자의 신체가 그 행위를 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와 동일한 뇌의 특정 부분이 활성화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뇌는 시각적 경험과 육체적 경험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결국 감각적 경험만으로도 육체적 경험과 동일하게 인식하고 저장 처리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그런 식으로 배우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고난 받는 것을 보고 그가 고난을 이겨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 역시 그와 같은 경험을 동일하게 체험하고 이겨낸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동일한 것을 보고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동일한 뇌의 연쇄 반응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를 매개로 무의식적으로 의사소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그 누구도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감정의 영역에서는 사실일지언정 뇌의 실제 반응의 측면에서는 거짓입니다. 이것은 무슨 신비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히 물적이며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라마찬드란 교수는 기술적 토대가 뒷받침된다면 이러한 뇌의 속성을 통하여 인간은 동일한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마치 텔레파시처럼 상호무의식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며, 인류는 의사소통과 정보축적의 효율을 위해 그런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진화의 과정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그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통해 공감하고 배우고 성장하도록 창조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깨어 있으라는 요구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극한의 고통과 고난을 어떤 방식으로 겪으며 견디며 감내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이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도 고통스러운 마지막 강의를 준비하시고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배움에 임하기를 요청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실 고난의 모습을 통해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처럼 스스로 십자가를 자처하는 경지까지 나아가기를 기대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 이후 불어닥친 교회에 대한 시련과 핍박 앞에서 모두 당당히 각자의 고난을 감당해 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한 눈먼 자의 고통의 연원을 묻는 제자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고대답하셨습니다.


이 본문은 어찌 보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뜻한 바를 이루시려 인간의 고통을 도구화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곧 제자들의 시각입니다. 제자들은 그 눈먼 자의 고난을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국한시킵니다. 그래서 눈이 보이지 않는 불구는 제자들에게는 타자의 문제이며 당사자가 극복해야 할 문제일 뿐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질문은 그래서 고통받는 자에 대한관심이라기보다는 그저 흥미로운 논리적 호기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좀 달리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눈먼 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언급하심으로써 그가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차원으로 확장시킵니다. 개인의 고통을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결시킵니다. 실로암연못가의 한 눈먼 자는 그저 날 때부터 눈이 멀어 불행한 나날을 이어가는 개인이었을 뿐입니다. 적어도 제자들은 그 고통받는 대상을 타자화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언급을 통하여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전체의 구성원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하시며 그 뜻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는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고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됨으로써 인류 전체에게 의미 있는 사건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하여 2천 년 전 한 눈먼 자의 고통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사건으로 확장됩니다. 어쩌면 개인이 당하는 고통은 고통당하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고 배우고 깨달아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또 다른 인격들과 그런 인격들의 집합인 공동체 전체의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공동체 내의 한 개인의 고통스러운 일상은 그저 신산스러운 개인의 일상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고통스러운 일상을 지켜보며 배우고 함께 시간을 견뎌내야 할 구성원 전체의 공동의 사건이며 공동체 전체의 의미로 재해석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통가운데서 그저 포기하거나 무너질 수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고통 가운데서 오직 스스로 침잠하여 각자의 동굴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한국 사회는 한 젊은 작가의 죽음으로 크게 놀라웠고 게다가 그 죽임이 질병이 한 원인이 되었지만 사실상 가난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에 크게 충격받았습니다. 그가 남겼다는 메모를 보고 저는 약간 난감했습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기세 꼭 정산해 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메모지 한 장을 잘라 쓴 것 같은 쪽지는 수신인의 도움이 전달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을 정도로 시간 차를 두고 간접적으로 전해졌습니다. 정말 그는 이런 식의 소극적인 요청밖에 할 수 없었을까요? 그저 메모지 한 장 남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문을 두드리고 무언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런 의문 속에 문득 깨달은 것은 그런 소극적인 도움의 요청조차 하지 않는 제 자신의 태도였습니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절실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에 동참하여 돌보아 주기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포함하여 사회생활은 그럴듯한 쇼케이스 진열대 같습니다. 멋지고 그럴듯한 모습만을 공개하고 적당히 여유를 가장합니다. 하지만 고통을 드러내고 나누고 함께 배우며 서로의 삶을 격려하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만이라도 당당히 나의 고통과 내 삶의 최종적 목격자가 되어 달라고 서로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이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로 남아달라고 서로에게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 역시 너의 고통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고 끝까지 지켜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이 곤란한 삶을 살아내는 데에 조그만 깨달음으라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서 빼앗지 말아 달라고 서로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눈을 뜨고 똑똑히 지켜보라 하신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나를 지켜봐 달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삶은 한 번의 노력으로 달성하거나 한방에 이기는 멋진 스포츠이거나 아름답고 명쾌한 논리의 축적 같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지지부진하고 지리멸렬한 진흙탕 싸움 같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고 그 어려움이 끝난다고 한들 좀 더 편하고 안락한 그 어느 시기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불편하기 짝이 없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이래 살아도 되는 건지 언제까지 이렇게 구질구질해야 하는 건지 도대체 끝없는 질척거리는 흙탕길을 걷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시간들을 견뎌야 하는 걸까요? 왜 이런 무의미한 것만 같은 삶을 지속해야 할까요?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Abba의 노래 'I have a dream'을 소개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살면서 너무 증오스러운 사람을 만날 것이다. 당장 칼로 그를 찌르고 싶을 것이다. 너무 배가 고플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훔치거나 빵집이나 가게에 뛰어들어 물건을 훔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루고픈 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조금 다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장 삶을 포기하거나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고통 때문에 마냥 포기하고 싶어질 때 대충 그냥 그냥 자포자기하고 싶을 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 때문일 것입니다. 공동체중의 누구 하나라도 나의 포기를 보고 행여 자포자기가 삶의 한 방식일 수 있음을 배우거나, 혹은 누군가의 포기가 또 다른 누군가의 절망을 낳을 수 있으며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동체를 허락하신 것은 그렇게 모두가 모두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이유가 되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며, 나의

