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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May 20. 2022

유럽의 소설엔 뭔가가 있지

터키, 프랑스, 체코의 소설 세 권을 리뷰합니다

1.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역사 소설과 ‘상실’이라는 키워드가 부합할 수 있을까요? 동지중해의 작은 섬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건국의 기쁨을 맞이하는’ 역사’라고 한다면, 투쟁과 성취의 화려한 불꽃이 가슴을 뜨겁게 달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오르한 파묵의 새 소설 『페스트의 밤』을 읽는 내내 무언가를 잃어가는 사람들의 숨 내를 맡는 기분이었습니다. 파묵의 이전  작품들을 읽으며 쌓여 온 감정이 신작에도 영향을 미친 걸까요? 하지만 가까스로 소멸을 피한 민족, 허물어져 가는 제국, 시대에  뒤떨어지는 근본을 지키려고 애쓰는 종교, 무엇보다 페스트로 사랑하는 사람과 증오하는 사람 모두를 잃은 인물들을 마주하며 상실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 같습니다.


역사책 속 주인공들이 담담하고 딱딱한 문장으로 서술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에게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이 소설, 영화, 드라마를 통해 부활하기까지 한다면 실제로 그들이 한  일과 하지 않은 말들에 과몰입하게 되기도 하지요. 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결정이 순전한 우연이나 실수에 의해 빚어지기도 했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도,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끊임없이 “만약에…”를 중얼거리며 달라졌을 현재와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고요. 『페스트의 밤』은 실제 역사가 지닌 그런 다층적인 매력을 가상의 역사를 통해 재현합니다.


『페스트의  밤』에서 현대의 역사가로 설정된 화자는 이 책이 역사 소설 혹은 소설의 형태를 취한 역사의 기록이 될 거라는 서문으로 운을  띄웁니다. 그리고 엄정한 사료(당시 민게르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오랫동안 방에 갇힌 채 전해 들었고, 나중에는 직접 보고  경험했던 어느 폐위된 왕의 공주가 쓴 편지들)에 기초해 사건을 기술하면서도 야사와 상상이라는 동력으로 시적인 묘사를 덧붙이고  인물의 심리와 대사를 꼼꼼하게 재현해 냅니다. 역사가 본인의 주관적인 시각까지 거침없이 드러내고요. 무려 800페이지에 가까운  역사 소설을 읽고 있으면 생소한 옛 오스만 제국의 ‘실제로 있지도 않은’ 변방 섬에서 벌어진 비극과 모험에 점점 몰입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인가 상상의 역사인가? 20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며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거의 없는 저로서는 아마 파묵과 동일한 문화권의 젊은 독자들도 느꼈을 이런 혼란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실망하고, 분노에 차 얼른 역사의 장에서 퇴장하길 바라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사소한 선택들의 마법을, 페스트라는 인간을 초월한 힘의 위력을 경이롭게 바라보았습니다.


이 책의 주요 소재는 물론 페스트입니다. 카뮈의 『페스트』가 재난에 내몰린 오랑의 시민들을 통해 인간의 여러 단면을 밀착  취재하였다면, 파묵의 『페스트의 밤』은 민게르섬에 닥친 페스트를 빌미로 알력 다툼을 벌이는 여러 세력의 무능과 기만에 초점을  맞추며 정치적인 비판을 가하는 듯 보입니다. 사악한 중앙 정부와 무능한 지방 정부, 열강의 간섭, 전근대적인 종교, 증오와 차별로  무장한 폭력 집단, 그리고 혁명과 민족주의의 태동, 변질까지 도저히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건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결국 이 소설의 매력은 그 수많은 실패와 죽음이 결국에는 ‘사랑’ 때문이었음을 어느 순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파묵 특유의 세세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슬픈 묘사가 처음엔 드물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많아지는 것도 각자 뭔가를 잃은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페이소스가 그즈음 차고 넘칠 정도로 쌓였기 때문인 듯하고요.


끝으로 이 책은 화자인 역사가가  페스트가 물러간 후 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개인사와 엮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에필로그’까지 전부 읽고 나서야 완성된다고  말하고 싶네요. 오르한 파묵이 화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가상의 역사는 이 두꺼운 책을 거의 다 읽었을 즈음 거의 실제 있었던  일처럼 각인되는데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화자가 돌이키는 섬의 과거와 현재가 독자에게 스며든 가상 역사의 기억과 맞물려 그리움을  자극하고 극대화합니다. 그게 정말 묘하고 강렬한 체험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편’은 소설 속 소설 파트이고, 에필로그가 이  책의 진짜 소설 파트인 것 같다고 할까요. 다른 분들께서도 파묵이 다시 한 번 써낸 이 역작을 읽고 비슷한 인상을 받으실까  궁금합니다.


하미디예 다리에 도착하자 체력이 바닥났다. 문득 바닥에 쓰러져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중 가장 다채롭고 붐비는 시간에 야자나무와 플라타너스,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 상냥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실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_39p.

항상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인력 혹은 여력이 모자라거나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시간에 잠시의 행복과 위안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이성적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희미한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안는 것임을 총독 파샤나 콜아아스나 누리나 이제는 다 알고 있었다. _348p.

아무도 잊지 않았지만 어쩌면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소리들이 도시에서 하나둘 다시 들리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옛 삶이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믿지 못했다. 가장 큰 기쁨은 말발굽 소리, 마차 바퀴 소리, 종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이었다. _695p.



