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
요시모토 바나나는 요리책 없어?
-......? 있어야 해? 음식 에세이는 있어. <바나나 키친>...
아니, 그러니까, 하루키는 요리책 있잖아?
-... 있던가? 팬이 쓴 거 아니야?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에 식사 장면은 중요한 지점이고, 요리하는 장면도 꽤 나오지만 (<키친>의 주인공은 요리 연구가 어시스턴트. 한밤중에 온갖 요리를 만들어 잔뜩 늘어놓고 먹으며 죽은 가족을 그리는 장면이 있다) 뭔가 레시피를 모아서 요리책... 얇은 오이 샌드위치를 잘 만드는 손녀딸 같은 거 없는데. 아, 푸딩을 커다란 볼 가득 만드는 이모(<슬픈 예감>)는 있다.
말랑한 슬픔, 추억, 그리고 상실. 잃은 것, 사라진 것,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도.
같은 집에 오래도록 함께 있지 않으면, 설령 같은 핏줄이라도 그리운 풍경의 하나로 멀어져 간다.
여동생, 마유처럼.
- <암리타/멜랑콜리아>, p.13
요시모토 바나나는 끊임없이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슬프고 힘들지만 정말 죽을 것 같지만 그게 또 말랑말랑하게 표현되어서,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아픔을 정제해 보여준다. 아픔의 간접경험은 생각보다 유용하다.
... 그러나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그런 잠자리만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외로움이 커지니까 안된다. 하지만 부엌이 있고, 식물이 있고, 같은 지붕 아래 사람이 있고, 조용하고...... 최고다.
- <키친>, p. 25
떠난 누군가가 그리워지면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슬며시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일이 있었지, 맞아 그랬지. 웃을 수 있다. 우울함과 슬픔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그렇게 달래어 다시 누른다. 펑 터지지 않게. 그리고 식사. 함께, 아니면 혼자서.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가. 어떤 식사는 방점이 된다. 이 모퉁이를 지나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모퉁이를 찾을 수 없을 때 여기야, 하고 찍어주는.
유이치는 돈까스 덮밥을 먹고, 나는 차를 마시고, 어둠은 이미 죽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 <키친/만월> p. 135
연인을 잃은 두 사람이 먹는 굴튀김 덮밥 (<달빛 그림자> 이 소설의 '남동생'은 유니콘 같은 존재다), 식물이 가득한 거실에서 어제 처음 만난 사람과 아침에 먹는 계란죽과 오이 샐러드 (<키친>), 한밤중에 발견한 완벽하게 맛있는 (밥이 익은 정도와 소스의 적담함을 그렇게 반짝반짝하게 표현하다니) 돈까스 덮밥을 포장해서 가져다주는 것 (<키친/만월> 손꼽게 로맨틱한 장면이 아닌가 한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와 대학식당에서 점심을 나누며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 (<N.P>).
나는 돈까스 덮밥을 먹지 않고 굴튀김도 먹지 않는데 (어릴 때부터 식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기를 먹지 않는다) 저 돈까스 덮밥과 굴튀김 덮밥은 어떤 이상향 같은 게 되어 버렸다. 생각나면 크림 크로켓이나 버섯튀김 덮밥(어째서 라고 물으면 할 말 없다)을 먹는다.
어떤 식사는, 차를 마시는 것은, 일상을 받쳐준다. 떠올려 보면 비누향이 나는 홍차를 같이 꿀꺽꿀꺽 마신 기억뿐 (<키친/만월>)이라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홍차 좋아하지만, 특히 기문을 좋아하지만 얼그레이는 질색인 친구가 있다. 뭔가 화장품을 목에 쏟아붓는 것 같다고 정색하며 싫어한다. 나는 그 향을 좋아하지만 (기문도 좋아한다), 그럴 수도 있지.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보통 저런 이유였던 것 같다. 얼그레이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유대관계가 있을지도.
여름마다 휴가지(가루이자와 였던가)에서 만들어 먹은 파인애플 카레 (<슬픈 예감>). 파인애플, 카레랑 잘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막상 파인애플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카레에 넣어본 적이 없다. 여름에 어울리는 카레, 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계기는 되었지만. 망고를 넣어도 맛있다던데. 하지만 망고는 그냥 먹을 것도 없는데. 카레에 넣을 것 없다. 복숭아를 넣은 카레도 괜찮을 것 같아.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을 일부러 다 찾아 읽지는 않지만, 그냥저냥 적당히 손 닿으면 읽었다. 중학교 때 한국 근현대 소설 전집 같은 걸 읽어서 (집에 있었고, 나는 활자 중독이었다. 저 전집에서 건진 건 박경리 선생님의 <파시> 정도, 그리고 이 쪽 세대 한국 남자 작가 글은 읽지 말자는 다짐 정도. 아 세상에 대한 많은 경계심도 얻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보니 (여전히 그렇다) 고등학교 때는 내내 유럽/아메리카 대륙 작가 (여기라고 지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만 읽다가 거의 처음, 다시 접한 '같은 시대를 사는 여성 작가'의 소설이 <키친>이었다. 그때 내 나이와 아마 감성과, 소설이 잘 맞았다. 꽤 읽다가 시들해져서 이제는 아마 번역된 소설의 반도 못 따라갔지 싶다. 읽다가 흠칫하는 지점이 늘어난 것도 있어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늘 <키친> (같이 수록된 <만월>, <달빛 그림자> 포함) 그리고 <N.P>. 에세이 <바나나 키친>도 괜찮았지. 덕분에 도쿄 갔을 때 칼디에 찾아갔다. 로열 넛츠는 못 샀지만 드립백(커피)은 이것저것 샀다. 마침 핼러윈 시즌이라 핼러윈 블랜드도 있었다. 시노키타자와가 배경인 소설도 좋았지만 이건 사실 스토리보다 시노키타자와 묘사가 좋았다. 어쨌든, <키친>이랑 <N.P>를 가장 아낀다. <N.P>는 그 소재가 - 환상의 소설, 그 소설의 작가, 따라붙는 소문, 주변 인물들, 그리고 치정 - 너무 취향에 때려 맞춘 거라서.
