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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이파파 Oct 25. 2024

어서와 우리의 배경에 말이야

아내는 집을 정리하는 데에 있어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핵심 철학은 물건을 밖에 내놓지 않고, 최대한 수납 공간을 활용해 깔끔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집안은 언제나 정돈된 모습이었고, 마치 인테리어 잡지에 실릴 법한 완벽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서는 “집을 정말 잘 꾸몄다”는 칭찬을 쏟아내곤 했다. 아내는 그럴 때마다 부끄러워했지만, 나는 괜스레 뿌듯함을 느꼈다. (나는 뭘 했길래 뿌듯해 했지?)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그 정돈된 집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가 집안을 어질러서였을까? 아니었다. 그녀의 철학은 육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물론 힘에 부치는 순간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충실히 이행했다.


변화는 사진에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휴대폰 배경화면이었고, 스마트 워치 등으로 들어갔다.

막상 아이와의 추억이 휴대폰에 담기니 정말 좋았다. 휴대폰은 그야말로 자주 확인하는 것이니깐


그 다음에는 1년을 돌아보며 만든 달력이 생겼다.

달력은 어차피 필요해서 집에 두면 되는데 아이 사진으로 채워놓으니 분위기가 달랐다.

집 안에는 물건이 없으니 달력 하나쯤은 괜찮았다. 오히려 집안에 포인트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집으로 액자가 하나 도착했다. 아이의 백일 기념 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그렇지 백일이 없으면 어떡하나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그날을 꼭 기억해야지....


그렇게 하나씩 액자가 늘어갔다. 이백일, 오백일, 첫 생일, 두 번째 생일

그 다음엔 다양한 주제의 제목이 기념일 혹은 기억해야 할 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액자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처음 이유식을 먹은 순간, 동물원에 처음 가서 놀란 토끼눈을 한 날 등이 그랬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 순간의 추억들이 사진을 통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깨끗했던 집은 아이의 사진들로 채워졌고, 마치 작은 사진 갤러리 같은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누가 와서 봤다면 아이 사진을 찍는 스튜디오가 아닐까 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는 이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굳이 아이의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해두거나, 액자에 담아두는 이유가 궁금했었다. 어차피 집에가면 아이들을 직접 볼 수 있는데 왜 따로 사진까지 해두는 걸까?


그런데 이제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 있겠구나

내 시선이 닿는 곳에 너의 미소가 우리의 추억이 피어나는구나

욕심같아서는 모든 공간을 채우고 싶은데 그마저도 참은거구나


삶의 여러 순간에서 아이의 사진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때로는 직장에서 지칠 때, 때로는 일상에서 벅찰 때,

아이의 사진을 한 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 작은 사진 한 장이 내게 힘내라고 말해주고, 내가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깔끔함이라는 철학을 당당히 무너뜨리며 들어온 너

이제는 너로 인해 채워진 이 공간들이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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