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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 Feb 08. 2022

산책하러 갔다가 시장도 가고

Bath Farmer's Market 

생각할 것이 있으면 걷는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을 거듭하다가 뭔가 안 되겠다 싶으면 나가서 걷는다. 걷다 보면 뭔가 아이디어가 떠 올라서 급하게 돌아오기도 하고. 요즘은 폰에다가 메모장에 적는다. 이제는 보이스 메모 기능도 써 봐야 할 것 같은데. 판데믹 전에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서 산책하기에 좋은 동네에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맨해튼은 참 좋은 곳이었지. 좌표찍듯이 찾을 수 있으니 길 잃기도 쉽지 않고 그렇지만 또 중간중간에 골목이 있어서 소소하게 재미있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길치인데 (정확히는 방향치) 같은 길을 여러 번 가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인 것이다. 재미있어 보이는 골목이 있으면 위험도를 측정하고 (쎄함은 과학입니다) 들어가 본다. 그런 식으로 작은 가게, 카페나 예쁜 화단을 찾았다. 하지만 방향치라서 결국 길을 잃는데 (보통은 가야 할 곳과 정확히 반대쪽으로 가고 있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서 괜찮다. 나는 방향을 잃어도 세상당당해서 (친구들이 매번 속는다. 길 알고 가는 줄 알았다고)...


어쨌든. 작년 11월쯤 생각할 것이 있었다. 드물게 일 관련이 아니라 좀 더 사적인. 이런 것일수록 그냥 앉아서 가만히 곱씹는 것은 좋지 않다. 호르몬이나 환경(예를 들어 날씨...)의 영향으로 나중에 후회할 결정을 내릴 수가 있으니까. 좀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봐야 한다. 그래서 좀 걸을 까, 아직 안 가 봤던 Stratford-upon-Avon (셰익스피어 동네)이나 가 볼까 하며 기차를 검색했더니 편도 3시간 반 정도. 하루 숙박도 내키지 않고 산책 좀 하겠다고 그렇게까지... 하며 지도를 들여다보니 기차로 10분 거리에 Cotswolds (코츠월드) 경계에 걸쳐있는 Bath (바스) 가 있지 않은가. 바로 근처인데 5년 넘게 살면서 3-4번 정도 가 봤나 싶을 정도로 홀대하고 있었다. 런던은 어떨 때는 한 달에 두 번도 갔다는 걸 생각하면. 


바스 정도 크기의 도시면 (게다가 관광지) 분명 Farmer's Market (파머스 마켓) 이나 빈티지 시장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서 검색하니 마침 토요일마다 서는 파머스 마켓이 기차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다. 5년간 살면서 몰랐다고 나야...? 아침 9시 반에서 오후 1시 사이에만 여는 것을 보니 여긴 진정 동네 사람들의 파머스 마켓이겠다 싶어서 가서 둘러보고 근처 좀 걷지 뭐 하고 적당히 계획을 세우고는, 정말 놀랍게도 그 다음 날 (토요일) 부지런하게 일어나서 아침부터 바스에 갔던 것이다. 


맨해튼에서 살았던 동네에서는 아마 수요일마다 파머스 마켓이 열렸던 가 그랬다. 특이한 잼 같은 것도 좋았지만 가장 자주 샀던 것은 키쉬나 애플파이 그리고 호박파이. 거기서 사 먹었던 애플파이는 영국 와서는 비슷한 것을 못 찾았다. 나라마다 애플파이가 꽤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지. 호박파이는 더 그렇고. 핼러윈쯤 되면 매년 호박파이가 그리운데 또 막상 만들 생각은 별로 안 든다. 


바스 파머스 마켓은 규모도 아담해서 딱 동네 파머스 마켓이다. 예를 들어 런던의 Old Spitalfields Market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 은 재미는 있지만 너무 커서 여기는 관광지구나 싶으니까. 내 기준으로 10년 전 맨해튼 Union Square Farmer's Market (유니온 스퀘어 파머스 마켓) 은 아슬아슬하게 동네 마켓이다. 바스 파머스 마켓은 종목당 부스 하나. 예외로 키쉬와 파이를 파는 부스가 두 군데였던가. 아침 10시 반-11시 사이쯤 도착해서, Sourdough 빵을 파는 가게는 몇 종류 안 남았길래 작은 바게트(헤이즐넛이 들어간)를 사고, Seven Hills라는 바스와 로마시대 유적지를 연결하는 것 같은 이름의 초콜릿 가게 부스에서 트러플 초콜릿이 6개에 £4.95 길래 어라 왜 싸지, 하면서 사고, 맛있어 보이는 키쉬가 몇 개 안 남았길래 하나 사고 (토마토+모차렐라. 스콘은 다 팔렸었던), 향초 가게를 별 생각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나이 지긋한 여성분이 조용조용히 이 가게 향초가 그렇게 좋다고 이야기해 주셔서 (세상 어디에 가서든 나이 지긋한 여성분이 조근조근 알려주는 것은 꼭 경청해야 한다. 근사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선반에서 가장 맛있는 마멀레이드 브랜드를 알려준다던가.) 하나 구입하고, 하다 보니 꽤 짐이 무거워졌다. 

길 가다 저런 구조물이 있어서... 극장인 듯.

