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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Jun 07. 2022

조금은 과학적이고 싶어

어렵지 않은 과학서 세 권의 리뷰

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 천재적인 구성, 미스터리와 하나둘 베일을 벗는 비밀, 마음을 울리는 인물들…. 소설이냐고요? 아닙니다. 이 모든 수식이 어울리는 『물고기』는 논픽션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놀랍게도, ‘스포일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고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봅니다. 좌절을 겪은 저자가 어떤 분류학자의 일생을 조사하면서 자기 삶을 돌아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다. 아, 뭔가 부족한데요. ‘편의’를 위해 ‘진실’을 대충 뭉쳐서 내던지는 또 다른 사례가 될 것만 같습니다. 과학 저널리스트인 룰루 밀러는 우리에겐 조금 생소한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화로 이 책을 시작합니다. 분류학, ‘지구상 모든 생물의 족보를 작성하고 서로 가족도 찾아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데이비드는 특히 ‘어류’를 발견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습니다. 인류에게 알려진 물고기의 5분의 1을 이 사람과 이 사람의 팀이 발견했다고 하니까요.


각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어종을 찾고 그 표본을 가져와 이름을 붙이던 데이비드. 밀러의 표현에 따르면 “혼돈”, 그러니까 규모 7.9의 지진이 그를 덮칩니다. 그가 평생 모아 온 표본과 그 ‘이름’이 담긴 유리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뒤섞여 버린 이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가 그 참혹한 현장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릎을 꿇고 절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물고기와 그 이름표를 찾아 실로 꿰매는 것이었습니다. 밀러는 바로 이 장면에 주목합니다. 개인적으로 큰 상실을 겪어 좌절한 그녀에게 평생의 업적이 수포로 돌아갔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한 남자가 계시처럼 다가온 것이지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절망하지 않고 “지구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게 만든 것일까? 그걸 알 수 있다면 나도 소중한 것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물고기』는 밀러가 데이비드의 삶과 모험을 통해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진실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말이죠.


룰루 밀러의 가장 큰 재능은 과학, 철학, 정치에 걸친 거대한 주제와 자기 자신을 비롯한 작고 평범한 개인의 삶을 놀랍도록 유기적으로, 아름답게 엮어낸다는 것입니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든 시인이랄까요? 후반부에 밀러는 우리가 어느 위치에 서서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을지 제안합니다. 지금껏 인간이 세상의 꼭대기에 서기 위해 그어 놓았던 선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과학, 전기, 범죄 스릴러, 르포를 거쳐 이 부분은 자기계발서 같은 면모도 보이지만, 거기까지 그녀가 쌓아 온 이야기의 깊이와 너비가 광대하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인간은 우주 속의 한낱 먼지, 우리가 무의미한 존재라는 비관과 허무주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곱씹어 보게 됩니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이 책은 탁월한 구성이 백미인 작품입니다. 아마 룰루 밀러는 처음 데이비드 조던 스타라는 이름을 구글로 검색했을 때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개략적으로는 알았을 겁니다. 이후로 몇 년에 걸쳐 그의 저작 수십 권을 읽고, 오래된 자료실을 뒤지고,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심연을 제대로 대면했겠지만요. (그래서 이런 책을 쓸 수 있었겠지요.) 어쨌든 책 전체에 걸쳐 그에 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독자를 끌어들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외국 도서 사이트는 이 책을 ‘과학 스릴러’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갈채를 보낼 만한 책이었습니다. 순수하게 읽는 재미까지 보장하는 책이었고요. 『물고기』가 첫 책인 룰루 밀러라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습니다.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선 굉장히 솔직하고 주관적인 관점을 드러냅니다. 실수의 수치와 진실 앞에서의 머뭇거림과 분노와 복수심(심지어 로맨스도)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그런 인간적인 면이 이 책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는 진실을 마주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포일러 하나. 다 읽을 때까지 이 책의 제목이 은유나 상징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책을 읽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카프카가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 한 사람을 계속 나아가게 만드는 무언가를 일컬은)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경이로운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비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개념은 단지 내가 그것을 거역한다면 나를 부숴버리겠다고만 약속할 뿐이다. _131p.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_227p.

