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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 Nov 18. 2021

오래된 신, 성인 saint, 떠도는 영혼

미시마야 괴담 시리즈, 미야베 미유키

엄마 (Mum), 할로윈이 먼저, 그리고 추수감사절, 그 다음이 크리스마스!

길에서 흘려들은 다른 사람들의 대화는 가끔 꽤 오래 기억에 남는다. 10년도 더 전, 10월 뉴욕 파머스 마켓에서 어린 소년이 심각한 얼굴로 자기 엄마를 올려다보며 차근차근 알려주듯 말하는 것을 지나며 들었다. 귀여워서인가 기억에 남았다. 아마 호박이 가득했던 것 같고, 아이 어머니는 할로윈과 추수감사절 순서를 바꿔서 말했던가 아니면 성급하게 크리스마스 장식에 대해 이야기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아이에게는 세상 심각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할로윈 (10월), 추수감사절 (11월), 크리스마스 (12월). 각 달마다 축제 하나씩 거치고 나면 새해. 그리고 봄이 온다. 영국으로 이사 오고 저 축제들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달았다. 반짝거리는 장식을 달고 거리를 꾸밀 핑계가 필요했던 거야. 뭔가 흥겨운 분위기를 조성할... 미국 동부-북부는 춥고 눈이 진저리 치게 내리지만 그래도 일조량은 괜찮은 편이어서 크게 못 느꼈는데 영국 와보니 반짝거리는 뭔가를 거리 곳곳에 달아야지 그거라도 없으면... 싶다. 여기는 추수감사절이 없으니 9월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이 등장한다. 요즘은 할로윈 장식으로 시작하는 곳이 많아졌지만.


나는 언제나 호박(pumpkin)이랑 할로윈을 연관 지어 생각했는데, 그건 10월의 마지막 날이지. 추수감사절은 그 뒤에 오고... 11월, 11월의 셋째 주? 어쨌거나, 할로윈은 10월 31일이지. 할로윈 다음이 뭐더라? 위령의 날 (All Soul's Day)? 파리에서 다들 성묘를 가서 꽃을 장식하는 날이지. 딱히 슬픈 느낌은 아니었는데. 아이들도 가고 즐거워하던걸. 꽃 시장에 가서 예쁜 꽃을 잔뜩 사는 거지. 파리 꽃 시장만큼 꽃이 예쁜 곳이 또 있겠어.
... ...
그리고, 위령의 날이랑 묘지 다음에는... 모든 성인의 날 (All Saints' Day)이 있지, 그런가?
- 아리아드네 올리버 <할로윈 파티>, 애거서 크리스티.

아니에요 아리아드네... 모든 성인(11월 1일)이 먼저고 그다음이 위령(11월 2일) 이라고요. 할로윈, All Saints, 그리고 All Souls. 할로윈때 오래된 것들을 모으고 (제물은 호박) 성인(saint)들을 모아서 눌러버리고 안심한 영혼까지 부른 다음 한 번에 제령(...?) 하는 건가. 너무 동양적인 사고방식인가.


신이든 인간이든 대개 마음이 있는 존재라면 언제가 가장 쓸쓸할까
- 달아나는 물 <안주>, 미야베 미유키


해마다 할로윈-모든 성인의 날-모든 영혼의 날 을 나름 기념한다. 보통은 뭔가를 골라서 읽는다. 호박 디저트를 먹으면서. 동네 도넛 가게에서 호박잼이 들어간 도넛 한정판을 샀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할로윈 파티>를 다시 읽을까 했는데 이 소설은 파티가 중요한 거지 할로윈이 딱히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마야 괴담 시리즈가 생각났다. 읽을까. 미미 여사님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작가인데, 어쩐지 읽은 게 별로 없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잘 안 읽게 되었을 무렵 번역이 쏟아져서 그런가. <우리 이웃의 범죄>는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읽을거리는 마음의 양분이 되고, 사람을 치유하고 격려하는 효용이 있다고 믿고 있다. 예전에 자신도 서책에서 위로받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흔들린 적은 없다.
- 기이한 이야기 책 <금빛 눈의 고양이>, 미야베 미유키

사는 것이 암담하고 한 치 앞의 앞 날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때 미스 마플 시리즈와 피터 윔지 시리즈를 열심히 읽었다. 우울할 때 추리소설이라니 싶지만 도로시 L. 세이어스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 때, 힘들어서 피터 윔지 시리즈를 써서 도피했다고 했다 (그런데 출처를 못 찾겠다). 피터 윔지는 대척점에 있으니 (여러모로). 공작 (Duke)의 둘째 아들, 머리 좋고 운동신경도 좋고, 심지어 미뢰조차 우월하고 (와인 테스팅하는 단편은 이건 와인 소재로 하는 무협지 같은 건가 싶더라) 전쟁에 참여했다 데려온 부관은 완벽한 집사(butler)로 모든 일을 보조해준다. 런던 피카딜리에 플랫을 가지고 있고, 물려받은 재산 잘 굴려서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남자. 그런데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쓰면서 대리 만족이 되긴 할까. 얄밉지 않나(...?) 해리엇 베인 (피터 윔지 시리즈 중 <맹독>에 처음 나오고 그 이후로 계속 나온다. 추리소설 작가. 이 캐릭터 처음 읽었을 때 DLS님 그렇게 자기 소설에 들어가고 싶으셨습니까 라고 물어보고 싶었다)도 사는 게 힘들 때는 비극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이것도 출처가...).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도, 마음의 위안이 되고 살아가도록 밀어준다.


