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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Apr 09. 2024

젊은 괴테의 숲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여백의 봄


1.   괴테의 숲에서


지난주 일요일 아침 일찍 짐을 챙겨 여백서원으로 향했다. 괴테의 집 뒤 산에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숲길이 있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종일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을 예정이다.


나는 최근 이 책을 독일어 원서로 읽기 시작했다. 독일어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게 전부이다. 이제 와서 독일어로 읽는 이유는 내용을 엄밀하게 이해하고 싶은 욕심에서이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번역을 거의 완성하셨다 한다. 언젠가 그 번역을 제일 먼저 읽어 드리고 싶다. 부족하지만 읽다 보면 깨달을 날이 오겠지하고 위안을 삼아 본다. 지금은 괴테 전집 번역으로 바쁘셔서 잠시 손을 놓으셨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다시 시작하실 것이다. 그전에 내가 먼저 부지런히 읽어 놓고 싶었다.


<괴테의 홀로서기: 정원집>


올라오는 길에 보니 정원집 기초 공사를 하고 있다. 젊은 괴테의 집을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질 집이다. 이 집은 괴테가 26살 바이마르에 와서 처음 6년 홀로서기를 하면서 살았던 집이다. 홀로서기를 하는 젊은 괴테의 삶을 그가 살았던 집을 직접 복원해 알리고 싶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괴테 마을을 꿈꾸고 계신다. 이 마을은 단순히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괴테의 삶을 둘러보고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 혹 아직 마음이 젊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라 하신다. 괴테마을에는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괴테의 생가들, 도서관, 젊은 괴테들이 책 읽고 사유할 수 있는 그런 공간들이 하나씩 만들어질 예정이다. 독일 괴테 학회와 많은 학자들이 선생님의 놀라운 계획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것은 괴테의 고향인 독일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한 전무후무한 계획이다.


괴테의 숲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초인을 위해 집을 짓고,


초인에게

대지와 동물과 식물을 마련해 주기 위해

일하고 연구하는 자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몰락을 바라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4, 니체>



이 책을 쓰고 인류에게 전해질 미래 철학의 서곡을 완성했다며 기뻐했다던 니체는 교수님 같은 후학이 등장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니체가 여백서원을 알았다면... 몇 날 며칠을 지내며 위대한 작품들을 써내려 갔을 거라는 상상을 해봤다. 선생님은 세파에 부딪히며 힘들어할 청년 괴테들을 위해 집을 짓고 계신다. 그들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여백 서원과 괴테 마을을 짓고 계신다. 그리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일하고 연구하고 계신다. 니체는 그런 사람을 초인이라 말했다. 초인은 몰락하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양의 꿀을 모은 벌처럼 자신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밤낮으로 번역하고 연구하며 낮은 자리로 임하고 있다. 전 재산을 환원하며 온몸으로 대지에 깃든 인간들을 향해 몰락하고 계신다.


2.   시정에서


정오쯤 되었을까? 저 멀리 정원집 앞에 선생님이 계셨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선생님께 인사드렸다. 숲에서 책 읽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오후에 여백서원에 들러 차 한잔 하자고 하신다. 여백 후원이 너무 아름답다시며.


선생님은 오늘 오후에 시정에서 번역하실 계획이라며 그곳에서 함께 책 읽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주말에 선생님 연구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책 읽다 가려했던 내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그 길로 짐을 챙겨 여백서원에서 제일 먼저 생긴 시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봄날의 여백서원은 울긋불긋 꽃 대궐이 따로 없다. 오늘 같은 날은 서원을 좀 열어서 많은 사람들이 정취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하셨지만, 괴테 전집 번역에 매진해야 하므로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시정에 앉아 내 캠핑 카페 박스를 펼쳤다. 버너, 드립 주전자, 그라인더 등 있을 건 다 있는 나만의 카페를 보시며 박수를 쳐 주신다. 그리고 봄날에 어울리는 향긋한 커피 한잔을 내려 드렸다. 다른 건 자신 없지만 오늘 마시는 커피는 봄날의 여백서원의 향기와 닮았다며 자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신 없는 게 어디 있어요?” 커피를 한 모금하시고 세상에 이런 호강이 있냐며 좋아하셨다.


시정을 처음 지을 때 몇 개월이면 끝난다고 했는데 업자가 선생님이 돈이 없는 걸 알고 차일 피을 미루다가 1년 7개월이 다되어서야 완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옆에 있는 연못도 애초에 연못이 아니었단다. 연못의 흙을 떠서 건물의 기초를 다지는 데 쓰고 구덩이를 6개 정도 파서 장돌을 넣고 네모난 돌을 하나 넣은 게 시정의 기초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긴 잎을 하나 꺾어 냄새 맡아보라고 건데 주셨다. 창포 창포였다. 시정 옆 연못에는 창포와 노란 붓꽃을 심으셨다고 했다. 창포가 구출 2호라고. 이거 한 포기 한 포기씩 갖다 심을 때 너무 담담했는데, 혼자서 이만큼 되니까 너무 감격스럽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창포에 얽힌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의 제자 중 골수암으로 수술을 대여섯 번을 한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어느 날 커다란 화분을 들고 연구실에 찾아온 것이다. 선생님이 막 야단을 치셨단다.


첫째 ‘네가 지금 이거 들고 나니 처지냐?’  