그리고 <암리타>. 미묘하다. 이 글 쓰다가 다시 읽었는데... 신비주의 분량이 버겁다. 맞아 그래서 거리를 뒀던 거다. 살짝 뿌려진 신비주의는 좋지만 그 재료로 메인을 만들어 버리니까 후추와 허브로 만든 케이크 같달까. 그리고 이 소설 주인공(=사쿠미)의 여동생(=마유)의 전 애인 (그리고 사쿠미랑 사귀는)이 쓰레기다. 제발제발제발 저 놈 좀...이라고 읽는 내내 기도하는 심정이었는데 끝까지... 대체 왜 입니까. 정세랑 소설의 무해한 남자 캐릭터에 대비되어 저쪽은 뭐랄까, 괜찮을지도 모르는데 했더니 알고 보니 유해물질.... 더 위험하다.
하지만, <암리타>에는, 그 이후 내 삶에 어떤 저주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가 나온다.
샌드위치는 일상적으로 적당한 것을 먹어서 그런가, '맛있는 샌드위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내 첫 샌드위치는 어릴 때 여행 갈 때 도시락으로 가져갔던 식빵이나 모닝빵에 달걀 감자 샐러드를 넣은 것이었다. 지금도 마음에 뭔가가 부족할 때 만들어 먹는다. 그때 맛은 안 나지만.
covid-19 이전에는 점심으로 보통 샌드위치를 먹었다. 영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적당한 가격/영양에 간단하게 먹으려면 선택지가 거의 없다. 샌드위치외에는 프레타 망제의 수프 정도...? 샌드위치란 대단히 맛이 없기도 힘들지만 (그러고 보니 서브웨이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에서 참치 DNA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기사를 최근에 읽었다. 내가 먹은 건 뭘까...) 그렇다고 대단해! 싶을 만큼 맛있는 샌드위치도 없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없었다. 그저 적당히 맛있거나 먹을만하다 정도. 이건 <암리타>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의 저주인 거다... 심지어 이번에 <암리타>를 다시 읽었더니 그저
... 게다가 샌드위치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을 만큼 맛있었다.
'사실은, 빵이 보통 빵이랑 좀 달라요, 후후후. 늘 특별하게 부탁해서 굽거든요'.
- <암리타>, p. 258
이 정도의 묘사뿐이네...? 사이판의 "코즈미즈 샌드위치"라고 위치(?)까지 있어. 나는 이걸 왜 "어디에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암리타에 나오는 샌드위치"라고 기억하고 있는 걸까.
속재료가 전혀 나오지 않아서 아마 그래서 상상력은 더 자극되어서? 소설의 그 상황의 묘사가, 배경이, 너무 반짝거리고, 내 기억은 있지도 않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같은 수식어를 붙여서 환상의 샌드위치 가게를 만들었고... 그리고는 그 이후로 내내 샌드위치를 먹으며 종종 생각한 것이다. 그 <암리타>의 샌드위치는 어떤 걸까 하며.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20대의 나는 아마 그런 분위기 같은 게 좋아서 ('마유의 미소' 같은) 어쩌면 샘이나서, 가장 일상적인 샌드위치만 기억해 버렸을지도.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 드라마가 한 때 식사 메이트였는데 (그 전에는 Joan Hickson의 <미스 마플> 시리즈였다) 여기 나오는 샌드위치/수프 가게를 보면서도 <암리타>의 샌드위치를 생각했다. 둘 다 맛있는 샌드위치를 팔겠지. 사실 이 드라마에서는 오믈렛 샌드위치 (타마고 산도 라던가)가 제일 맛있어 보이긴 했다. 그 뒤에 가끔 파는 곳을 찾아서 먹었는데 꿈꾸던 그 맛이 아니었다. 이래서 활자의 맛이 무섭다. 뭔지는 아는데(?) 현실에 없지.
샌드위치이이이이 (엉엉) 하다가, 결국, 간단하지만 은근 손이 가고 간을 잘 맞추지 못하면 맛이 확 떨어지는 오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나는 오이를 얇게 써는 게 싫다. 영국 전통 애프터눈 티 따위 (흥). 적당히 썰어서 소금을 뿌리고 키친타월(쓸 때마다 좀 죄책감이 들지만)로 적당히 눌러서 물기를 빼 준다.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식빵에 크림 치즈를 바른다. 오이를 올리고 (소금 털어내는 거 잊지 말고) 식빵도 마저 덮고 꾹꾹 누르고 좀 놔둔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적당히 맛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는 어떤 걸까.
키친 (만월/달빛 그림자),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옮김, 민음사
암리타 (멜랑콜리아/암리타/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옮김, 민음사
N.P,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옮김, 북스토리
슬픈 예감,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옮김, 민음사
바나나 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옮김, 민음사
안녕 시모키타자와,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옮김, 민음사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민음사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무레 요코 (소설) / 오기가미 나오코 (드라마/감독)
How to make the perfect cucumber sandwiches (the guardian)
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13/jun/13/how-to-make-perfect-cucumber-sandwiches
Subway's Tuna Sandwiches (Independ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