이럴 계획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며 빠져나와서 거리를 좀 걸었다. 공원도 예쁘고 Herschel (허셜) 박물관도 찾아내고 (걷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이정표가 있었다), 에스프레소가 엄청 마음에 드는 카페도 찾았고, 런던에 있던 Persephone books (페르세포네 서점. 여성 작가 전문 서점) 이 바스로 옮겼다는 것도 알아내고... 나 왜 여기 자주 오지 않았던 걸까요. 이 전에는 이렇게 취향에 맞는 동네가 아니었는데. 아마 그 전에 왔을 때는 관광지 (예를 들어 Roman Bath) 위주로 가서 그랬나. 


바스하면 보통 제인 오스틴이랑 메리 셸리지만, 왠지 걷다 보면 캐서린 맨스필드 (뉴질랜드 사람이지만!)의 <가든파티>가 생각난다. 그렇다, 이 단편소설은 내가 어렸을 적 무던히도 좋아하던 소설이다. 그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는 버터 바른 빵(!), 분홍빛 칸나, 크림 퍼프(!!) 그리고 금빛 데이지 장식 검은 벨벳 모자(!!!)에 꽂혀서... 저 모자는 그 이후 내 취향의 일부분에 기여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번역은 금빛 국화 장식이었던 것 같은데 원서로 보니 데이지 (내가 상상하던 모자는 커다란 금빛 국화를 두어송이 얹은, 새카만 벨벳 리본이 하늘거리는 모자였단말이야. 왜 데이지... 너무 이미지가 달라지쟎아). 어째서인지 바스는 나에게 저 소설의 "가든파티를 준비하는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바스 자체가 작은 편이기도 해서 저 모든 곳이 기차역에서 반경 도보 30분 이내에 적절히 분포하고 있다는 것도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훌륭하다. 

집에 와서 커피를 내리고 초콜릿을 하나 먹는데... 어랏 뭐죠...? 브뤼헤 초콜릿 가게에서 무게 달아 파는 트러플 을 별 기대 없이 먹었던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데요. 영국인의 평균적인 미각에 대해 기대치가 좀 낮아서, 트러플, 어쨌든 초콜릿이니 먹을 만은 하겠지 하고 산거였는데, 왜 어쩌다 필링이랑 가나슈와 겉의 쉘의 조화가 이렇게 멋진 걸까(...?) 살 때도 꽤 종류가 다양해서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약간은 생각했지만 이건 기대치를 그냥 훌쩍 뚫어버렸는데요. 검색을 해 보니 온라인으로는 판 초콜릿만 팔고 오프라인에서 살 수 있는 곳은 바스 파머스 마켓뿐. 


그리고 늦은 점심으로 키쉬 사 온 것을 데웠더니 심지어 이것도 맛있어. 설마 하며 바게트 산 거 조금 잘라서 먹었더니, 나 사워도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건 맛있네...? 


이 파머스 마켓은 바스의 숨은 고수들이 모인 곳인가. 

지난주 토요일에 가서 사 온 것.

그래서? 11월, 12월 그리고 지난주. 1월에는 한국에 가서 못 갔지만 거의 2-3주에 한 번은 갔다. 매주 조금씩 참여 부스가 바뀐다. 금요일에 홈페이지(http://www.bathfarmersmarket.co.uk/)에서 확인할 수 있다. Sugarcane factory라는 디저트 카페 부스에서 마카롱 한 세트와 꾸덕한 말차 케이크를 사 봤는데 얘네도 맛있더라. 드디어 마카롱 맛있는 가게를 그나마 적당히 근처에서 발견한 건가(!) 키쉬 가게의 스콘은 그 후에 살 수 있었는데 (늦게 가면 없음) 역시나 맛있다. 치즈와 허브가 들어가서 짭쪼름한 게 진한 홍차와 함께 아침식사로 좋다. 

산책하러 가서 시장구경도 하고 장바구니를 채우고 공원을 걷는다.

파머스 마켓에서 이것 저것 사고 나와서 걸으면서 찾은 곳


Herschel Museum https://herschelmuseum.org.uk/

그 허셜. 걷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이정표가 있었다. 사실 좀 긴가민가했다. 허셜 철자가 기억이 안 나서. 허셜 남매가 살았던 집을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William Herschel 윌리엄 허셜보다 Caroline Herschel 캐롤라인 허셜에 대해 알게 되어 (박물관 직원도 캐롤라인에 대해 더 열심히 설명했다) 좋았다. 최초의 여성 직업(자신의 일의 대가로 돈을 받은) 과학자. 그 시대 (18-19세기) 여성이 전문직을 가지려면 그 분야에서 일하는 가족에게 배우는 방법뿐일까. 캐롤라인은 형제를 따라 이주해서 집안일을 관리하고, 음악가, 천문학자 조수로 일하며 여러 발견을 남기고 Royal Astronomical Society (영국 천문 왕립학회)에 명예 회원으로나마 이름을 올렸다. 


Persepone Books https://persephonebooks.co.uk/

여성 작가 전문 서점. 런던에 있었는데 어느새 바스로 옮겼더라.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책도 좋지만 서점도 멋지다. 


Colonna & Small's https://colonnacoffee.com/

에스프레소가 맛있다. 입구에서 안 쪽으로 들어가면 공간이 꽤 있다. 팬데믹만 지나면 좀 느긋하게 앉아있고 싶은 카페. 여기 마카롱이랑 브라우니도 괜찮아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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