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헤르만 헤세
한줄평 : 어디에서 보내느냐가 인생의 행복을 결정한다.
자연은 치유하는 힘이 있다. 하루종일 새파랗게 질린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뻑뻑해진 두 눈은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경험을 한다. 푸른 하늘, 울창한 숲, 새파란 호수, 철썩이는 파도, 금빛 모래사장, 귀엽게 지저귀는 새소리, 지붕 위에 통통 떨어지는 빗소리, 휘잉휘잉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조그맣고 앙증맞게 노란 꽃잎을 피우는 애기똥풀꽃까지, 우리는 자연을 통해 육체의 피곤함과 마음의 피로함을 녹인다. 흙과 자연에서 나오는 것들에는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일까. 헤르만 헤세는 나무를 좋아했고, 숲을 사랑했고, 손으로 흙 만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소설 작품마다 숲으로 떠나는 방랑자의 모형은 어쩌면 그가 평생 소망하고 있는 이루지 못할 꿈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올여름 나는 언짢았다. 대부분 궃은 날씨와 아픈 몸 때문이었고 이런저런 일들이 내 여름날을 앗아가버렸다. 그러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시기는 다르다. 무더운 마지막 밤들이 이어지고 최초로 과꽃이 피어나는 이 시기에, 나는 내 몸의 모든 숨구멍을 통해서 자연을 빨아들인다. 나는 1년 중 이때 가장 풍요로워진다.
겨울이나 봄에 이 무렵을 생각하면 무척 아름답고 숭고하면서도 덧없는 영상들이 떠오른다. 풍만하게 활짝 피어난 장미꽃이 가지에 무겁게 매달려 고개를 숙이고, 그 달콤한 향기에 매혹된 내 모습이 떠오른다. 또 복숭아꽃에 관한 영상도 떠오른다. 자주색의 잘 익은 복숭아를 적당한 시기에 줄기 받침대에서 따낸다. 그러니까 복숭아가 특유의 단맛을 내면서 한껏 풍만하게 살지고 무르익어 이제 더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그 순간 따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숭아는 더는 저항하지 않고 만지자마자 우리 손에 굴복하며 떨어진다. (102)
나는 그의 책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과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으며 그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보다 더 자연에 가까웠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AI에게 물었더니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더 깊게 자연과 생활했다고 해서 내가 따져서 바로 잡았다. 아래 그래프에서 보듯이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2년 2개월간 숲에서 자급자족하며 생활했다. 하지만 그곳은 마을 시내에서 불과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수시로 방문객이 찾아오는 등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월든>이라는 체험글을 쓰면서 짧은 2년 2개월의 삶이 더 빛났을 뿐이다. 그에 반해 헤르만 헤세는 50세 이후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며 죽을 때까지 거의 30년을 흙과 함께 생활했다.
(챗GPT를 사용하여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헤르만 헤세가 자연과 함께 살아간 기간을 비교하여 그린 그래프)
어딘가에 내 집을 짓고 한 조각의 땅을 사랑하며, 그 땅을 단지 관찰하거나 그림으로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경작하여 식물을 재배하고 농부들이나 목장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맛보는 것, 지난 이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의 리듬에 참여하는 것, 그것은 내게 근사하고 부러워할 만한 행복처럼 여겨졌다. (140)
그는 기독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으나 열두 살에 시인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싶다고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공허했다. 1년 뒤 자살을 시도했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시계공이 된다. 그러한 그의 삶은 그의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전체가 자전적 요소를 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소설에서처럼 방랑자가 될 수 없었던 그가 꿀 수 있는 유일한 꿈은 정원을 갖는 것이었다. 자신만의 정원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 느리게 흘러가는 자연 속에 온 몸을 맡기는 것. 그는 50이라는 나이에 그 꿈을 이루고 진정 기뻐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소유욕에 사로잡혀 휴식도 잊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계절의 모습을 다가오는 겨울날에도, 심지어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간직하고자 한다. 나는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쉽게 벗어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비웃던 것들을 온통 붙들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괴로워한다. 정원에, 테라스 위에, 탑 위의 풍신기 아래에서 나는 며칠 동안 몇 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 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부지런을 떤다. 연필과 펜, 붓과 물감을 들고 화려하게 피었다 사라지는 이런저런 사물들의 풍요로움을 내 곁에 남기고자 애쓴다. 정원의 계단 위에 서린 아침 그늘을 공들여 스케치하고, 굵은 참등나무의 뱀처럼 뒤얽힌 덩굴과 멀리 저녁 산들 위에 감도는 유리 빛깔 같은 색채를 베끼려 애쓴다. 그것들은 가는 숨결처럼,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106)
