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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라노바 Aug 31. 2016

파리의 악몽

하룻밤 새 벌어진 총체적 난국

아테네에서 정기휴가를 보내기 위해 오랜만에 영국해협을 건넜다. 이번 기회에 이탈리아, 벨기에 친구도 각각 방문할 예정이라 무척이나 들뜬 상태였다. 런던을 출발해 칼레를 거쳐 파리 북역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무렵. 타임테이블을 펼쳐 보니 마침 토리노행 야간 열차가 1시간 뒤에 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아직 시간이 일러서일까, 전광판에는 열차번호가 뜨지 않았다. 


책을 보면서 시간 때우길 30여 분, 여전히 열차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다시 볼까…헉!!’ 촘촘한 타임테이블에 손가락 짚어가며 확인하던 나는 그만 쓰러지는 줄 알았다. 기다리던 열차의 출발역은 한 칸 아래 표시된 리옹역이었던 것이다. 책자가 굴곡져서 잘못 본 것이다. 

프랑스는 계획에 없던 곳이라 환전도 해 놓지 않아서 택시나 전철을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파악을 위해 지도를 보니, 리옹역은 전에 가본 곳이기도 해서 나의 빠른 걸음과 탁월한 방향 감각이면 30분 안에 갈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생각과 현실은 다른 법. 막상 걷다 보니 교차로에서 방향이 헛갈리기 시작했고 걸어도 걸어도 역은 나오지 않았다. 진땀이 났다. 막판에는 결국 숨이 멎을만큼 뛰어야 했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리옹역 플랫폼에는 휑한 정적만이...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타임테이블을 펼쳐 이 시간에 탈 수 있는 아무 야간열차나 찾아봤다. 다행히 오늘의 마지막 야간열차로 암스테르담행이 30분 후에 있었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출발역은 어이없게도 방금 전 있었던 북역이었다! 


이젠 더 이상 수수료 따위는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교통비로 쓸 돈을 환전하기위해 키오스크로 달려갔다. 불은 훤히 켜져 있건만, 젊은 직원은 '영업 끝!'이라는 냉정한 한 마디만 내뱉었다. 절박한 상황을 설명하며 동정심을 유도해봤으나 요지부동이었다. 

흥분할 시간조차 아까워 바로 택시 승강장 쪽으로 뛰었다. 기사에게 외쳤다. “북역 20달러!” 얼떨결에 불렀는데 충분한 금액이었는지 두말 않고 출발했다. 역시 달러의 위력이란. 그런데, 5분 만에 날아갈 줄 알았던 택시가 복병을 만났다. 밤 시간에 웬 교통체증인지… 길이 막히자 딴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이 가까운 거리에 20달러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마디 슬쩍 던져 봤다. “아깐 20달러가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15달러밖에 없는데...” 뻔한 수작에 기사 아저씨는 물론 단호했다. “No!” 


What about 'This'?   (C) Illustration by Terranova


그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접대용 담배 한 갑! 이미 개봉된 것이지만 가진 돈은 더 없으니 나머진 이걸로 어떻게 좀 해보자고 하자, 아저씨는 한 개피 피워 보자고 했다. 기꺼이 불까지 붙여 드렸더니만 맛을 보더니 흔쾌히 OK! 담배값이 금값인 나라인지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천원 돈으로 서로 기분 좋게 상황이 마무리됐고 택시는 다행히 기차 출발 5분 전에 도착했다. 긴박하기만 했던 파리의 밤도 그제서야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Paris, France






이 한 번의 에피소드로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유럽의 기차는 목적지마다 역이 틀린데, 여행루트를 짤 때 이 점 주의 할 것. 

둘째, 대개 지도로는 가까워 보이는 거리가 실제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착시 현상에 주의할 것. 

셋째, 담배는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요긴한 뇌물(?)이 될 수 있다. 흡연자가 아니더라도 비상용으로 몇 개 챙겨 놓을 가치가 충분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에피소드 시리즈는 여행매거진 '트래비'와 일본 소학관의 웹진 '@DIME'에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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