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레테 클래식 Mar 12. 2024

나는 왜 쓰는가?

연결하는 책방 아쳅토_조지오웰의 1984

나는 왜 쓰는가?


1. 조지오웰의 1984 관련 팟캐스트


https://podbbang.page.link/Hq9f9e85ZezuBVGk8


지난 주말 조지오웰의 1984를 소개하는 팟캐스트를 녹음했다. 1984와 현재 여론의 중심에 있는 영화 파묘와 건국전쟁에 대한 비교와 서로의 의견을 정리했다. 콘텐츠를 준비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수많은 질문들을 해봤다. 나는 지금 왜 팟캐스트를 하고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 이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가?


과거사를 두고 여당과 야당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는 형국을 바라보다가 착잡하고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고, 우리는 저들의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그러던 중 내가 평소 존경하던 민족 사상가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제 발이 5천 년이 아파도 아프단 소리 못하고 슬퍼도 목을 놓아 울어도 못 본 이 민중을 이제 겨우 해방되려던 민중을 또다시 입에 굴레를 씌우지 마라. 정신에 이상이 생겼으면 지랄이라도 마대로 하게 해야 할 것이다. 4.19 이후 처음으로 열었던 입을 또 막아?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을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해도 참이 아니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16은 꽃 한번 핀 것이다. 잎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5.16을 어떻게 볼까, 사상계, 함석헌>



함석헌 선생님은 박정희 군부 정권 10돌이 되던 해에 '썩어지는 씨알이라야 산다'라는 사설을 쓰신 적이 있다. 선생님은 그 글에서 '4.19 정신''썩어지는 씨알'이라 표현하셨다. 5.16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이기적 주장이고, 내가 혼자 권력을 쥐고 놓지 않겠다는 과욕이라는 것이다. 4.19는 그 반대라 하셨다. ''가 아니라 '우리'이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자는 것'이라 하셨다.


나는 팟캐스트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구한말 일제 통치 아래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구국의 결단으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무수한 청년 애국자들의 사연이 영화의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피 흘린 수백만의 씨알(백성)들이 생각나 밤잠을 설쳤다.


2.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나는 꽤 오랜동안 독서를 하며 살아왔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풀리지 않는 무수한 의문의 답을 책 속에서 찾곤 했었다. 학창 시절 도서관은 내 사유의 놀이터와 같았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백만 권의 책은 나의 생각이 상상이 되게 했고 또 그 상상을 현실로 이어주는 소중한 경험을 선물해 줬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읽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것 같다.


얼마 전에도 썼지만 남의 말만 듣고, 남의 말만 쫓아다니며, 남의 글만 읽다가는 평생 복종적이고 굴종적으로 사는 것밖에 안 된다. 나의 표현이 부족한 것은 내가 많이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를 표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독서를 하다 보니 어떤 생각이 나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쓴 글을 읽은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요즘 팟캐스트를 하면서 나은님의 살아 있는 눈빛과 야생의 기운을 느낀다. 원초적인 힘찬 눈빛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되돌아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본다. 그것은 너의 생각인가 혹 누군가의 생각을 빌려온 것은 아닌가?


조지 오웰이 자신의 글 왜 쓰는가에서 했던 말이 내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의 말처럼 ‘내가 맥없는 글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타인의 현란한 말을 빌려,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에게 잘 보이려 할 때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냉철 하면서도 빛나는 야생의 눈빛을 잃은 그때 나는 흐리멍텅하고 의미 없는 글들 속에서 좌절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내가 태어날 때 짐승으로 태어난 것처럼 죽을 때도 야수의 눈빛과 심장을 가진 인간이 되고 싶다. 말이 많으면 쉽게 궁해진다. 개념화된 지식이 겹겹이 쌓이고 무거워질수록 쉽게 한계에 부딪힌다.


최근 괴테의 저서를 천천히 묵상하듯 읽고 있다. 쓰기에 대한 괴테의 진심을 담은 문장이 있다.



“나는 겪지 않은 것, 나를 애타게 하거나 마음 쓰게 하지 않은 것은 작품으로 쓰지 않으며 표현하지도 않는다. 나는 사랑할 때만 사랑의 시를 썼다.”


<파우스트, 괴테(전영애 역)>



괴테의 파우스트는 60년에 걸쳐 쓰인 인생의 역작이다. 그는 평생토록 꾸준히 새벽 다섯 시 반에서 한 시까지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어떤 위기도 자긍심으로 극복했는데, 그것은 단지 극복에서 멈추지 않고 삶의 확대하고 상승하는 의지로 이어졌다.


