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존재

by 최승란

‘애증의 존재’라는 제목으로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곧 미안한 마음이 들어 띄웠던 생각 풍선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다른 누군가를 떠올려 보려 해도 그녀만큼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 분야에서 그녀는 단연 최고다.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태어난 그녀는 한글 이름을 가졌다. 그녀의 부모는 가을에 처음 만나 가을에 결혼했고, 가을에 그녀를 낳았다. 그래서 이름도 '가을'이다.


가을이는 경남 하동 정 씨 가문의 종손, 순방 씨의 첫 손녀로 태어났다. 기대했던 아들은 아니었지만, 가문의 첫 손답게 그녀는 순방 씨의 회갑날에 태어났다.


회갑은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로 세는 간지가 60년 만에 한 바퀴 돌아 다시 태어난 해와 같은 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갑자년’에 태어난 사람은 60년이 지나면 다시 ‘갑자년’을 맞는다.

그녀는 그렇게 순방 씨가 숨 가쁘게 달려온 60년 인생의 끝자락에서, 생명과 가문이라는 무거운 바통을 이어받은 아이였다. 그녀의 엄마는 아버지의 회갑잔치 준비 대신 출산을 선택(?)함으로써, 며느리로서의 큰 부담 하나를 덜었다. 하지만 ‘차라리 상을 차리는 게 낫지’, 종갓집의 회갑날 태어난 손녀는 그날의 주인공을 완전히 대체해 버릴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가을이의 엄마, 승란은 귀가 예민하다. 남편의 코골이로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끝에 몇 번의 단호한 설득 끝에 남편을 수술대에 눕혔다. 그의 콧속에서 늘어진 살과 비대해진 부분을 태우고 나서야 승란은 비로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가을이는 태어날 때부터 놀라운 데시벨의 소리를 무기로 장착하고 나왔다. (나는 그녀가 긴 호흡만 갖춘다면, 쇠를 뚫진 못해도 나무 벽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아이가 울 때마다 승란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히는 듯한 증상을 겪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공황장애에 가까운 증상까지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승란은 소프라노다.
원래부터 목소리가 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년간의 훈련을 거쳐 누구보다도 큰 데시벨과 고음을 구사할 수 있다. 그 목소리는 노래뿐 아니라 부부싸움, 훈육 등 다방면에 활용된다.

가을이는 그런 승란의 배 속에서 만삭이 되도록 그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실제로 가을이 태어나기 6일 전에도 승란은 합창 공연에서 지휘를 했다. 가을이의 목소리와 고집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학 시절, 승란은 ‘안 씨, 강 씨, 최 씨는 고집이 세다’는 이야기를 썸을 타던 남성에게서 들었다. 그 남성은 고집 센 승란을 종종 ‘최 씨라서 그렇다’고 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낀 승란은 이후 누군가의 고집이 세다고 느껴질 때면 ‘안 씨인가, 강 씨인가’ 하며 성을 대입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의 딸, 가을은 ‘정 씨’였다.
“그렇다면 고집 센 성씨는 ‘안 씨, 정 씨, 최 씨’가 맞는 것인가?”
승란은 그렇게 고집 센 딸과 매일 씨름하며 근본 명제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가을이가 만 두 살이 되던 어느 날, 승란과 함께 길을 걷다 길바닥에 드러눕는 사건이 있었다.
가을은 이유 없이 울기 시작했고, 승란은 한숨을 쉬며 곁에 쪼그려 앉아 조용히 말했다.

“일어나자.”


하지만 가을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다가와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 호의는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몇 마디 하다 떠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분은 달랐다. 꽤 오래 함께 앉아 있다가 아이의 겨드랑이를 끼우고 일으키려까지 했다.

하지만 10분쯤 흐른 뒤, 그분은 아이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니 엄마 힘들겠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떠나셨다.


가을이는 유치원에서도 고집 때문에 자주 혼이 났다. 성품 교육에 초점을 둔 유치원이었기에, 두 시간 이상 선생님과 대치하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하원한 적도 있었다. 고집 센 성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정 씨’는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가을을 키우는 동안 승란은 수차례 이석증과 염증으로 병원을 찾았고,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산후우울증을 겪었고,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해야 했다.

가을을 키우는 일은 인생 최대의 난관이었다. 둘째를 낳는다는 건 ‘미친 짓’이라 여겨졌다.

그러던 중, 가을의 친구 엄마들과 작은 기도 모임을 하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우리, 동생 낳아서 함께 키워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놀랍게도 세 가정에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가을의 동생이었다.


가을은 혼자였던 시간이 외로웠는지, 동생을 몹시 기다렸다. 동생을 데려오는 순간부터 가을은 동요를 불러주고, 쓰다듬고, 함께 놀아주었다. 엄마에게 듣던 동요를 이제는 자신이 불러주는 모습이 뭉클했다. 동생은 그 덕분에 절대음감을 갖게 되었고, 노래를 잘하게 되었다.


말이 느린 한경은 언어치료를 받았는데, 그에게 내려진 숙제는 ‘가정에서 역할극 놀이를 자주 하는 것’이었다. 가을은 그 사실도 모른 채,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극을 위해 동생을 작은 방음 부스로 데려가 연습을 시켰다. 그녀가 만든 역할극은 조부모, 친척, 친구들 앞에서 공연되었고, 큰 웃음과 박수를 받았다. 동생의 발성은 누나와 엄마를 닮아 쩌렁쩌렁하다.


학급 담임선생님들은 매년 공통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가을은 친구가 급식판을 엎으면 제일 먼저 달려가 닦아주고, 누군가 무엇을 흘리면 빗자루를 들고 가서 쓸며, 정리가 어려운 친구의 책상정리도 도와준다고 했다. 한 번은 엄마와 함께 음악회에 갔다가, 꽃다발 밑의 물이 바닥에 흘렀을 때 가을은 승란 보다 먼저 알아채고,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가을은 제 엄마의 큰 목소리와 고집을 꼭 닮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신적인 면도 많이 닮았다. 승란은 그런 가을을 보며 화가 날 때도 많지만, 흐뭇하고 뭉클할 때도 많다. 고맙고, 또 고맙다.

가을은 종손의 첫 손녀로 태어났지만, 사실은 엄마인 승란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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