에도 미시마야에서 오치카는 괴담을 듣는다.


"친오빠처럼 대하며 같이 자란 소꿉친구가, 역시 소꿉친구였던 약혼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같은 일을 17살에 겪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집안끼리 얽힌 일도 있고 주변의 2차 가해도 무섭다. 그나마 오치카는 에도에서 주머니 장사(가게 이름이 "미시마야"다)로 성공한 숙부 이헤이의 집에 머물게 된다. 비극이 벌어졌던 고향과 꽤 떨어져 있고 숙부와 숙모 모두 다정하다. 사촌 오빠들도 오치카를 아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건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숙부의 바둑 친구가 자신의 기이한 이야기 - 역시 비극 - 을 오치카에게 들려주고 (아무래도 서로 모르는 사이여서 가능했겠지) 그 이야기를 듣고 오치카는 자기가 겪은 일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과거에서 조금 빠져나온 것이다. 이헤이는 그런 오치카를 도와주기 위해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한다.


괴담 자리의 규칙은 "화자는 말하고 버리고, 청자는 듣고 버리는" 것.


괴이한 이야기도, 슬픈 이야기도, 찝찝한 이야기도, 어쨌든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즐거운 이야기도 있다. 오치카는 마냥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을 해결하려고 여기저기 다니기도 하고 여러 사람과 엮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비극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아가기 시작한다. 시리즈 5권째 (<금빛 눈의 고양이>)에서 괴담을 듣는 사람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오치카에게는 이제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이헤에는 오치카에게, 괴담을 모으는 건 괴이한 이야기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모으는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
- 안주 <안주>, 미야베 미유키


친오빠 같던 같이 자란 소꿉친구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약혼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폭풍의 언덕>의 삼각관계가 생각났다. 히스클리프-캐서린-에드거 인간관계 자체는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니까. 하지만 캐서린(=오치카)이 착실하고 이성적이고, 히드클리프 (여기서는 친오빠 같은 같이 자란 소꿉친구)가 착하고 독기가 없으니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가 버린다. 그러고 보니 <빙점>에서 요오꼬가 고등학생 때 <폭풍의 언덕>을 읽고 캐서린과 히드클리프의 격렬한 사랑을 부러워하는 장면에서 ??? 싶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깨달았는데 나에게 <폭풍의 언덕>은, 히드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과 복수, 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자의 분노와 복수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다. 헤어튼에게서 교육을 박탈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이건 샬롯 브론테의 분노가 아니었을까. 그 악명 높은 기숙학교에서 언니들이 죽어가는 것을 봐야만 했던 소녀의 분노.


오치카의 이야기도 그렇다. 오치카의 본가는 역참에서 여관을 한다. 어느 눈 내리는 날 어린 소년을 구조했고, 그 소년은 오치카와 오치카의 오빠와 함께 자란다. 이 '히드클리프'는 착하고 독기가 없어 힌들리에 해당할 오치카의 오빠도 처음에는 질투하고 폭력을 휘두르다가 결국 잘 지내게 된다. 오히려 그 폭력성은 '에드거'인 오치카와 오치카 오빠의 소꿉친구이며 후에 오치카의 약혼자 (다른 여관 후계자)가 되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 <폭풍의 언덕> 에드거라고 성격이 좋냐면 그것도 아니지만. '히드클리프' 소년은 배우를 해도 좋았을 거라고 오치카가 묘사할 만큼 아름답고, 똑똑하고 일도 잘한다. 그리고 오치카의 가족은 소년을 착취한다. 우리가 네 목숨을 구했으니. 이 소년의 앞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는 것도 없다. 그냥 말뿐. 대체 언제까지 목숨 값을 내어줘야 할까. 모든 일이 지나고 오치카가 생각했듯이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아꼈다면 그 소년의 미래를 생각해줬어야 했다. 여관에는 일손이 늘 필요하고 소년은 일을 잘하고 영리하고, 심지어 돈도 들지 않는 일꾼이고... 직접 때리지 않는다고 학대가 아니라 할 수 있나.


슬픔은 나아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 기이한 이야기 책 <금빛 눈의 고양이>, 미야베 미유키


"낮에 켜져 있는 사방등" (<삼귀>) 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남자, 가 취향인 것을 보면, 오치카는 약혼자였던 사람을 그닥 좋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시리즈의 시작인 <흑백>에서도 계속 생각하는 사람은 독기 빠진 히드클리프인걸.



<Hallowe'en Party> Agatha Christie (대충 번역은 나), Harper Collins

<Strong Poison> Dorothy L. Sayers, Open Road

미시마야 시리즈 (<흑백>, <안주>, <피리술사>, <삼귀>, <금빛 눈의 고양이>, <눈물점>)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빙점> 미우라 아야코

<폭풍의 언덕> 샬럿 브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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