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수레바퀴 아래서]
한줄평 : 억압된 교육이 낳은 최대의 비극 이야기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여기에서 밝힐 필요는 없겠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누구나 쉽게 이 책의 흘러가는 구성과 주인공 한스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종종 독자는 주인공의 나이에 맞춰 자신을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주인공과 같은 나이 또래가 책을 읽게 되면 다른 나이대의 독자가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몰입하고 그 환경과 결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신문의 세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잘 드러나지 않았겠지만 추측컨대 많은 청소년기에 있는, 한스와 같은 처지에 있던 학생들 두어 명은 한스를 따라 용감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한스의 뒤를 따라 억압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책에서는 한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한스의 죽음은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기벤트라 씨는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혼자서 욕설을 퍼부었다. 9시가 되어서도 한스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래동안 사용하지 않던 등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꺼냈다. (...)
마침내 아버지도 그의 분노도 잠에 굴복하고 말았다.
같은 시각, 아버지가 마음속으로 그토록 꾸짖던 한스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검푸른 강물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조용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이나 부끄러움이나 괴로움도 모두 그에게서 떠나버렸다. (260)
실제로 헤르만 헤세는 수도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고보면 헤세의 자전적인 부분은 주인공 한스보다는 친구 하일러에 더 가깝다. 그리고 한스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로 소설 속에서 생명을 이어나간다. 마치 과거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그래, 선택했어!' 하고는 가정한 양쪽의 운명을 하나씩 체험해보는 것처럼, 작가는 퇴학당한 친구 하일너에게 실제 자신을 묘사하고, 한스 주인공을 통해서는 자신이 퇴학 당하지 않고 수도원을 계속 다녔을 경우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를 상상하고 투사하고 고발한다.
그렇다. 이 책은 당시 사회를 묘사하지만 묘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능 있고 똑똑한 두 학생의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통해 사회와 어른들의 제도를 고발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 책은 발간 당시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던졌을 것이다. 교사들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읽어서는 안 되는 책으로 금서 목록에 올려 놓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으면 불량학생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탈주자 하일너가 붙잡혀 왔을 때, 수도원에는 엄청난 흥분이 일었다. 그는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다녔다. 짧았던 천재다운 여행을 뉘우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168)
한스는 머리가 좋았지만, 공부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고 즐기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는 아이였다. 낚시를 좋아했으며 푸른 강을 보며 사색하기를 즐겨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더러 윤기나는 잉어를 낚아올리기도 했다. 흰 잉어와 탐스러운 잉어들, 그리고 멋진 빛깔을 자랑하는 자그마한 잉어들. 오랫동안 그는 강물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푸른 강변을 바라보는 사이에 어느덧 깊은 상념에 사로잡히고, 어쩐지 애수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의 아름답고 자유로운, 거친 즐거움이 그토록 멀어져 간 것만 같았다. (17)
숲가에는 솜털과 노랑꽃을 가진 양담배풀이 위엄을 드러내며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가늘고도 억센 줄기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부처꽃과 분홍바늘꽃은 골짜기를 온통 보라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안쪽 잣나무 아래에는 빨간 디기탈리스가 품위 있고 아름다우면서도 이국적인 자태를 자랑하며 피어 있었다. 그 꽃은 은빛나는 털을 지닌 넓적한 근생엽과 튼튼한 줄기, 그리고 높다랗게 늘어선 예쁜 분홍빛의 꽃받침을 가지고 있었다. 옆으로는 갖가지의 버섯, 두껍고 넓적한 우산버섯, 괴상스럽게 생긴 선옹초, 붉은 가지가 많이 난 싸리버섯, 그리고 이상하게도 색깔이 없으면서 엷게 기름기가 넘치는 석장초. 숲과 초원 사이의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두렁에는 아귀 센 금작화가 불에 그을린 듯한 짙은 황색으로 반짝이고, 라일락 담자색의 길쭉한 석남화가 무리지어 있었다. 그리고 재벌 풀베기를 바로 눈앞에 둔 초원에는 황새냉이, 동자꽃, 꿀꽃, 체꽃이 다채롭게 우거져 있었다. (49)