2. 『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지음



미셸 우엘벡은 흔히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작가라 불립니다. 그의 작품엔 선정적이거나 잔혹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정치적 올바름’의 정반대 편에 있는 인물과 사건, 사고思考를 묘사하는 데도 거침이 없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라지만 주인공조차 편견과 차별로 얼룩진 독백을 하고 있으면 독자는 저자의 생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최근작인 『세로토닌』에서 옮긴이가 후기에 쓴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미셸 우엘벡의 소설엔 ‘빌런’이 가득하다고요. 물론 주인공-화자도 포함해서요.


하지만 우엘벡의 소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며 독자에게 시사점을 주고, 작품 속 인물과 서사가 흥미롭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도 적잖이 웃깁니다. 『투쟁 영역의 확장』은 그의 첫 번째 소설로 다른 작품들의 특징이 될 씨앗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고립되고 의욕도 없으며 자기파괴적인 주인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됩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주장합니다. 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부를 얻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현대인이 육체관계를 갖기 위한 경쟁 상태에도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소설 속에선 노골적으로 외모나 매력에 따라 육체적인 사랑을 즐길 수 있는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을 나눕니다. 화자는 2년 전 연인과 헤어진 이후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동료인 티스랑은 만나는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치근덕거리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이지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원하는 건 사랑인가 성관계인가? 이 둘을 혼동하는 건가? 아니면 실상 인간에게 사랑은 육욕이나 다름없다는 것인가?


주인공은 심낭염을 앓은 후 염세적인 태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우울증이 심해집니다. 전도유망한 직장을 버리고, 동료에게 옛 연인을 닮은 여자를 죽이라고 부추기며(미리 준비한 칼까지 건네주지요), 결국 요양원에 들어가 상담사와 치료를 시작하지만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는 요양원에 있는 환자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우리는 단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요. 그의 무기력과 우울은 정말 사랑 때문에, 예컨대 2년 전에 헤어진 연인 때문일까요? 그의 말대로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더 갖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가 ‘고통’만 안겨주기 때문일까요?


화자는 퇴원 후 몇 번이고 가려다 실패했던 마자스 숲으로 떠납니다. 초원에서 햇살을 받으며 기분 좋은 행복감, 희망을 느낍니다. 바로 그때 긍정적인 감정은 다시 고통으로 변하고…. 이후로 우엘벡이 쓸 다른 소설들처럼 행복한 결말도, 차라리 마땅한 인과응보도 없습니다. 그저 오후 2시 같은 인생, 정점에 떴던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는 인생의 단면만 남았을 뿐입니다.


나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한때 자신이 낙오자 내지는 패배자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본다. _44p.

인생은 다만 죽음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좀 더 거칠게 그리고 좀 덜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란 점점 쇠약해지는 청춘인 것이다. _129p.

욕망 그 자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고통, 질투, 공포만 남아 있습니다. (…)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전례 없는 최악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정신 상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통>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_212p.



3.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35년째 폐지를 압축해 온 남자가 있습니다. 한때는 멋도 부리고 사랑에도 빠져봤지만 이젠 오롯이 혼자가 된 사람입니다. 주변에는 폐지를 음식이자 보금자리로 여기는 생쥐들뿐이지요. 하지만 남자는 악취 가득한 지하실로 떨어진 폐지와 쓰레기 더미 속에서 귀중한 책들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고, 지금껏 그 책들을 읽어왔습니다. 괴테, 카뮈, 헤겔과 쇼펜하우어…. 그중 그가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은 서로 양극에 서 있는 듯한 예수와 노자입니다. 그가 읽은 작가와 철학자를 비롯해 예수와 노자도 때때로 그의 지하실로 찾아오지요. 환영들의 방문은 남자를 기쁘게 합니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폐지를 처리하며 평생을 살아온 한탸라는 인물의 독백으로 이뤄진 소설입니다. 무엇보다 책을 사랑하지만 35년 동안 그 책을 파괴하는 일을 해왔다는 아이러니가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지요. 체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나지만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구 프로이센 왕실의 장서가 독일의 잔재라는 이유로 쓰레기처럼 버려졌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인류의 유산이 그런 취급을 받는 데 충격을 받은 한탸는 이후로 불행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는 버릇처럼 말합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실제로 그가 알던 많은 이들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지 못한 채 죽거나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저자 흐라발은 주인공 한탸의 기억을 통해 가슴 싸늘해지는 비극을 묘사하면서도 그걸 비극적이지 않게,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게 묘사합니다. 한탸가 평생 폐지 더미에서 찾아낸 책으로 교양을 쌓고 심오한 사고를 흡수해서 비극과 고된 일상을 견뎌내는 걸까요? 그보다는 권력과 부, 지위의 주변부에 사는 소시민의 무력감을 체화하고, 자기만의 세계(작품을 만들 듯 폐지를 압축하고 맥주를 들이켜고 책을 읽는 일상의 반복)에 침잠함으로써 가까스로 생존해 나가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또한 실존주의 소설로 읽히지요.


5년 앞으로 다가온 은퇴 시점에 압축기를 사들여 자신만의 폐지 꾸러미를 만들겠다는 한탸의 꿈은 이번에도 ‘인간적이지 않은’ 변화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을 쫓아 집까지 따라온 집시 소녀와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난롯불과 매일 똑같은 소박한 음식, 하늘 높이 날리는 연만으로 모든 게 족했던 시절이었죠.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래서 회상의 결말을 알기도 전에 이미 슬퍼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거기서 한탸가 잃었던 건 그 집시 소녀의 이름이었습니다. 폐지 더미에 파묻혀 일한 지 35년 만에 휩쓸린 마지막 파고 속에서 마침내 그가 기억해 낸 이름이요. 하늘은 내내 인간적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다운 인간으로 살다가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_16p.

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_75p.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서로 합의를 본 것 같았다. 이 세상에 함께 온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떠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_81p.




* 이 리뷰는 여분의 책방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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