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실제의 경계
제임스 야페 (James Yaffe)의 <My mother, the detective> (나의 탐정 어머니, 정도로 번역되려나)는 NYPD의 형사가 주말에 뉴욕 브롱크스의 어머니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어쩌다 보니) 사건을 갖다 바치게 되는(?) 추리소설 단편집이다. 정말이지 안락의자 탐정의 모범적인 예 같은 분인 '어머니'는 뭐 이런 걸, 하는 느낌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어머니'는 본인의 어머니가 더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이) 훌륭했다고 하는데, 아니 아들은 왜 그 재능을 한 톨도 물려받지 못했나요. 이 단편집은 프리퀄인데 장편 쪽은 한 권 읽고 전혀 취향이 아니라서 접었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줬다가 분명 돌려받았는데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한 남자가 저택 옥상에서 떨어졌다. 죽기 전 남자는 떨어지기 전에 같이 있었던 유일한 사람인 조카 (5세, 남자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왜...?"라고 중얼거렸다. 남자는 사고로 떨어진 걸까, 자살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 5살 조카가? - 이 남자를 밀었을까?
이 단편 (제목도 기억이 안 남. 5살이 맞던가..? 내 책 어디 갔어...)에서 '어머니'는 설명한다: 5살 아이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그 5년간 경험한 것뿐이다. 그 아이에게는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세상이다,라고.
아이들은 자신이 자동차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른이 '당연히' 아는 것을 아이도 알 것이라는 기대는 위험하다. 아이들은 고작 몇 년 정도만 이 세상에서 살았고, 심지어 그중 1년은 누워서 아주 한정된 정보만 받아들였다. 앞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아이들은 주변을 관찰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학문의 시작도 비슷했겠지. 철학이나 수학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계산한다거나), 신화와 전설... 다들 자연현상을 풀어서 써 보려는 시도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역사수업은 종종 가게(서점)에서 잡히는데로 읽어 알게된 것들을 건드리고는 했다. 샤를마뉴? 나는 생각했다 '나의' 샤를마뉴? 서점의?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평소에는 완전히 분리되어있던 두 세계가 어느 한 부분에서 만나는 것에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곤 했다.
- p. 14/15 <The Thirteenth tale>
가끔, 어렸을 때의 나는 읽은 것과 관찰한 것을 어떻게 구분했었던 걸까 하는 작은 의문이 떠오른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살면서 동화나 소설, 심지어 오래된 전설까지 유럽의 것을 주로 읽었는데. 오렌지를 가르면 아가씨가 나오는 (물을 주세요!) 남유럽의 동화가 장미전쟁이나 십자군보다 어렸던 나에게 현실에서 더 멀리 있을 이유가 있을까.
내가 '직접' 알고 있는 것이라도 다른 문화 (주로 유럽)에서 품고 있는 의미가 다양해서 내가 읽은 것이 그것이라는 인식이 늦을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장미.
고대 그리스인들이 정원 장미 (garden rose)을 '만들어'냈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기술/예술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사랑, 음주, 그리고 죽음을 찬미하는 꽃을 우리에게 남겼다.
- p. 18 <The Rose>
내가 '읽어서' 알고 있는 장미는... 처음은 역시 안데르센이겠지. <눈의 여왕>에서 장미는 마녀의 정원에서 게르다의 기억을 되살리는 열쇠다. 카이의 심장에 박혀있는 거울 조각을 녹이기 위해 게르다가 불렀던 노래에도 장미가 등장한다. <장미 요정>에서는 장미의 요정이 연인들의 복수를 돕는다. <돼지치기 왕자>에서 장미는 그 음침하기 짝이 없는 왕자의 선물이다. 장미가 나오지 않는 안데르센 동화가 있기는 하던가... <인어공주>에서도 나왔던 것 같은데.
겨울이고 장미 덤불은 앙상했지만 피처럼 붉고 눈처럼 하얀 장미 몇 송이가 피어있었다.
- 68. Yes <Jonathan Strange and Mr Norell>
영원, 사랑, 고귀함, 정결, 때로는 애욕을, 화려함을. 그리고 비밀을.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꽃.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고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꽃은 난초나 국화, 모란, 벚꽃, 동백...이라고 기억한다. 물론 월계화가 사랑받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장미가 가지는 위상을 생각하면, 문화와 꽃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재능 있는문인들 (또는 정원사, 사상가, 예술가, 식물학자...?)+ 우연일까.
