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쳐진 새
뒤쳐진 새(라이너 쿤체)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가로지를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쳐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나는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쳐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탠다
최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 2주 글도 쓰지 못하고 지냈다. 여러 심란함에 모든 일을 다 내려놓기로 했다. 그야말로 '뒤쳐진 새' 신세가 된 샘이다.
다행히도 40대 후반에 마음으로 모시는 스승님이 생겼다. 큰 마음먹고 편지 몇 장 쓰고 고이 접어 직접 인사드리러 나섰다. 그분을 만나자 마자 크게 인사하고 지난 삶의 여정을 고해하듯 말씀드렸다. 바쁘신 중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허락해 주셨다. 다시 태어난다면 죽도록 공부해서 선생님의 청년 학도가 되고 싶다고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하시며 두 눈에 눈물을 보이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시 태어날 필요 없어요.
자기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에요. 공부는 그냥 자기가 하는 거예요. 하면 됩니다. 할 수 있구요.
내가 그리스 고전과 단테, 괴테, 러시아 문인들을 작품을 열심히 읽게 된 것이 모두 니체 때문임을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내가 니체의 책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문인들이 번역해야 하는 게 옳다고 말씀드렸다. 단테도 괴테도 운문을 산문처럼 번역한 책들이 다수이기에 이해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스승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몇 년에 걸쳐 완역하셨다고 하셨다. 니체의 주저에 해당하는 책을 번역하셨다는 것이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내게 시간이 되면 꼭 감수를 해 달라고 하셨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스승님의 귀한 번역을 읽어내는 것에 급급할 내가 감수라니...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스승님의 번역을 누구보다 열심히 읽어드리고 싶다. 피로 쓴 글이니 피와 땀으로 읽어드려야 한다. 철학서나 사상서가 아닌 시와 문학으로서의 번역은 어떤 것일까? 생각만 해도 설렌다.
작년에 짜투를 번역하시기 위해 스위스의 실스 마리아를 몇 번이나 다녀오셨다고 한다. 스승님께 감히 말씀드렸다. 다음에 가시는 일정이 있으면 짐꾼으로 나를 꼭 불러 달라고. 니체가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고 불과 몇 년 안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해 미래 철학의 서곡이라 칭송 받은 많은 의미 있는 책들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곳의 높이와 공기와 경치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오고 싶었다.
스승님의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연로하신 분들을 만나는 기회를 놓치거나 미루면 안 됩니다. 더 늦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뵙고 그 지혜를 조금이나마 더 배우고 싶고, 또 그런 어른들이 세상에 계시다는 게 그저 너무 고마워서 저절로 발길이 옮겨집니다.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전영애, 문학동네>
삶에서 크게 뒤쳐진 나는, 틈만 나면 스승님을 찾아뵐 것이다. 그 지혜와 깊이와 넓이를 그리고 문을 열고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는 창조의 힘을 배우고 싶다.
책을 들여다보니 10년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보신다. 나는 20년 전에 커피 산지를 누빌 꿈을 꾸고 꿈처럼 살아 본 적이 있다. 10년 전에는 기업가정신을 가진 회사의 경영자였다. 40대가 넘어서 되어서는 서양과 동양의 인문학을 아우르는 가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이제 그 중간쯤 온 것 같다. 스승님을 봬도 정말 열심히 하고 싶은 간절함이 생긴다.
스승님은 스승으로 모신 라이너 쿤체 시인을 쉰다섯 살에 처음 만났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께 자주 큰 힘은 얻으며 학문에 정진해 나가셨다. 위의 시도 라이너 쿤체께서 스승님을 위로하며 보내주신 시이다. 나는 스승님에 비하면 더 많은 기회가 남았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이분들처럼 꿈꾸고 사랑하며 해처럼 맑게 살 것이다. 비록 방황하고 깨지고 자빠지더라도 10년 후를 향해가는 내 행보는 반듯할 것이고, 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길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남들과 발맞추지 못한 약하고 느린 내게 힘을 보태주실 사려 깊은 스승님들이 계시기에 꼭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