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럴 수도 있었겠다

by 히예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머릿수만큼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 한 명 한 명이 가진 삶의 역사는 모두 고유성을 띤다. 비슷한 모양 같아서 하나로 정리하려고 해 봐도 딱 떨어지지 않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해서 가정에 흐르는 공기까지 같을 수는 없는 것처럼. 그 스펙트럼은 빨강에서 보라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나였다면 이랬을 텐데, 나였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같은 말은 무용하다.


그와 나는 타고난 성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주어진 환경도 다르다. 그의 인생은 내가 살아온 것과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그의 경험이 만든 맥락 안에서 그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다고 감히 누가 평가하겠는가. 그 선택에 내가 보이콧을 외친다 한들 그 선택의 당위를 가장 결백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선택한 그 자신뿐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유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좁은 집에 식구들이 복닥거리며 빠듯하게 지낸 것이 유년시절의 기억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한동안은 넉넉지 않은 형편을 원망했던 순간도 있었다. 한 번씩 왜인지 모를 억울함과 서러움에 삼켜지던 날들을 지나, 내 부모가 그 순간에 했던 선택들이 그때의 최선이었음을 이해하는 때를 만난다. 하릴없이 지나가는 것만 같아도 시간은 우리에게 이런 선물 같은 성숙을 준다. 몇몇 기억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 한편이 매캐해지지만, 이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의 선물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까운 존재의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시야를 확장시킨다. 폭력과 무시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집을 나간 학생을, 먹고살기 위해 아이를 혼자 두고 밤늦게 일을 하러 나가는 아버지를, 무리에서 소외당하지 않으려 친구를 험담한 아이를, 우울에 뒤덮여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당신 입장에서 그럴 수 있었겠다'는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사실 내가 부모님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과 내담자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중에 뭐가 먼저였는지 확신할 수 없다. 엉켜있던 매듭 하나가 풀리면 그 뒤가 수월해지는 것처럼 두 가지가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 같다는 추측을 할 뿐이다.


누구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긴 채,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내 개인사에서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원망의 마음을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일의 영역에서는 내담자로 하여금 더 진실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해주었다. 스스로도 미워한 자신의 선택을 '그럴 수 있었겠다'라고 인정받는 일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고 자신을 되돌아볼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의 처신이 보편적인 기준에서 어리석고 지탄받을 만한 것일지라도, 내가 완벽히 네가 되어 너를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겠다, 너는 그런 선택을 했구나' 하고 받아들여 보는 것. 내가 가족을 이해하고, 내담자를 이해하는 과정에는 상대방에게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제쳐두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수용해 보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을 원망하고, 또 스스로를 원망한다. 남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나를 이해할 수도 없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럴 때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말이 타인과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그런 말로 타인과 자신을 보는 틀의 여백을 좀 더 넓힐 수 있다면, 지금 모두가 느끼는 이 각박함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 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겠다."

"그 상황에서는 그게 너의 최선이었던 거구나."




사진: UnsplashMarco Bianchetti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