이건 내가 그려왔던 인생이 아니었다. (…) 그러나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자연이 프린트된 커튼 뒤를 들춰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_262p.



2.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지음



도킨스의 저작은 이 책이 처음입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나 『눈 먼 시계공』을 접하고 이 책을 읽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요. 하지만 도킨스는 이 한 권 안에서도 전작에 담긴 과학적 증거들을 간략하게 짚으며 자신의 주장을 적절히 논증합니다. 어떤 주장일까요? 이 책의 원제는 『The God Delusion』, 의역을 좀 하자면 ‘신이라는 망상’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목적은 그 제목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도킨스가 이 책에서 주로 언급하는 국가 중 하나가 미국입니다. 옮긴이의 말처럼 한국에서 종교의 위상은 미국이나 다른 서구, 아랍 국가와는 다른 면이 있기 때문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듯한 편안함으로 이 책을 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지요. 어쨌든 도킨스는 세속주의 국가에서 시작해 지금은 거의 신정국가처럼 변한 미국을 예시로 종교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밝힙니다. 아마 미국에선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밝힌 대통령은 나올 수 없을 듯합니다. 뭐, 그건 그렇다 쳐도 종교적 성향이 강한 지역에선 무신론자라고 밝히는 게 가족이나 지인에게 절연을 당하거나 심하면 살해 위협을 받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요. 도킨스가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는 무신론자가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확신’하고 이를 당당히 밝힐 수 있도록 북돋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하지만 도킨스는 주저 없이 신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테러를 저지르는 극단적인 종교뿐만 아니라 우리 곁의 온건한 종교도 유익할 게 없다고 말합니다. 책에는 참 많은 근거와 논증이 펼쳐지지만, 도킨스가 그 이유 중 하나로 아이들을 꼽은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경전을 이해하거나 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만의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아이들이 부모나 주변 환경에 의해 일방적으로 ‘종교인’으로 길러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해당 종교의 특징에 따라 다르게 부여되는 죄의식, 수치심, 배타심 등은 어른이 되어서도 치유하기 힘든 폭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과 종교에 빼앗긴 인간의 가치를 되찾으려는 저자의 인본주의적인 면이 여기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저는 여기까지 신은 없고 모든 종교는 유해하다는 도킨스의 주장과 그 근거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여기에 책 전체를 옮길 순 없고요, 아마 저에게도 “종교를 존중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신론자여도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고 그 논거로 ‘인간 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보존해야 한다’를 들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종교야말로 ‘다양성’의 가장 큰 적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는 기회도 됐습니다. 어려운 과학이론서는 아니니 두꺼운 몸피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인상적으로 읽으셨던 분이라면 이 책을 즐겁게 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기 위한 법적 소송은 이른바 종교적 차별에 반대하는 소송으로서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법은 그것을 존중하는 듯하다. “나더러 동성애자를 모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 편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말로는 무사히 넘어갈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말로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쨌든 여기서도 종교가 모든 것을 이긴다. _42p.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이마누엘 칸트는 이성적인 존재를 동의 없이 어떤 목적(설령 그 목적이 남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해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그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 칸트에게 그것은 도덕적 절대가치였다. (생물학자인) 하우저에게 그것은 진화를 통해 우리 안에 구축된 것이었다. _340p.

나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보다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견해를 취한 부모에게 감사한다. 모든 과학적 증거들을 접한 뒤에 자라서 《성경》이 글자 그대로 진실이라거나 행성들의 운동이 자신의 삶을 지배한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중요한 점은 자신들이 무엇을 생각할지 판단하는 것은 아이들의 특권이지, 부모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아이들이 나중에 다시 부모가 되어 자신들이 배운 것을 전달할 입장에 선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사실이 특히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_498p.