가만히 책상에 앉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고, 말도 못하게 하고, 50분간 공부만 하다가 10분 동안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학교라는 제도와 규칙은 당시 공장이 그러한 시스템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산업인, 공장인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공장주와 짜고 사전 단계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라. 초등학생 1학년이 최대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초등학교 6학년, 중학생, 고등학생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다르다. 초등학생 1학년을 모두 한 곳에 몰아 넣고 자리에만 앉아 있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모든 학생을 ADHD 증후군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1년 성장할수록 급격하게 변하는 우리 소년 소녀, 청소년들의 발달단계는 어른이 생각하는 그것과 무척 다르다. 다들 경험했을 것이면서 자신도 그렇게 컸으니 너희들도 그래야 한다는 발상은 무척 바보스러운 것이다. 여기 헤세의 글을 통해 표현된 한스의 상황을 보라.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무질서의 요소가 숨어 있다. 먼저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은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다. 먼저 그것을 밟아 꺼버려야 한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예측 불허의, 불투명한, 위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승인한 기본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잠재된 개성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병영에서의 주도면밀한 군기를 통하여 극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72)
헤세는 당시의 교육제도를 끔찍한 군 생활, 그것도 군기를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답답한 울타리, 마칠 때까지 담장을 넘어가면 질 나쁜 학생으로 낙인 찍히는 규칙. 무조건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바짝 군기 든 긴장 상태로의 수업. 그리고 무시무시한 평가라는 시험. 등수로 사람을 줄 세우고 평가하고 인정하는 몰인정한 곳. 어른들은 바보다. 자신이 거쳐온 그 험난한 시간과 공간을 다시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며 그곳에서 뛰어난 인재가 되기를 바란다. 그곳이 진정 행복을 보장해주는 공간이 되길 희망한다.
"슈투드라르트에서 좋은 시간 보냈니?" 늙은 안나가 물었다.
"좋은 시간이라구요? 아니, 도대체 시험이란 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전 다시 돌아온 게 그저 기쁠 뿐이에요." (38)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교장선생님)
그는 힘주어 한스의 손을 잡았다. (146)
친구와의 갈등, 병영에서 기수 열외 당하는 따돌림, 그런 사회 구성원, 공동체 생활에서의 부적응은 세심하고 내성적인 학생에게 학교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주는 최악의 장소다.
이렇듯 고통과 고독에 내맡겨진 병든 소년 한스에게 위로자의 가면을 쓴 또 다른 유령이 다가왔다. 그리고 점차 그와 친숙하게 되어 급기야는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181)
아, 죽음. 이미 소년 한스는 죽음이라는 친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소년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라는 것을 어른들은 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한스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애틋하다. 한스처럼 나는 문과를 포기하고 기계공이 되었다. 기계실습 1학점짜리 수업 시간에 한스가 그렇게 톱니 기계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쇠를 갈았던 것처럼 나는 한 학기 내내 쇳덩어리를 들고 갈았는데, 시험 시간에 표면 게이지가 휙휙 돌아가버리는 내 결과물을 보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우구스트는 며칠만 지나면 물집이 없어진다고 한스를 위로해 주었다. 게다가 그 뒤에는 손도 굳어지고,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스는 죽고 싶으리만치 비통하고 불행한 심정으로 하루 종일 시계만 훔쳐보며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채 톱니바퀴를 갈고 있었다. (242)
고독과 허무가 이야기 후반으로 갈수록 짙게 음영을 드리운다. 사회적 고발서이기도 하고, 교육 체계의 문제를 삼는 작품으로도 읽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만 반드시 이 책이 그런 면에서만 완성된 책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내 어린 시절 내 마음, 내 환경, 내가 느꼈던 생각들과 너무 비슷해서 깊이 몰입해 읽었다. 청소년 시절에 읽었던 책이지만, 이제는 어른이 되어 그것도 나이가 깊숙해진 상태에서 읽다보니 또 다른 면들이 보인다. 한스와 동갑내기가 되어 이야기를 보지 않게 된 것은 그나마 축복이긴 하다. 이제 자녀를 보는 마음으로 한스를 보게 되었는데, 그래서 더 아프고 짠했던 책이다.
힘든 소년 시절을 보낸 헤세와 한스 그리고 하일너에게 깊은 위로와 사랑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