그는 아들과 손자와 함께 삽을 들고 정원을 가꾸었지만 열심히 일하는 농부 스타일은 아니었다. 베짱이에 가까운 자연친화적 한량이 되기를 꿈꾸었다. 땀흘려 일하고 자급자족하는 농부가 아니라, 자연에 맡기고 때가 되면 수확하는 그런 한가로운 시인 농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그 꿈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원에서 자연을 벗삼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많은 경험을 통해 친숙해진 농부의 생활을 다시 한 번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생활에 열정적으로 정신없이 몰두할 마음은 없다. 오히려 여유를 갖고 해나갈 생각이다.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한가로이 즐길 것이며, 수풀을 개간하고 식물을 재배하는 일보다는 가을의 타는 장작불의 푸른 연기 곁에서 꿈꾸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141)
오늘도 아내와 노년 생활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며 긴 시간을 토론했다. 헤르만 헤세가 정원 갖는 것이 꿈이었든 나도 숲세권 아파트에 사는 게 꿈이다. 가까운 곳에 숲이 있어 언제든 걸어나가면 나무를 만나고 꽃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곳이 있을까. 오늘 일월 호수 둘레길을 걸으면서 주변 아파트 시세를 알아봤다. 정말 오래된 아파트인데 단지 호수뷰가 있다고 그런지 생각보다 꽤 값이 나갔다. 아, 여긴 안 되겠다. 우리 다른 데를 알아보자. 나는 조금씩 마음을 접고 있다. 2년 반 뒤에는 억지로 오산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오산에서 살다보면 오산도 좋아지고 정이 들고, 또 저렴한 숲세권 아파트가 있을지도 몰라. 위안을 해 본다.
나무는 늘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설교자이다. 나는 나무를 존경한다. 나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 가정집 안에서, 크고 작은 숲 속에서 자라는 나무를 존경한다. 특히 한 그루씩 홀로 서서 자라는 나무를 존경한다. 나무는 마치 고독한 존재와 같다. 나약함 때문에 현실을 벗어나 은둔하려는 사람과는 다르다. 마치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고독하게 버텨낸 위대한 사람 같다. (148)
나도 같은 마음이다. 혼자서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나무, 풀, 꽃. 그렇기에 그들이 견뎌내는 삶. 살아내는 시간들이 존경스럽다. 고독함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고독에 놓여있는 그들의 삶은 위대한 베토벤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음악을 창조해내야 하는 그 고독의 깊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무는 얼마나 고독할까.
힘든 시절에는 수동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면서 자연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우리 같은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동시대의 사람들이 겪은 것들을 표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들어서가 아니라 직접 체험해서 알게 될 때에만 할 수 있다. 그것이 격앙된 방식이나 감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든, 아니면 우습거나 탄식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든 어떤 경우에라도 필요하며, 외롭게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발전해가는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125)
아내가 집에서 서점을 여는 것까지는 허용해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들뜬 마음을 안고 있다. 어서 큰 애가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면 그 방에 책을 들이고 예약제 서점을 열 것이다. 독서 모임도 하고, 글쓰기 수업도 할 것이다. 꿈이지만, 헤세가 50세에 자신의 꿈을 이룬 것처럼 나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써야 한다. 작가로 존재하기 위해서, 인류에 도움이 되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아파트 방 안에 책방을 열고 독서 모임을 하고 글쓰기 지도를 할 것이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 슬픈 일들이 있다. 그래도 때때로 꿈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충족되는 가운데 찾아오는 행복이 잇다. 그 행복이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해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이 행복은 잠시 동안은 참으로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 한곳에 머물 수 있는 고향이 생긴 기분, 꽃들과 나무, 흙, 샘물과 친해지게 되는 기분, 한 조각의 땅에 책임을 지게 되는 기분, 오십여 그루의 나무와 몇 그루의 화초, 무화과나무나 복숭아나무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기분은 그런 것이다. (142)
헤세의 책을 읽으며 내 꿈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단호해진다. 그가 50여 나무와 몇 그루와 화초, 무화과나무와 복숭아나무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처럼 나 역시 내 미래 책방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다. 이상적인 나에 비해 지나치게 꼼꼼하고 현실적인 아내는 고개를 흔든다. 절대 마이너스가 되면 안 돼. 알았어. 손실을 본다면 나도 바로 접을 게. 우리는 이렇게 합의를 한다. 헤세의 책을 읽으며, 손에 흙을 묻히는 헤세를 보며, 나는 다른 꿈을 꾼다.