3.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마이클 셸런버거



환경운동가인 마이클 셸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흥미로운 한편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작품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지구를 위하는 법’은 우리의 기존 환경 상식에 반하는 면이 있거든요. 공장이 숲을 살리고, 석유와 플라스틱이 멸종 위기 동물을 구했으며, 신재생 에너지나 바이오 원료 제품이 오히려 환경에 독이 될 수도 있다고요?


셸런버거는 환경을 살리기 위해선 인간이 더 적은 땅에서 더 적은 탄소를 배출하며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농업, 축산업, 제조업은 물론이거니와 에너지 생산에 있어서도요.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고 최선이 없는 선택지에서 차악을 택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생태계를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컨대 셸런버거는 선진국에서 자기들 것도 아닌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개발도상국이 댐을 짓거나 화석 연료 발전소를 세우는 걸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본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고 나야 개발도상국도 환경 보호에 동참할 여력이 생길 텐데, 지금껏 지구를 망가뜨린 주범(?)이었던 선진국들이 너희는 우리의 전철을 밟지 말라며 개발도상국이 성장할 기회를 걷어차고 있다는 거지요.


이 책은 에너지에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에너지는 필수적인 자원입니다. 그리고 셸런버거는 원자력이야말로 환경을 위한 최선의 에너지원이라고 말합니다. 태양력, 풍력 같은 신재생 에너지에는 회의적인 입장인데,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고 환경에 해가 되기도 한다는 이유입니다. 수명이 다한 태양광 패널 쓰레기도 문제이고, 풍력 발전기 때문에 박쥐, 조류, 곤충 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면서 화석 연료 기업들이 원전에 반대하거나 신재생 에너지를 지지하는 환경 보호 단체들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원전이 사라진 자리에 그들의 석탄, 천연가스 발전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재생 에너지는 왜 지지할까요? 태양력, 풍력 발전소는 날씨의 영향을 받아 전력 수급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보조 발전소를 추가해야 하는데, 이 역시 화석 연료로 돌아가는 발전소인 거지요.


2008년에 〈타임〉이 선정한 환경 영웅이라는 마이클 셸런버거.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됐지만, 본문에 한국 사례도 꽤 나오고 방한도 했으며 개인적으로도 한국과 인연이 있더군요. 그가 이 책을 통해 바로잡으려는 환경 상식이 너무 많아 여기에 다 소개하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발췌도 후반부 요약, 결론에 집중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알던 게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각자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기울이는 크고 작은 노력이 소용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자 역시 그런 말을 하지 않고요. 그가 경계하는 건 기후 변화로 지구가 당장 멸망할 것처럼 겁을 주면서 자기만족에 빠지고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기후 양치기’들입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우리로서는 셸런버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 지속가능한 개발은 무엇인지, 바이오 연료, 바이오 재료처럼 ‘자연적’이라는 것이 무조건 환경에 유익한지 재고할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할 일은 많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
그래서 나는 기후 변화와 삼림 파괴, 멸종 등을 둘러싼 분노와 공포 조장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환경 운동이 키우고 있는 슬픔과 고독에 주목해야 한다. (…) 해소할 길 없는 불안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념을 유포하며, 실재하는 증거를 호도하거나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_538p.

환경 휴머니즘의 핵심 가치를 밝힐 때가 됐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 개발을 부정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야 한다. 특히 부유한 나라들은 지금 당장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에 채운 개발과 에너지 생산의 제약이란 족쇄를 풀어야 한다. 자신들은 고밀도 에너지를 쓰면서 빈곤국들은 저밀도 에너지를 쓰도록 강요하는 것, 자신들이 가난을 떨쳐 내고 풍요를 이룬 길에 개발도상국이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것은 위선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_542p.

우리가 마운틴고릴라를, 노란눈펭귄을, 바다거북을 구하려는 건 인류 문명이 그 일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더 단순한 이유로 동물들을 살리고자 한다. 바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_554p.




* 이 리뷰는 여분의책방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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