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월드에서 찾은 나만의 별자리
민음사에서 한정판으로 재출간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발견했다. 책 커버가 매우 아름다웠다. 내가 처음 접한 하루키의 소설은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상실의 시대»였다. 디자인은 물론이거니와 제목도 완연히 다른 두 책은 사실 같은 책이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이 사연은 최근 뉴스룸에서 다시 언급됐다. 원작의 제목은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이었는데 우리나라에 그대로 출간됐을 당시에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고 상실의 시대로 바꾸니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우리에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더 익숙한 이유는 생각보다 심플했지만 조금은 슬프다.
하루키가 직접 제목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그는 노르웨이의 숲이 지나치게 딱 들어맞는 제목이었기에 오히려 이것만은 피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외엔 어떤 표현도 와닿지 않았고 (제목을 말하지 않은 채) 아내에게 어떤 제목이 좋을지 물어보았더니 “노르웨이의 숲이 좋지 않겠어요?”라는 대답을 듣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사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노르웨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아내가 이구동성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내뱉은 이유는 무엇일까? 주인공 와타나베는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한 보잉 747기 기내에 흐르고 있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곡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19살 때 만난 첫사랑 나오코가 이 노래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실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존 레넌이 작곡한 비틀스의 노래 제목이다.
존 레넌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어본다. 흥겨운 리듬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이 노래의 가사에 따르면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집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눈다. 다음 날 남자가 일어나 보니 그녀가 없어 썰렁한 벽난로에 홀로 불을 지피게 된다. 바로 그 방안에 노르웨이산 가구들이 있었다. 노르웨이가 아니라 노르웨이산 가구다. 하루키의 소설에 노르웨이의 숲이 없는 것처럼, 공교롭게도 존 레넌의 노르웨이의 숲에도 노르웨이의 숲은 없다.
And when I woke, I was alone. This bird has flown.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는 나 혼자 뿐이었어. 귀여운 작은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지.)
하루키는 존 레넌이 읊조리는 저 두 마디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썼고 그렇게 노르웨이의 숲이 탄생했다고 한다. 소설 속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함께 산책을 하던 초원을 회상한다. 18년 전이 무색할 만큼 뚜렷한 기억과는 역설적으로 나오코는 부재한다. 마치 비틀스의 노래에서 노르웨이의 숲에 있어야 할 여인이 아침에 사라진 것처럼. 노르웨이의 숲은 이렇듯 추억과 상실이 공존하는 역설적 공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루키의 또 다른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도 북유럽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 다자키 쓰쿠루는 어릴 적 그를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의문의 사건을 파헤치고자 순례에 길에 오른다. 그는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믿는 친구를 마침내 핀란드에서 재회한다. 하루키에게 북유럽은 무슨 의미일까? 어릴 적 읽었던 상실의 시대에서의 북유럽은 당시 나의 아픔을 치유하는 장소였다. 유년기의 방황 그리고 이별로 인한 상실감은 아직 마음 한 켠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성인이 되어 다자키 쓰크루와 함께 내 유년시절의 순례의 길에 올라 마침내 북유럽에 도달한 이유다.
사실 나의 인생은 북유럽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중학교 때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 이미 노르웨이의 숲에 가보았다. 굳이 그 시절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글을 쓰는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노르웨이의 듀오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것. 사실 북유럽은 조명이나 그릇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는 일은 밤하늘위에 나만의 별자리를 그리는 일만큼이나 즐겁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루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더욱 즐겁다. 우주만큼 광활한 하루키 월드에서 발견한 당신만의 별자리는 무엇인가.
에디터 정진욱 Chung Jinwook
커버 이미지 ny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