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토끼를 쫓아가다 깊은 토끼굴 속에 빠진 앨리스의 이상한 모험만큼 다양한 대환장 티파티가 가득한 토육일기의 첫 장을 펼치기에 앞서, ‘여기는 토끼굴’에 나오는 토끼들을 소개한다.
토민, 니니, 토린.
길게는 12년, 짧게는 몇 달. 나와 함께 한 토끼들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 반려동물이란 화제가 떠오르고, 내가 ‘토끼를 키운다’라고 조심스럽게 고백하면, 항상 토끼눈을 하고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다음 말도 예상할 수 있다.
‘근데, 토끼 닮으셨어요.’
맞다 네 번째 토끼도 여기 있다.
닮을 수밖에 없겠지. 나는 토끼굴에 사는 중이니까. 토끼들과 한솥밥 지어먹은 지 13년이니까. 심지어 알게 모르게 내가 먹는 음식 속에, 숨 쉬는 공기 속에, 토끼의 하얀 털, 수염, 긴 속눈썹, 토끼의 발톱이나 몸에서 떨어진 각질 등이 아주 많겠지. 마치 이사할 때 냉장고 밑에서 출몰하는 예상치 못한 물건처럼 생각지도 못한 토끼의 일부를 내가 섭취하고 내 육신의 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토끼들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고, 발바닥이며 엉덩이며 눈가의 눈곱 상태, 물그릇은 잘 비웠는지, 밥은 얼마나 먹었는지, 간식 봉지를 부스럭거리면 달려올 때 뛰는 자세는 문제없는지 살뜰하게 토끼를 돌본다. 그러니 토끼와 안 닮을 수가 없다. 나의 거진 반은 토끼이고 나는 사실 ‘토끼 인간’이라는 새로운 종이다.
토끼를 키우게 된 계기가 있나요? 왜 토끼가 좋은 가요? 굳이 토끼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토끼는 물 마시면 진짜 죽나요? 토끼는 뭐 먹나요? 진짜 당근만 먹어요? 토끼 보러 가도 돼요? 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흡사 다섯 살 난 아이 같이 천진하고 귀엽다. 토끼만큼 깜찍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그들은 대개 토끼와 어릴 때부터 좋은 관계를 이어온 사람들일 것이다. 적어도 한 번쯤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를 들고 토끼와 자신이 뛰노는 들판을 그려본 적이 있고, 생일 때 선물 받은 애착 토끼 인형이 하나쯤 있고, 토끼 꿈을 꿔본 적이, 유치원 체험학습에서 토끼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당근을 먹여 본 기억이 있고, 동화책에서 귀여운 팬시 스티커와 이모티콘 등에서 그들은 토끼를 추억하고 생각하고 토끼를 통해 위안을 얻기도 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끼 오줌과 똥은 냄새 심하지 않나요? 토끼 안 무나요? 토끼는 사람 잘 안 따를 텐데? 토끼 키우다가 공원에 버렸어요. 어릴 때 뒷산 가서 토끼 잡아먹었었는데. 같은 순으로 이어지는 대화도 드물게 있다.
토끼를 키워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로 인해 할 수 있는 말은 참을성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반려동물로서 토끼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중인데, 공감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광고하는 것인지, 남의 기분에 스크래치를 내며 쾌감을 느끼는 괴랄한 취미를 가진 것인지, 자신이 토끼를 식용했다는 이야기까지 굳이 꺼내는 자들에게 나도 한마디 쏘아주고 붙여주고 싶어 묻는다. ‘그쪽은 혹시 뭘 키우시데요?’
설상가상으로 느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나는 토끼 아닌데(?)’라고 말하는 이들을 만나면 깊은 빡침이 올라온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잘도 제공해 주시니… 제 귀를 씻고 싶습니다.’라고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하고 싶다.
살아 있는 존재에 정성을 들이고 애정을 쏟으며 키운다는 건 그 사람의 많은 것을 내어주는 일이다. 수많은 시간과 적지 않은 고정 비용이 든다. 그 수고와 비용을 왜 고양이나 개와 같은 정서적 교류가 더 잘 되는 반려동물이 아닌 토끼에게 쏟느냐 묻는다면, 할 수 있는 말은 사흘 밤도 부족하다.
사실 내가 토끼를 키운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토끼가 ’ 나를 ‘ 키워준 나날과 순간이 더 많다. 토끼는 자라와 용왕님을 속였을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자신의 전부를 주었다. 토끼는 거북이 같은 날 보며 항상 먼저 달려가서 여기까지 일단 와보라고 알려주었다. 토끼는 매일 나와 숨바꼭질을 하고 하루 견과를 하고 소파에서 낮잠을 즐기고 함께 토끼잠을 자며 꿈을 꾼다. 토끼는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모든 것이다.
토끼로 인해 나는 나 자신을 알아간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토끼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토끼의 섭생에 대해서는 구글링을 통해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나는 내가 키우는 토끼를 그냥 토끼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내 토끼’라고 말해버리면 그건 너무 가볍고 귀여워져버리기만 해 버려서 못쓴다. 토끼는 단순히 귀엽다고만 말할 수 없는 신비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
토끼를 키우며 나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토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토끼와 함께 세계의 속성을 이해했다. 토끼는 내게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수많은 신화, 동화, 소설, 그림, 광고 속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토끼는 많은 성질과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토끼든 거북이든 장수풍뎅이든 이구아나든 내가 키우는 한 생명, 한 존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며, 스승이 될 수 있는지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작지만 큰 관계이고, 영혼의 연결성에 대한 이야기로도 확장될 수 있다.
물론, 토끼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귀엽다. 토끼 라고 하면 바로 붙는 형용사는 ‘귀엽다’ 키워드 일 것이다. 다른 것을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다. 눈앞의 토끼는 어떤 표정이어도 너무 귀여워서 입안 가득 왕 하고 깨물고 싶다. 턱 밑에 이마를 비비며 그 귀여움을 내게도 조금 묻히고 싶고 토끼라는 거대한 귀여움의 공동체에 속한 일원이 되고 싶다. 그렇게 토끼는 우리를 또다시 아이처럼 단순하게 만들고 우리의 눈빛을 순하게 만든다.
여기는 토끼로 연대하는 큐티뽀짝한 공동체. 토끼에 미친 토친자의 소굴이다.
토친자여, 어서 만방에 토끼의 ‘큐뽀 바이러스’를 퍼뜨려서 위기에 빠진 인류를 벼랑 끝에서 구원하라.
그리고 그대들은 응답하라.
아아 여기는 토끼굴, 여기는 토끼굴!
가슴에 품은 토끼 한 마리가 있다면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