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이 무성한 노인들이 소일거리를 찾아 집 밖을 나선다. 여기서 소일거리는 돈을 대가로 하는 번듯한 노동일 수도 있고, 사정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친목일 수도 있으며, 그저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나름의 일상일 수도 있다. 장을 보고, 운전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네댓 번 해봤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키오스크와 씨름 하는 것도 노인들에겐 하루 소일거리가 된다.
"그냥 집에나 있지.."라며 혀를 차는 젊은이들에게 막간을 이용하여 주의를 주자면, 당신은 결단코 '예비 노인'이며 노인의 권리와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는 일은 현존하는 최고의 노후대비라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실권을 가지고 있는 젊은 계층이 노인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 토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쓴다면 그들이 노인이 되었을 때 실익을 얻게 될 여지가 많다. 자신들의 미래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괄시하고 조롱하는 언사를 보일 때면 저 사람은 노인이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괄시와 조롱을 견뎌내게 될까라는 생각이 먼저 스친다. 좌우지간 '인간은 죽는다'라는 정언적 명제에 앞서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된다'라는 상투적인 문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집에나 있어야 할' 노인들이 천근의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소위 '노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 사람마다 다른 개개 사정과 그들의 주름만큼 겹친 삶의 굴곡에 빗대어 봤을 때 그런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을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을 터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 말 못 할 이유는 대체로 공감을 받지 못하고 그저 '집에나 있어야 할' 노인의 가벼운 일탈로 치부된다. 물론 그들의 일탈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러한 법적·도덕적 판단을 모두 제하고 오로지 행동분석의 입장에서 '노인이 사회적 노동을 하는 일반적 이유와 그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대해 아르케를 탐하고자 한다.
노인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오롯이 '자존'에 있다. 앞서 암시한 바대로 여기서 말하는 노동은 돈을 받기 위해 행하는 대가성 근로를 포함하여 노인의 정신적·육체적·사회적 에너지 소모를 아우른다. 생계가 어려워 대가성 근로를 하는 경우에는 노동의 목적이 생계유지와 자본축적에 있겠지만 그 또한 '자존'을 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자존은 '자기의 존재'를 뜻한다. 노인들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함이다. 자기 존재를 지킨다는 것은 그저 생리적인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지적이고 인간적인 욕구이다. 노인들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이 그토록 지키려고 애쓰는 '자기 존재', 이른바 자아는 여러 구성 요소와 형성 배경을 지닌다. 단적으로 자아는 이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으로 구성된다. 또, 선천적인 기질과 동물적 본능(id, 이드), 그리고 후천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관계, 이념, 조직, 경험을 통한 사회화 과정(superego, 초자아)의 영향을 받아 지속적으로 형성된다. 그렇게 구성되고 형성된 자아는 개인의 모든 감정과 생각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자아가 곧 '나'이고, 자아가 뚜렷하고 풍족할수록 내가 '나'를 인식하기 쉽다. 자아성찰이 잘 된다는 뜻이다.
노인들이 노동을 통해 자존을 지키려 한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키고자 함이다. 자신의 신체적 건강이나 경제적 여건을 넘어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처절한 방어이다. 인간의 자존은 인간의 본질인 '이성'과 '사회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이성'의 수준이 낮거나(지식이나 감정이 부족한 경우), '사회성'이 약화된 경우 자존 역시 힘을 잃는다. 사회의 중축에 있다가 점차 문화·경제 이면으로 밀려나면서 노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의 가치나 감정의 객관성이 떨어지고 사회성 역시 자연스럽게 약화된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심지어 평생을 갈고닦은) 지식과 역량이 더 이상 무의미하고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어떠한 인간도 이러한 상황에서 자존의 위기를 감내하긴 어렵다.
자존의 위기에 당면한 노인들은 자존을 지키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갈림길에 놓인다. -혹시 주변의 노인이 죽을 날을 받아 놓은 것처럼 매분 매초 무기력한 (죽음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면, 부디 그 인간이 자존을 지킬 수 있게 힘을 불어 넣어주길 바란다. 그것은 노인에 대한 연민이 아닌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자존을 지키고자 하는 노인들은 비로소 노동을 한다. 자신의 사회성이 아직 살아있음을 드러내고, 자신의 지식과 감정을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이를 위해 애써 사람을 만나고 직업을 찾고 사람들이 대화하고 숨 쉬는 곳에 함께한다. 그 모든 것이 에너지 소모이고 자신의 에너지가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아도 어쩔 수 없다. 자존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발악은 형용할 수 없는 중독이기 때문이다.
'집에나 있어야 할' 노인들의 소일거리에 여전히 의문이 든다면 본인의 자아부터 들여다보길 바란다. 언어도 지식도 안 통하고 감정선조차 다른 외국을 여행하다가 차별이나 무시를 당했을 때, 대부분 상심과 분노를 느끼고 고국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거나 언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거나 조력자를 찾아 헤맬 것이다. 노인들에게 혀를 차던 젊은이도 그럴 것이고, 당신도 그럴 것이고, 나도 그럴 것이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상사에게 되도록 잘 보이려고 애쓰고, 각종 SNS로 트렌드를 쫓으며 자기표현도 아끼지 않는 모든 사회적 행동이 '노인의 노동'과 다름없다. 인간은 자존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에서 차별을 받고 귀국을 앞당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차별을 감내하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스스로 깨뜨려 오히려 현지에서 인정을 받으며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만들거나 나아가 사업을 성공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후자의 인물을 치켜세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위험한 외출을 감행하는 혹자의 어머니와 자식들이 다 알아서 하는데도 애써 몸을 움직여 도움을 주는 혹자의 아버지를 보며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