우리는 늘 삶의 굴곡 속에서 흔들리고 좌절한다. 그리고 달콤한 행복이라는 초콜릿을 탐하며 사라져 간다. 그러나 괴테는 우리가 고통 속에서 새로워지고, 탄식이 거듭되는 미로처럼 얽힌 인생 속에서 선한 것들을 찾게 된다고 역설했다. 이상적인 개념의 틀을 깨고, 고통 속에서 더욱 새로워지고, 미로와 같은 인생 속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야 말로 그가 경험한 참된 인생의 묘미였던 것이다.


3. 무엇을 쓸 것인가?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은 이승만 대통령 무덤에서 끌어올린 사건 즉 ‘파묘’ 한 것이라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이야말로 <1984>의 책 속에서 진리부가 하는 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건국전쟁을 보면서 나는 “모든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내용을 긁어 버리고 다시 정확히 기록하는 저 양피지 기록물이나 다름없었다.”라는 1984의 문구가 기억났다. 이렇게 질문하고 싶었다. 독재정치의 과오가 언제 제대로 평가된 적이 있었나? 사법적 책임, 도의적 사과 없이 공적만 부각하는 것이야말로 문제가 없는 것인가?


1993년도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추진한 운동이 ‘역사바로 세우기였다. 그것은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 김대통령의 말로 상징되는 전방위적 역사재조명 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대의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에 대해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바로 세웠던 역사를 또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은 정말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논쟁이 어디로 흘러갈지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될 것이다. 이번 <1984> 팟캐스트 마지막에 내가 특히 강조한 얘기가 있다. 그것은 건국전쟁에 등장한 패널이  아래의 말이다.




희생자만 강조하는데 희생자 중심으로 문제를 보는 것은 가장 선동선동이 쉽기 때문입니다


<건국전쟁 중>



나는 건국전쟁의 이야기 중 이 말이 가장 무서웠다. 희생자를 강조하지 않고, 희생자 중심으로 문제를 보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가? 국가와 최고권력자를 위해 국민들은 희생을 강요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최근에 발생한 해병대 상병의 죽음, 이태원 사건,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국민들의 안전을 소홀히 하고 희생자를 외면하는 국가의 민낯을 목격해 왔다. 나는 그간의 많은 일들이 이런 생각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감출 수가 없다.


대한민국을 수립한 주체는 누구인가? 한 명의 빅브라더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국민들인가? 우리 헌법이 명시하듯 대한민국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국민 개개인의 주권이 인정되는 나라이지 한 명의 빅브라더가 통치하는 전제국가가 아니다.

  

역사는 결국 개개인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누가 맞고 틀리고를 두고 지루한 싸움을 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전으로 보인다. <1984>의 내용처럼 체계에 순응하고 체계를 보존하는 것이 목적인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체계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보다는 나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피 흘려 조국을 지킨 순국선열들과 백성들의 무수한 비극 위에 세워졌다. 나는 빅브라더가 주인공인 나라가 아니라, 이 순고한 희생자들과 평범한 국민들이 주인공인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명한 것이라고 전제되는 것들에 균열을 내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 국가, 자본, 가족, 종교, 과학 등 이미 우리에게 명증 하다고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싶다. 나아가 체제와 권력을 옹호하는 수직적 질서만을 옹호하는 입장 경종을 울리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 내가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님이 걸어가셨던 길, 그리고 무수한 나의 은사들이 가르쳐 준 길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은 자들의 편이 되라는 것이었다. 나는 체제와 권력의 엄혹한 그늘 아래서 죽어 간 무수한 원혼들을 역사의 무대 앞에 끌어올리고 위로하는 일을 하라고 배웠다.


내가 고전에 진심인 이유와 팟캐스로트 <고전으로 읽는 오늘>에 열심인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나는 인문학 읽기와 나의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이 험난한 인생길에서 자신의 삶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바꿔줄 멘토를 찾게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자신만의 문학과 사상과 시와 음악을 찾아 뜨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향유하도록 돕고 싶다. 내가 읽고 쓰고 말하는 가운데 우리 가운데 충만한 환대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연결될 때 우리는 나와 타인과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회도 역사도 그만큼 성숙할 것이기 때문이다.



Scrivere, Ergo sum!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