고통을 타인의 시선과 관심으로부터 고립시키지 말아야 할 이유일 것입니다.


고통을 지켜보며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이 타자에 대한 배려이거나 일시적 구제이거나 비 상시적인 마음씀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시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연속이라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건강하게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의 말이라고 합니다. 건강하게 스스로를 가꾼 자아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사랑의 최고치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보다 조금 더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두 다 모자라고, 상처가 있고, 모가 나있고, 힘들고, 외롭고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그런 각자가 모여서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가 되어 함께 성장해 가기를 바라시며 그런 계획 속에서 공동체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견뎌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도하며 서로 격려하며 서로가 서로를 각자의 시선으로부터 배제시키지 않고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뎌내다 보면 또 언젠가는 마주 보며 한동안 웃을 수 있는 순간들이 오지도 않을까 생각합니다.


2011년 2월 20일 주일예배 설교 by hermit



모두 다 모자라고, 상처가 있고, 모가 나있고, 힘들고, 외롭고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그런 각자가 모여서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가 되어 함께 성장해 가기를 바라고 그런 계획 속에서 공동체를 주신 것이 신의 뜻일까? 만약 신이 없다 해도 나는 그것이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라 믿는다.


<산책중: 청렴한 선비의 상징 매화>

완연한 봄날이다. 좁다란 도심에서 매일 밀치락달치락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오늘 만큼은 따뜻한 봄의 기운을 만끽하리라. 우리가 선 자리가 아무리 좁더라도, 우리에게 먹고살만한 땅이 한 평도 없더라도, 우리 삶의 터전이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을 만큼 척박하고 메말라 있을 지라도, 거기에 불을 지르고, 남아 있는 모든 것을 자르고 뽑아버릴지라도  봄은 정녕 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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