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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예 May 30. 2020

내가 10분 더 일찍 출발했던 이유

헬싱키 중앙역 카렐리안 파이


2011년 겨울은 나에게 유달리 길었다. 느낌상 길었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길었다. 왜냐면 나는 일 년의 반이 겨울인 핀란드에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을 원래도 무척 좋아하고 하얗게 쌓인 눈도 언제나 로망의 대상이었기에 나는 주저함 없이 핀란드로 교환학생을 결정했다. 하지만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겨울엔 해가 거의 안 뜬다는 점과 비싼 북유럽 물가, 그리고 맛없는 핀란드 음식이었다. 


핀란드가 음식이 맛이 없다고 하기에는 핀란드 음식이 뭔지도 사실 잘 체감을 못했다. 슈퍼에는 냉동피자들이 잔뜩 있고 야채 코너에는 스페인에서 수입한 과일 야채들이 진열되어있었다. 특색 있는 음식으론 훈제된 청어, 각종 향신료에 절인 청어들이 있었는 데 미안하지만 이 청어 시리즈는 정말 사 먹고 싶지 않은 비주얼이었다. 학교 급식으로는 당근과 비트가 들어간 샐러드, 요거트, 곡물빵을 기본으로 삶은 미트볼과 감자, 불어 터진 파스타가 자주 나왔는데 이탈리아 친구는 당장 주방장에게 제대로 된 파스타 조리법을 알려주고 와야겠다고 불만을 터트리곤 했다. 2005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는 “영국 음식은 핀란드 음식 다음으로 맛없는 음식”이라며 영국을 비판했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던 핀란드는 맛없는 음식으로 유명세를 타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가져온 조미김과 다시다로 대충 연명했던 핀란드 생활이지만 나에게도 추억의 핀란드 음식이 하나 있다. 바로 카렐라인 파이(karjalan piirakka)이다. 전복을 닮은 생소한 모습의 이 빵은 핀란드 전통 음식 중 하나로 호밀 파이지 안에 우유에 익힌 쌀죽이나 감자를 넣고 구운 음식이다. 내가 이 빵을 사 먹게 된 계기는 이것이 유명해서가 아니었다. 어느 날 헬싱키 중앙역에서 친구를 기다리다 역 안에 있는 조그만 마트의 빵 코너에서 우연히 생김새가 특이한 빵을 발견했다. 그리곤 호기심이 생겨 한번 사 먹어 보았다. 아니 그런데 웬걸 이 파이 안에 익힌 쌀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 그게 그렇게 감동적이었다. 쌀이 너무 부드럽고 따뜻했고 호밀 파이지는 고소하고 바삭했다. 사실 정말 단순하게 고소한 맛이지만 나는 그 맛이 참 좋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맛이기에 핀란드에서 내가 드디어 맛있는 무엇인가를 찾았다는 발견의 기쁨을 느꼈다. 더군다나 비싼 북유럽 물가에 비해 하나에 1유로도 안 하는 이 착한 가격까지 단점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중앙역을 지나갈 일이 있을 때면 10분 더 앞당겨 출발했다.  중앙역에서 카렐라인 파이를 사서 먹는 시간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집에서 대충 식빵으로 때우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따뜻하게 먹는 이 쌀 파이에 비할바가 못됐다. 1유로를 손에 꼭 쥐고 있다가 이 파이 하나를 사는 즉시 마트 앞에서 한입 두입 꼭꼭 씹어 먹었다. 마트에서 따뜻하게 보관을 해둔 건지 내가 갈 때마다 운이 좋아 나온 지 얼마 안 된 파이를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쌀은 자고로 따뜻할 때 먹어야 제 맛이다. 어느 날은 비슷하게 생긴 색이 좀 더 노란 카렐라인 파이를 골라봤는데 한입 먹자마자 내 미간이 좁혀졌다. 쌀이 아닌 감자가 들어있던 것이다. 감자나 쌀이나 비슷할 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감자가 들어간 카렐라인 파이는 그냥 호밀과 감자 맛이었다. 나는 그날 이 쌀죽이 들어간 파이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느꼈다. 쌀이 아닌 감자 카렐라인 파이는 특별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핀란드를 떠날 때 이제 이 맛있는 파이를 더는 못 먹겠다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추운 겨울 해도 뜨지 않는 아침의 중앙역에 홀로 서서 먹던 카렐라인 파이를 한국에 먹는다고 한들 같은 맛이 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가끔씩 이 파이가 생각이 난다. 맛있는 빵과 디저트가 지천에 깔려있는 프랑스에 살고 있지만 그 파이 맛과 비슷한 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내가 다시 핀란드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간다면 헬싱키 중앙역으로 달려가 따뜻한 카렐라인 파이를 한입 베어 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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