둘째 ‘벚꽃은 화단에 화분에 심는 게 아니다’


그래서 학교 연못가의 한 귀퉁이에 내다 심었는데 거기서 왕성하게 번졌다고 하셨다. 그중 한 포기를 가지고 와서 여기 심었는데 10년이 지난 후 그것이 아름드리 벚꽃 나무가 되었다 하셨다. 당시 아파서 수술을 많이 했던 그 학생은 이제 돈도 못 버는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라시며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다산초당 이야기를 하신다. 시정에서 전망대로 올라가는 구조가 다산초당에서 산 등성이로 올라가는 구조와 너무 닮았다고. 뒷산을 올라가는 다산 선생이 친구 삼았다던 조희선사가 사시는 절이 있어 자주 넘나 들었다 하신다. 그런데 선생님도 더 언덕을 넘어가면 친구가 계신다고 그래서 저 산으로 자주 넘어 다니셨다고 했다. 우울할 때, 음식 있을 때, 보고 싶을 때 그렇게 친구를 만나러 산을 넘어 다니신단다. 커피 한잔을 나누면서 정말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니 봄날의 햇살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3.   고아들의 정원에서


<손가락 만하던 벚꽃이 아름드리나무가 되다>


시정의 위로 뚝이 무너질 까봐 명자나무를 심으신 일, 청포, 붓꽃, 소나무, 매화 등 어딘가 힘겹게 자라고 있었던 나무 고아들을 여백서원 뒤뜰에 옮겨 심으신 일들을 말씀해 주셨다. 갈 곳 없이 힘들게 자라던 그 나무들을 하나하나씩 구출했는데 이렇게 큰 정원을 이루었다며 좋아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힘들게 살아온 인생 여정, 나 때문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형에 대한 이야기, 학부 시절 내가 받았던 김밥할머니 장학금, 내가 보호종료 아동을 돕게 된 일 등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부탁드렸다.



"여백서원 정원에 제 자리도 하나 마련해 주세요!”

선생님은  이야기를 경청해 주시며 

얼마든지요셨다.



그리고 서는 갑자기 생각이 나셨다며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고 하셨다. 여백서원 담벼락이 산에 닿아 끝나는 지점에 소나무 가지들이 내 키만큼 쌓여있었다. 자원봉사들이 나무를 전지하고 여기에 쌓아 놓은 것인데 그 밑에 구출해 온 꽃이며 나무들이 있다고 저 나무 무더기를 30cm 정도만 옮기고 싶다고 하신다. 30cm 옮기는 것은 일도 아니겠다 싶어 당장 목장갑을 끼고 나무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이 일이 그냥 30cm만 옮기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질긴 소나무와 알 수 없는 가시나무들이 얽히고설켜서 위에서부터 나무를 하나하나 뽑아서 옮겨야만 했다.  


이제 마음을 다잡고 뒤쪽 언덕으로 올라가 나무 가지들을 하나씩 건져 냈다. 큰 나무 가지들은 왠 만큼 힘을 줘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나무들은 톱으로 잘라가며 뽑아냈다. 한 시간 정도 일을 했을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장갑을 꼈음에도 왼손 검지와 오른손 엄지에 가시도 찔려 손이 아팠다.


잠시 이 일을 하면서 20년 동안 이곳을 가꿔오신 선생님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갔다. 아까 시정을 가득 채운 꽃을 보며 아련해하시던 그 표정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선생님의 정원은 마냥 아름답기만 한 꽃 대궐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삶을 극복하는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고, 세계로부터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스스로의 응답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바로 서는 방법 중에 아주 중요한 게 주변을 둘러보는 일입니다. 전부 다 주변에 사람을 보지 않고 주변에 사람들이 가지 걸 봐요. 이거는 정말 원초적인 불행입니다. 자기는 혼자고 남은 불특정 다수인데 내가 남하고 경쟁해서 되겠어요? 백전백패죠.


또 다 가지려고 해도 절대로 다 가져지지는 않아요. 아, 더 가져도 좀 힘든 부분이 있겠구나 하고. 특히 아직 못 가진 사람 좀 봐주고. 내가 무슨 남을 돌아볼 여력이 있느냐 능력이 있느냐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언제나 능력이 있어요. 우리. 옆에 사람이 가진 것을 보고 불행한 이 시간에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여기서 어딘가 아픈 거 같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그 사람이 굉장히 힘을 얻고요. 그걸 통해서 사실 내가 도움을 받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 속에서 니체의 힘의 의지를 발견한다. 그렇다. 이분은 단순히 바른 길로만 가는 분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들에게 전해 줄 사랑이라는 불을 품은 프로메테우스인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사랑이 많은 초인 즉 ‘애(愛)버멘시’라 부르기로 했다.


이것은 그날 시정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가 서설인 1부 4편에 나오는 구절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 글귀가 너무 귀해 스스로 시를 써 이렇게 기념해 본다. 그 큰 사랑에 힘입어 나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읽고, 쓰고, 말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때까지 나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애(愛)버멘시


찾았네

위버멘시를 위해 집을 짓고


대지와 동물과 식물을

마련해 주기 위해

일하고 연구하는 자를


보았네

  

숲과 황량한 땅에서

오염되지 않은

바다를 꿈꾸는


해처럼 맑은

나의 애(愛) 버멘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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