살아가면서 힘겨운 상황에 부닥칠 때 비로소 사람의 본성은 감춰지지 않고 드러난다. 각자가 정신적이나 이상적인 것과 맺고 있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비록 맛을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익숙하게 뒷받침해주던 외적인 삶이 사라지거나 흔들릴 때 비로소 그 모든 것은 참모습을 드러낸다. (152)
이 책은 앞서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에 비하면 조금 더 일반적인 에세이에 가깝다, 그의 글은 정원을 가꾸는 일에 대한 것보다 내면에 더 치우친다. 그의 지혜로운 잠언에 더 가깝다. 소설을 통해서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다면,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라는 에세이를 통해서는 사람의 본성, 익숙하게 뒷받침해주는 외적인 삶이 사라진 원초적인 삶을 바로 맞닥뜨리게 한다. 그래서 두 책은 비슷한 듯 하지만 서로 다르다. 그리고 그의 정원에서의 삶. 복숭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삶을 그의 다른 책에서 무한하게 발현된다. 베토벤이 창작의 고통을 인내하는 것과 같이 그의 작품 속에서 창작의 고통과 함께 소설이라는 열매로 익어간다.
이렇게 나는 지난 12년간을 카사 카무치에서 살았다. 그 정원과 집은 나의 소설 <클링조어> 속에, 그리고 그 외의 내 다른 작품들 속에 나온다. 나는 이 집을 수십 차례 그림으로 그리고 스케치했다. 그런 가운데 그 집의 복잡하게 뒤얽힌 까다로운 형태를 자세하게 탐구했다. 지난 마지막 두 해 동안은 그 집과 고별하기 위해서 여름에는 발코니에서 창문에서 테라스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경치를 다시 한 번씩 스케치했다. (171)
책을 읽다가 그가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대작 <유리알 유희>를 착상하게 되었는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작은 행동, 작은 발견, 작은 소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연의 소리, 일상의 소리,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들려오는 주변의 소리에서 그는 <유리알 유희>를 떠올렸다. 흙과 재를 섞으면서, 흙이 오래되어 발효하면서 이야기는 커지고 그의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났다. 아, 이런 보석같은 이야기가 여기에 숨어 있었다. <유리알 유희>를 너무 감동적으로 읽었던 터라, 그가 이야기의 착상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새롭게 알게 되는 기쁨의 파동은 매우 컸다.
손수레가 굴러가는 소리, 이따금 불꽃이 탁탁거리는 소리만이 들린다.
불길은 나무뿌리를 바싹 말리며 탐욕스럽게 갉아 들어간다.
조용히, 그러나 절대 무료하지 않게 나는 땅에 무릎을 꿇고서
부드럽게 손으로 재를 모아 그럴듯하게 둥근 체를 채운다.
방금 태운 불에서 생겨난 그 재 속에 흙을 섞는다.
오랫동안 따스하고 축축한 퇴비가 쌓여 있던 땅바닥에서
서서히 발효하고 부패한 흙이다.
대충 섞인 그것을 흔들면, 체 밑으로 재가 된 흙의 고운 작은 알갱이들이 쌓인다.
일부러가 아니라도 나는 체를 흔들며
서로 하나가 되게 하는 명료한 박자 속으로 빠져든다.
그 박자에서 절대 지치지 않는 기억이 다시 음악을 만들어 내고,
제목도 작곡가도 모르는 곡을 흥얼거리다가 돌연 생각나는 이름, 모차르트다.
그의 오보에 사중주곡......
그래. 이제 내 마음속에는 한 가지 명상의 유희가 떠오른다.
벌써 몇 해 전부터 나는 그 생각을 열심히 굴려왔다.
유리알 유희라고 이름 붙였다.
참으로 멋진 착상이다. 그것의 골격은 음악이고 그 기초는 명상이다.
(...)
나중에 언젠가 나는 그것을 글로 묘사해야겠다.
다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206~207)
이 책은 단순히 정원에서 그가 흙을 만지고 나무를 다루는 글이 아니다. 그의 마음속 정원, 상상 속 자연, 소설 속 방랑자들이 돌아다닌 숲의 원형을 그려내는 글이다. 작가로서의 삶, 정원사로서의 삶, 화가로서의 삶,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래서 또 다른 헤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책 속에 정원에서 흙을 만지는 헤세의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 비록 흑백 사진이지만 사진으로 자연인 헤세를 만날 수 있는 기쁨은 크다.
그의 사진을 보고 나면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진정한 방랑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크눌프와 골드문트, 클링조어 등 그가 소설 속에서 창조해 낸 많은 인물들의 원형이 바로 자기 자신, 헤르만 헤세다. 자연을 사랑하고 사랑했던 헤르만 헤세의 삶. 그의 자기 내면 속 글을 통한 외침이 바로 이 책에 고스란히 실려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정원지기로서의 글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가진 진솔되고 꾸밈없고 진지하며 천진난만한 글로 꾸며져 있다. 헤르만 헤세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