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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시고랭미고랭 Aug 14. 2019

전업주부 수습기간입니다만

10년 사회생활 안녕, 본격 전업주부 시작

며칠 전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메일을 하나 받았다. 고용보험 자격이 상실되었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 온갖 스팸 메일이 수두룩한,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개인 메일 계정 속 나의 사회생활 마지막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해당 메일을 남편에게 포워딩하며 생각보다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는 해외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4살 아들과 함께 훌훌 바다를 건너왔다. 남편의 주재원 발령 소식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더라. 오, 우리 남편 오진다 대견하다 멋지다 짱짱짱!이라는 기쁨과 함께 한창 속도를 내고 있던 나의 회사생활과 당장 몇 년간 아빠와 헤어져 있어야 하는 아이, 한 달 가계부 캐시플로우가 마이너스 통장의 도움 없이 가능한지 여부가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회사에서 7년 차. 나름 업계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었고, 경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던 시점에 하필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한창 애착과 교감이 중요한 성장 시기에 아이가 아빠와 오랜 기간 떨어져 있는 것이 옳은지, 나의 월급과 남편의 한국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을 합쳐 시터 이모님 비용(월 200+)과 주택담보대출(크흑ㅠ)을 감당하며 버틸 수 있는지, 주말 온전히 독박 육아를 하면서 주중 경기도 서북부-강남 출퇴근을 감당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 직장과 사회생활이 그 모든 것을 감안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분명 승승장구하는 멋진 커리어 우먼을 그리며 나름 커리어 플랜을 짰었는데. 아, 거기에 결혼과 출산과 육아가 없었다. (띠로리) 결혼, 출산, 육아가 얼마나 치명적인 퀘스트인지 차마 알지 못한 채 언제나 가속도를 내면서 달릴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결혼으로 인해 나의 삶은 부부공동체의 삶에 편입되었고, 출산으로 인해 내겐 사회생활의 공백이 생겼으며, 책임져야 할 육아라는 새로운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생겼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성장을 책임지는 것. 안전한 경제적, 사회적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것.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결론은 함께 가자! 였다. (땅땅땅!!) 물론 해외에 가서도 내가 job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자감도 있었다. (지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진...ㅠ)


그렇게 나는 해외 주재원 와이프가 되었다. 철없던 대학 시절, 사회에 진출한 선배 언니들에 대한 수다를 떨 때면 언제나 한 번씩은 화두에 올랐던 그 포지션. 기사라던가, 내니라던가, 유학이라던가 온갖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이 버무려져 마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처럼 환상 같았던 존재.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상상과 다르니까. 매일 아이 Nursery과 Gym 라이딩을 함께 하고 하루 세끼 아이 밥을 잘 먹이는 것이 가장 큰 퀘스트이고, 남편 통장 잔액을 확인하며 한 달 캐시플로우를 고민한다. 아이가 엄마엄마엄마엄마 32비트 아이원츄 유캔 낫 리브 미 랩을 하는 덕분에 파트타임 잡을 고민하기도 시원찮다. 그나마 잔여 육아휴직을 쓰고 퇴사한 덕분에 한 4개월은 맘 편히 육아할 수 있었는데, 이제 진정 백수가 되니 전업주부로서의 나의 정체성과 마인드를 다잡을 때가 된 것 같다. 


사실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있으니 아이에게 큰 소리 내거나 짜증 내는 것도 잦아지고, 차라리 일할 때가 더 편하기도 하고, 경제권이 사라지니 돈 쓰면서 괜히 남편 눈치 보이고, 남편이 한 마디 하면 서럽고 확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결국은 내가 내린 선택이자 결정이니 아자아자 파이팅하는 수밖에 뭐 별 수 있나. 회사도 입사 3개월은 수습기간인데, 비로소 전업주부도 본격 수습기간에 들어섰다. 집안일을 전담하게 되니 전업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다시 한번 느낀다. 내가 있었던 업계에선 '인큐베이팅' 혹은 '액셀러레이팅' 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아주 어린 새싹 같은 존재가 무럭무럭 잘 자라서 튼튼한 나무가 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전업주부가 전담하는 육아와 가사란 한 생명과 가정의 A to Z '인큐베이팅' 혹은 '액셀러레이팅' 그 자체이더라. 그런데 나의 노고에 대해 가시적인 성과나 보수가 돌아오지 않는(어쩔ㅠ) 극한직업이다. 


전혀 새로운 사회적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같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감정 기복이 왔다 갔다 하고, 아직은 커리어에 대한 미련을 놓기 어렵지만, 그래도 매일 내게 주어진 시간과 상황에 감사해하며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해야지. 이 수습기간이 끝나면 나는 좀 더 성장한 전업주부가 되어 있지 않을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인 '프린세스메이커'에 가사 알바가 있는데, 가사 아르바이트하면 늘어나는 능력치들이 내게도 늘어나길 바라며.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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