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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Aug 25. 2024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내며

캠핑 사진(2022년 5월 5일)

수년 전 시한부 판정을 받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내던 친구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고교 동창인 그가 20대 초반에 투병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서 그를 만난 지 꼭 25년 만의 재회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하루 한 시간, 순간을 영원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1년 6개월을 한 주에 한번 그가 있는 요양병원을 찾아갔다. 그와 함께 책을 읽고, 탁구를 치고, 산책을 하고, 캠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었을 그 시간이 그에게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라 생각을 하니 그 순간순간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신장에 문제가 생겨 투석을 했다. 다행히 동생의 장기를 이식받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그는 5km, 10km, 15km 달리기를 하고 인천송도국제마라톤 하프코스를 완주 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고양시에서 주최하는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해 1.5km 수영 구간을 31분에 주파한 기록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망의 그늘 아래서 부활한 듯했던 그가 40대 중후반의 중년이 되어 또다시 거미줄에 걸린 신세가 되었다.


그는 요양병원에서 환자에게 분양한 4평 남짓의 땅에 인디언 천막처럼 생긴 텐트를 치고 캠핑을 즐기고 있었다. 우연히도 그가 휴양하고 있던 곳은 내가 젊은 시절 군생활 했던 부대 근처였다. 평소 캠핑할 기회가 없어 다소 어색했다. 하지만 군대 경험 탓이었을까? 나는 다시 군인이라도 된 듯 야산에서 장작을 모으고, 나무를 엮고, 은신처를 만들며 그 시간들을 즐겼다.


당시 그는 신우암 말기였고 항암 치료를 중단한 상태였다. 늘 통증을 달고 살았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정말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에게 가는 날은 질 좋은 커피 생두, 고급술(코냑, 와인, 위스키) 그리고 캠핑용 한 두 끼 음식을 챙겨갔다. 암환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자극적인 기호식품들이었다. 하지만 향긋한 생두를 직접 로스팅하고, 과실과 허브의 향미가 가득한 술들을 조금 나누며 함께 하는 캠핑이 그의 삶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위안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했다.


내 일생에서 그와 함께 보냈던 2년이 안 되는 그 시간처럼 소중한 추억은 없다. 삶의 근심과 불쾌한 일들은 일상에 남겨둔 채 우리는 고교시절 경험이 바탕이 된 공통의 추억을 회상하고 음미했다. 그리고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 간 것처럼 허물없는 친구가 되었고 의미심장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무엇보다 아픈 그가 환하게 웃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내게 큰 보람이었다.


그날이 되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이 일은 그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내 군생활의 추억이 남아있는 휴전선 가까운 파주에서 보내는 아침 한나절의 한가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청년 장교로 복무했던 그 산하를 이제 중년이 되어 다시 마주하는 느낌이 새롭고 좋았다. 해가 중천에 떠 오르기 전에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좋은 고기를 골라 매주 다른 방식으로 굽고 찌고 삶았다. 근사한 캠핑 한 끼에 약간의 코냑을 곁들이면 신들이 먹었다던 천상의 암브로시아와 넥타르가 부럽지 않았다. 그리고 근처 호수에 내가 짜라투스트라 바위라고 명명한 그곳을 거닐며 그와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논했다. 그 후 매주 호수 주변을 산책하고, 그 바위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숲을 거닐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고요를 즐겼다. 나는 그와 그렇게 가까워져 갔다.


어느 날 해외 출장 중인 나에게 그가 메시지를 보냈다. 고교 동창들이 자신을 찾아오기로 했는데 그날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출장 기간 동안 그의 소식이 궁금했었는데 친구들이 찾아온다니 더 반가웠다.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요양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무리한 일정 탓일까? 그의 병원 근처에서 20톤 화물 트럭이 뒤에서 내 차의 우측 후방을 추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경찰과 보험사와 한 시간 정도 사고를 수습하고 나는 급히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늦게 도착했지만 기분 좋게 음식과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모임이 끝나고 나는 사고 후유증이 생겨 2주간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그 친구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에 노심초사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바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그의 SNS에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 중 약하고 아픈 사람을 짓밟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짧게 얘기하면 그날 친구들과 옛날 얘기를 하던 중 자신의 옛 별명(무기력)을 얘기하며 모욕을 줬다는 말이었다. 그의 글이 설마 나를 향한 날카로운 창끝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20대에 한 번, 그리고 40대에 또 한번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다시 만난 기구한 그의 사연에 절망했지만, 함께 희망을 노래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게 상처받은 그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나는 절망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달 전 지인들을 통해 그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친한 친구들이 함께 병문안을 가자고 연락했으나 나는 차마 그들과 함께 나서지 못했다. 그를 방문하는 대신 전화로 그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다. 솔직한 나의 이야기 그리고 그간의 우리의 우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인연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거미줄은 잘 보이지 않기에 무서운 것이라 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많은 이들이 많은 거미줄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고. 직업에 대해, 학교 졸업장에 대해,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 등이 개인의 행동을 제한한다고 항변했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하면, 이런 저런 이유로 잘못 미끄려져 사회적 약자가 되어 버리면 행동이 위축되는 사회 속에서 개인들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신세가 되어 버렸다고 자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삶을 불행하게 하는 거미줄을 다 걷어버릴 수 없냐고 항변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가둬두고 싶지 않다고.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고 싶다고. 더 행복해지려면 우리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먼지 낀 거미줄을 걷어내야 한다고.


생의 마지막 절벽에 서 있던 친구, 그와 그저 좋은 시간을 보내려 했던 것은 나의 순진한 동화적 상상력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끝내 그의 외로움, 단절, 고통이라는 상자를 열어보지 못했다. 그의 고통을 덮고 웃고 떠들었던 그 시간들은 어쩌면 현실을 기만한 나만의 코미디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이제서야 그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말기암 환자였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혹시 나는 외로움의 끝에 서서 죽음과 사투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현실을 덮어두지 않고 그의 내면에 자리한 아픔을 들여다보았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은  수는 없었을지 몰라도, 그가 느꼈을 외로움과 고통을 조금은 덜어   있지 않았을까? 이제와서 그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지만......오늘은 한평생 유약했고 아팠으나 강철 같이 모진 생의 파도를 이겨낸 나의 친구를 기억해 본다. 이젠 고통 없는 세상에서 다시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길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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