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드롭, 크로커스, 수선화, 겨울 벚꽃(!) 그리고 헬레보어
<비밀의 화원>에서 메리가 황야(moor)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장면을 좋아한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며 그저 아무것도 없이 죽은 듯했던 황야가 깨어나고 메리는 그 아름다움을 알아가며 애정을 배운다.
밤 동안 폭풍우가 지나가며 회색 안개와 구름을 걷어내었다. 바람도 차츰 가라앉아 맑게 갠 새파란 하늘이 황야 위에 높게 걸려 있었다. 메리는 하늘이 그렇게 파랗게 빛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 <비밀의 화원> 7장.
2월은, 소란스럽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하늘은 이리저리 움직인다. 계절은 한 번에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으니,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조금씩 나아가다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
한국의 2월은 한없이 겨울에 가까웠는데 - 꽃샘추위 같은 예쁜 말도 있고 - 영국에서 살면서 2월은 '이제, 드디어!' 다.
영국은 언제나 비가 오거나 언제나 흐리고 어두울 거라고 생각했어.
- 메리 레녹스 <비밀의 화원> 7장
나는 10월이 되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해 지는 시간이 빨라지는 게 가속도가 붙으니까. 흐린 것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낮 시간이 짧은 것이 싫다. 나는 심한 근시라서 어두우면 잘 안 보인다에, 뭔가 없는 것을 봤다고 착각해서 (있는 것을 못 보거나) 흠칫하는 일까지 더해진다. 11월이 되면 가파르게 해 지는 시간이 당겨지고 (해 뜨는 시간은 늦춰지고) 12월이 되어 동지에 다다르면 그 정점을 찍는다.
그러니 2월이 되면, 아 이제 이 굴 밖으로 나갈 때가 온 거야 싶어지는 것이다. 오후 4시가 되었는데 캄캄하지 않아!
영국에 살면서 새롭게 감탄하는 것 중 하나는, 해양성 기후라는 게 굉장하다 - 는 거다. 바다의 온도가 이런 영향을 끼치는구나. 낮 길이가 이렇게나 짧아질 정도로 위도가 높은 곳인데 최저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은 드물다. 겨울마다 시베리아의 축복을 받는 나라에서 살다 온 사람은 그저 놀라울 뿐. 이 나라의 겨울은, 비가 내내 내리고 기온은 영상에 머물 때가 많으니 녹색이 꽤나 눈에 띈다. 이끼도 많고. 저런 곳에도 이끼가 자랄 수 있구나 하고 엉뚱하게 감탄할 때도 있다.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은, 2월은 위험한 때이며, 서리 (black frost), 햇볕, 습기, 가뭄 그리고 바람으로 정원사를 위협하는 때라는 것이다. 이 가장 짧고, 혼란하고, 널 뛰는 듯 정신 사납고 어쨌든 믿을 수 없는 달은, 교묘한 재주로 모두를 압도하니 경계해 마땅하다. ...... 대체 우리 정원사들이 뭘 했다고?
- <The Gardner's Year> p. 15
이어서 카렐 씨는 2월이 그래도 봄의 시작을 알려주기는 한다며 - `나비 같은 것은 믿을 수 없다. 걔는 작년 마지막 나비다' - 봄의 징조들 중 몇 가지로 크로커스와 스노우드롭을 든다.
2월이면 낮 최고 기온이 섭씨 10도 정도가 된다. 중간에 폭풍도 오고 (올 해는 두 번 연속) 우박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리고 동네 여기저기가 서서히 깨어난다. 시작은 당연히 하얗고 댕글댕글한 스노우드롭. 그리고 크로커스. 스노우드롭이 등장하면 나는 설렌다. 선명하게 하얀 스노우드롭이 톡톡 떨어진 것처럼 피어나면 아직은 좀 칙칙한 잔디의 녹색도 밝아 보인다. 노랑, 보라, 가끔 흰색인 크로커스가 같이 어우러지면 저기만 이미 봄이다 싶게 화사하다.
...... 그 어떤 당당히 뻗은 야자수나 지식의 나무, 영광스러운 월계수도 이 하얗고 섬세한 잔 모양의 꽃이 창백한 줄기에 의지해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 <The Gardner's Year> p. 17
그리고 이제 수선화가 가득 깨어난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는 아마 꿀 같은 황금빛을 머리에 지니고 옥 같은 녹색 눈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 정도는 해야 수선화가 나다! 하고 주장해도 부끄럽지 않겠지. 그래도 동쪽나라 출신은 금잔옥대(金盞玉臺)를 먼저 떠올린다. 저 잔에 따를 술이라면 역시 맑은 증류주, 아니면 색에 맞춰 미드(꿀술)?
동네 공원에 있는 벚꽃 종류는 내 막눈으로 봐도 4종류는 넘는 것 같은데
https://brunch.co.kr/@minjbook/41
그중 제일 작은, 거의 하찮게(미안...) 보이는 가냘픈 꽃을 피우는 벚나무가 있다. 얘는 가을에도 핀다. 가끔 겨울에도. 11월에 벚꽃이 피었길래...? 뭐지...? 하고 찾아봤는데 정당하게(?) 그 시기에 피는 벚꽃이었다. Prunus x subhirtella `Autumnalis Rosea' 장미봉오리 벚꽃(rosebud cherry) 이라고도 하던데, 꽃에다가 다른 꽃 (그것도 봉오리) 이름 붙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나는 그냥 겨울 벚꽃이라고 부른다. 11월에도 피고 조금 날씨가 온화하다 싶으면 겨울에도 피고, 2월쯤이면 좀 더 분홍빛을 띄는 꽃을 피운다 (가을/겨울에는 좀 더 하얗다).
이 온도 마음에 들어, 하면서 꽃 피우는 것 같아서 좀 멋지지 않나 (나무에 좀 이입했다). 이 벚꽃은 아직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는 다른 벚나무들 사이에서 홀로 화사하다.
올해 인식하기 시작한 꽃은 헬레보어(Hellebore). 크리스마스 장미, 겨울 장미, 사순절 장미라고도 한다는데, 딱히 장미랑 가까운 건 아니다. 독성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다가 가게에서 이름표를 보고 아 얘가 헬레보어인가, 어디서 봤는데? 했는데 동네 공원에 있었다.
...... 이 식물은 모든 부분에 다 독성을 가진다. 수액은 피부에 자극적이고, 섭취하면 입안이 화끈거리는 증상이 나타나고, 구토, 어지럼증, 신경계 우울증, 발작을 일으킨다. 고대에는 약으로 사용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에 대한 가설 중 하나로 헬레보어를 약으로 복용, 중독되었다는 것이 있다. 키르하(Kirrha) 공방전 (the first sacred war, 595 - 585 BC)에서 델포이 연합군이 키르하의 수원에 헬레보어를 풀어 키르하 시민들을 중독시켜 승리하였다고 일부 역사가들은 믿고 있다. 화학무기가 전쟁에 사용된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 <Wicked Plants> p. 118
3월이 오고 해가 더 길어지면 산책길은 더 화려해지겠지만 (제비꽃이 필 거야) 2월의 아기자기하고 어쩐지 쓸쓸하지만, 그 와중에 또 기쁜, 그런 분위기는 서서히 사라진다.
<The Secret Garden> Frances Hodgson Burnett, Digireads.com Publishing (2019)
<The Gardner’s Year> Karel Čapek, Dove edition (2017)
<Wicked Plants> Amy Stewart, Timber Press (2021)
(한없이 대충 한) 번역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