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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Dec 25. 2021

믿는 건 연습량 밖에

2021년을 돌아보며,

몇 년 전 그림책 학교 첫 시간에 80매의 드로잉 북 한 권을 받았다. 앞뒤로 빼곡히 드로잉을 채워오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손가락 2마디 정도나 되는 두툼한 드로잉 북을 보니 보기만 해도 괜스레 뿌듯했다. 아무것도 그려 넣은 게 없는 백지상태이지만 이렇게 두꺼운 드로잉 북 하나 갖고 있으니 정말 내가 열심히 하는 예술가가 된 것만 같다.     



하지만 딱 그때뿐이다. 드로잉을 매일 1장씩 채우는 일도 버거워진다. 회사 일이 조금만 바빠지면 드로잉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점 몇 개를 그려 넣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시간은 참 빨리도 간다. 1주일에 한 번씩 뵙는 선생님은 다음 주까지 지난번 나눠 준 드로잉북을 다시 갖고 오라고 하셨다. 80매 중 10장 정도 그렸을까, 부랴부랴 그날부터 폭풍 드로잉을 하게 된다.      


시간이 다 되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제출을 할 때 힘든 점은 그릴만한 대상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릴 주제를 찾는 일도 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작업이다. 시간만 많으면 독창적인 주제를 찾는다고 애를 쓸 텐데 그럴만한 시간도 없고 일단 눈에 보이는 건 내 왼손이니 주야장천 손만 그리기 시작했다. 앞면에는 쫙 편 손 모양을 뒷면에는 손바닥만 보이는 포즈로 빠르고 다양하게 드로잉을 하였다.      



그림이란 건 어떠한 기준이나 정답이 없기에 그저 얼마만큼 진지한 고민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손을 그리면서 뭘 얼마나 대단한 고민을 했겠냐만은 태어나서 내 손이 이렇게 생겼다는 걸 그림을 그리면서 깨닫게 되었다. 이곳에 이런 주름이 있구나, 여기가 툭 튀어나왔구나 하는 생각은 관찰 없이 할 수 없을 테다. 드로잉 중에 어떤 드로잉이 100점이고 어떤 드로잉이 0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답도 모호하고 실패도 모호하지만 이렇게 과제를 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데 또 다른 기쁨을 만끽할 뿐이다.        


결론적으론 80매의 드로잉북을 모두 채워 선생님께 들고 갔다. 1주일 내내 손만 그려 갖고 갔는데 그 자체로도 꽤 훌륭한 콘셉트 북이 된 것 같아 마음에 든다. 다른 주제보다 ‘손’이라는 주제가 나왔을 때 무척 자신감이 붙게 된 사실에 감사하다. 그림에 대한 판단이 무척 정성적이기 때문에 그림을 평가하는 잣대 역시 정성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내가 한 번도 그려보지 않은 주제일수록 더 어렵고 낯설게 느껴진다.  


    



한 번이라도 그려보고 고민을 해본 대상이 나오면 훨씬 그리기 수월하게 느껴진다. 요즘엔 세상 모든 것을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리고 있다. 막상 그려보면 내가 의외로 잘 못 보고 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막연히 ‘저 사람 예쁘네.’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실제로 그리면 ‘괜찮은 비율’이거나, 눈망울이 커서 그렇거나 등 그냥 지나치기 쉬운 점을 찾아내게 된다. 이렇게 특징을 찾고 다음번에 또 그리면 훨씬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믿을 건 관찰한 시간과 연습량밖에 없다.      


살고 있는 인생이 그러하듯 그림에 있어 만족스러운 지점, 합격 점수와 같이 숫자로 딱 떨어지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판단과 주관적인 의견에 따라 창작을 할 뿐이다. 너무나 주관적이고 정성적인 과정이라 초연한 자세로 나를 믿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 정답이 없는 예술 활동에 조금이라도 나를 지켜주는 방법은 그저 내 연습량을 믿을 수밖에 없다. 80장 드로잉 북을 일주일 동안 그리면서 그림에 대한 평가는 누구나 정성적으로 다양할 수 있지만 연습량만큼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오늘도 뚜벅뚜벅 그림을 그려야겠다. 유일하게 나를 믿는 건 내 연습량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림에 있어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지표가 있다면 내 연습량이 유일하다. 이렇게 연습량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천천히 하지만 내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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