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머니에 대한 기억
요양원에 모시는 날은 내 생일 다음 달이었다. 할머니는 경도 치매와 노환으로 거동을 하지 못하셨고 부모님께서 대소변을 며칠 받아내셨다. 그러다 결국 요양원으로 보내시는 결정을 하셨다. 요양원이 못 갈 곳은 아니지만 아빠의 마음은 매우 좋지 않았나 보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내게 할머니가 엄마를 서운하게 한 점을 종종 이야기했으면서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신다니까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엄마가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시는 날, 엄마 옆에서 할머니가 집에서 떠나시는 마지막을 같이 함께 하였다. 할머니께 좋은 손녀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가슴이 아팠다.
할머니께는 병원을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차마 내 입으로 할머니, 이제 요양원에 가시는 거예요.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요양원은 시설이 깔끔하였고, 케어해 주시는 사람도 많고, 식단과 간식도 잘 나오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좋지 않았다.
요양원에 모신 뒤 한동안 찾아뵙지 못했다. 천천히 찾아봐도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할머니 병원 가는 거야."이렇게 거짓말한 것도 마음에 걸렸고,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어떻게 봐야 할지 복잡했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된 아기를 돌보고 있던 터라 사실 할머니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4개월 만에 면회를 갔다. 200일 정도 지난 내 딸과 함께 찾아갔다. 할머니는 집에 계실 때보다 더 살이 빠져 계셨다. 요양원 관계자들은 할머니가 음식을 자주 거부하신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모습을 뵙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아들을 좋아하는 할머니에게 딸이 아닌 아들이라고 또 거짓말을 했다. 할머니는 잘했다고 힘없이 칭찬을 하셨다. 아기가 하도 우는 바람에 짧게 면회를 끝냈다.
그나마 신경을 쓰게 된 건 평택시 청년 예술인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15년 만의 첫 육아휴직 기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고, 이왕이면 할머니와 관련된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게 요양원에서의 미디어 아트 전시였다. 할머니가 다시 걸어 다니시면 보시고 싶으셨던 풍경들을 마음껏 보여드려야지. 이런 생각으로 차곡차곡 준비를 하게 되었다. 요양원 측은 내 마음과 편의를 최대한 생각해 장소 대관을 허락해 주고, 8월 전시까지 승낙을 받게 되었다.
내가 요양원에서 전시를 하는 기간은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릴 때였다. 전시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되었지만 철저하게 방역을 지키면서 다행히 전시는 진행할 수 있었다. 난 할머니가 계시는 장소를 2박 3일 동안 잠깐 머무르며 살펴보고 잠깐이나마 할머니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내 나름대로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것인데, 또 어떻게 보면 내가 내 작품을 한다고 할머니를 이용하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최대한 평택의 아름다움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요양원에서 전시하는 날 당일,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를 만나서 반가운 마음도 있지만, 전시는 할머니만을 위한 것은 아니기에 많은 어르신들을 위해 왜 이 전시를 하게 되었는지 설명을 드렸다. 할머니는 미디어 아트 전시보다 나와 우리 딸, 내 남편을 만났다는 기쁨이 더 크신 것 같았다. 1시간 남짓 전시를 진행하면서 짧게 할머니를 뵙고, 나는 할머니에게 건강하시라고 짧게 편지를 써서 드렸다.
8월의 마지막 날, 우린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내가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지도 못할 거면서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순간이 감정적으로 어지럽기만 했다. 할머니가 집으로 오시고 싶어 하는 걸 알면서도 모시지 못하는 마음이 참 감정적으로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