장미는 공룡 이후, 하지만 인류보다는 훨씬 이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다. -p.3 <The Rose>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과정은 도미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지식이 쌓이다가 어느 조각이 툭 하고 맞아떨어지는 순간 다른 것들이 주르륵하고 펼쳐지면서 '알게'된다. 뭐든 그 조각이 될 수 있다 - 이미지나 경험 같은 것도.
그러니까, Queen Mary's Garden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장미 정원은 19세기 초반의 두 가지 현상이 합쳐진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 가지는, 장미 품종이, 중국계 품종과 교배에 성공한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장미를 비롯하여, 매우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특히 영국에서, 예쁘게 깎은 잔디나 잘 관리된 자연풍경식 정원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원 취향이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 p. 336 <The Rose>
더 크고 화려한 장미 정원도 많지만 이 장미 정원은 내가 런던에서 처음으로 반했던 곳이다. 1932년쯤 만들어졌으니 그렇게 오래된 정원은 아니지만. 이 동그란 형태의 장미 정원에 처음 갔을 때, 아 여기 사람들의 장미는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형태와 색, 하나씩 붙은 이름. 이렇게 한 가지 꽃 - 장미 -으로 다채롭고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더 오래된, 일상에서 조금 떨어진 장미에 대한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훌륭한 무신론자로 자랐지만 어릴 때에는 성당에 다녔다. 할머니, 어머니와 산책 삼아 넓은 성모당이며 성직자 묘지를 걸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예쁜 추억이다. 성직자 묘지,라고 하니 왠지 을씨년스러울 것 같지만 밝고 화사하고 예쁜 곳이었다. 그리고 장미가 꽤 다양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장미와 오래된 묘비는 잘 어울리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영국으로 이사 오고 난 후, 매년 꼭 QMG에 장미를 보러 갔는데 2020/21에는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이 습관도 깨어졌다. 올해도 어쩌다 보니 아직 못 갔다. 뭐, 그 대신(?) 브리스톨에서 장미가 예쁜 정원을 산책했다.
Temple Church.
외벽/기둥만 남은 성당기사단 교회. 거기에 장미 정원... <푸코의 진자>와 십 대의 일부를 보낸 사람은 우와 이게 다 뭐람 싶다. 작년에 우연히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계절에 맞춰 가게 되었다. 그 전에도 여러 번 산책했지만 여기 장미가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지.
사실 이 글은 작년 (2021년 6월쯤)에 이 정원이 너무 예뻐서 쓰려고 마음먹었던 것인데, 장미 관련해서 찾아보다가 아마존에서 Jennifer Potter의 <The Rose>를 찾는 바람에 책을 읽는데 시간을 너무 들이다가 잊었다...이제 글의 방향성도 완전히 바뀌었지만.
<The Rose>의 저자는 새하얀 다마스크 (Damask) 장미인 Madame Hardy를 보다가 문득, 그 묵직한 향과 아름다움, 장미의 이름의 유래(조세핀 황후의 정원사였던 하디 Hardy의 부인), 역사 같은 것을 생각하다 보니 장미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고 한다 (<The Rose> 서문). 정말 장미라는 주제 하나를 잡고 쎄벼파고 있는 멋진 책이다. 이 책에서는 장미의 유래 (어디에서부터 어떤 식으로 전파가 되었나), 상징성, 관련 역사 (문학, 사건, 예술, 등등), 장미의 용도, 18-19세기 유럽의 Rose Mania, 장미 정원, 그리고 '어째서 장미인가'까지 장미와 관련된 온갖 것들을 다룬다. 내가 이 책을 어떻게 찾았는지도 좀 신기하다. 제목이 워낙 평범해서 그냥 검색해서는 장미에 대한 다른 책들에 묻히던데...
Castle Park Physic Garden
이 정원은 가꾸는 사람들의 애정이 느껴진다. Castle Park는 옛 브리스톨 성의 남은 건물을 중심으로 만든 공원이다. 옛 성의 외벽만 남은 곳을 배경으로 만든 정원이 Physic Garden. 오래된 돌벽과 꽃이 화사하게 어울린다.
보랏빛 장미와 폐허같은 오래된 돌벽.
커다란 분홍빛 장미와 작약.
My Mother, the detective: the complete, James Yaffe, Crippen & Landru Publishers (1997)
The Rose, Jennifer Potter, Atlantic Books (2011)
The thirteenth tale, Diane asetterfield, Atria Books (2006)
Jonathan Strange & Mr. Norell, Susana Clarke, Bloomsbury (2004)
대충한 번역 -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