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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Oct 20. 2024

요양원에 모시고 후회한 일

자주 찾아갈걸 그랬다.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이 정도 마음이 어두웠으니 부모님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가장 큰 마음은 '죄책감과 죄송함'이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회사일, 갓 태어난 아기 돌봄을 포기하고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라고 하면 고민할 것이다. 할머니는 어릴 적 분명 우리의 기저귀를 갈아주시고, 안아주셨을 텐데 왜 나는 이렇게 이율배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었다. 


그 죄송한 마음 때문에 찾아뵙지를 못했다. 내가 직접 요양원에서 상담을 하고 내 두 손으로 요양원에 모셨기에 죄책감이 커 찾아가지를 못했다. 할머니가 나를 어떻게 쳐다보실까. 마음 한구석이 점점 텅 비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4개월 만에 내 딸과 함께 할머니 면회 신청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집에 계셨을 때보다 훨씬 야위셨다. 너무나 팔이 가늘어지시고, 얼굴이 마르셔서 마음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더 자주 찾아갈걸 그랬다.


할머니는 자꾸만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고 계셨지만 다행히 내 얼굴을 알아보셨다. "정희, 우리 큰손녀." 이렇게 더듬더듬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게 아들을 낳으라고 하셨기에, 내 딸을 잠깐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미소를 지으시면서 엄지를 척 올리셨다. 엄마는 얼른 할머니 드릴 팥죽을 주셨는데, 할머니는 입맛이 없으시다고 했다.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있는 것도, 소변줄을 하시는 모습도, 너무도 야윈 모습도 가슴이 저렸다. 


요양원의 시설은 참 좋은 편이다. 지하에는 찜질방도 있고, 미용하는 장소도 있고 여러 예술 활동도 자주 하는 곳이었다. 시설은 집보다 좋았지만 그 사실이 내게 큰 위안이 되진 않았다. 내가 할머니 입장이 되어 요양원에 가면 어떤 마음이 들까. 무겁고 씁쓸한 기분이 들어 며칠간 기분이 가라앉는다. 외면하고 싶기에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 현실이 바쁘기도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는 사실보다 더 후회가 되는 건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바쁘다는 핑계,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핑계로 할머니 면회를 했다가 취소했다를 반복했다. 결국 1월에 입소하신 뒤 5월에 한번, 8월에 한번 그렇게 찾아뵙게 되었다. 단 2번, 30분 남짓한 시간은 너무나 짧게 지나가버렸다. 



요양원 사람들에게 잘해줄걸 그랬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입소시킨 뒤 요양원 사람들까지 챙길 겨를이 없었다. 나 대신 할머니를 돌봐주시는 분들인데 그분들께 제대로 감사함을 표하지 못했다. 요양원에서 전시까지 진행해서 충분히 마음을 표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자주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어르신을 모시는 일은 사랑과 정이 필요하다. 돈을 드렸으니 된 거 아닌가?라고 속 편하게 생각할 순 없는 게 돌봄의 영역은 정서적 지원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양원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현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요양원 사람들까지 챙기기 쉽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가 많이 없었나 보다. 




엄마는 매주 토요일마다 한주도 빠짐없이 할머니께 카스텔라와 두유를 가져다 드렸다고 한다. 30년간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자주 찾아뵈었던 엄마를 보고 깊은 사랑을 느꼈다. 아마 할머니에 대한 사랑은 미움, 화남을 넘어 측은함, 고마움 등이 기저에 깔려있을 테고 결국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늙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늙는다는 게 서글프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서글프지 않고 또 다른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식들, 주변 사람들이 보다 살뜰히 챙기고 자주 찾아가는 게 특히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 앞의 현실도 중요하지만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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