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로로 보여주는데 죄책감 느끼지 말아요
엄마가 힘들면 피해는 아이에게 가요.
회사 다닐 적엔 아이에게 화내거나 소리 지르는 적이 거의 없었다. 우선 살면서 부모님께서 내게 큰 소리를 내신 적이 거의 없고, 아이에게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욱할 때가 있었는데 대부분 남편과 싸워서 매우 기분이 안 좋거나 몸이 너무 지쳐 있는데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랬던 것 같다. 하루 4시간 통근하며 회사 다닐 때엔 오히려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아이에게 애틋한 마음만 가득했고 함께 해 주지 못해 내내 미안했고 그래서 주말에 아이와 더 잘 있으려고 최선을 다했었던 것 같다. 평일에는 시터 이모님이 봐주시니 아이를 돌보는 것에서 거의 비껴가 있었다.
그러나 집에만 있으니 상황이 달라졌다. 고작 2주였지만 한 때 아이에게 하루 3~4시간 이상 핑크퐁을 보여주던 때가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숟가락 들 힘도 없는데 주변에 도움 청할 사람 하나 없을 때. 회사를 막 그만두고, 남편은 외국에, 친정과 시댁은 모두 일하시고, 이모님은 기일이 되어 다른 집으로 옮기셨던 인도네시아로 나오기 직전 2주. 참 답답했다. 해외로 나가려면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회사 그만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그동안 지친 몸도 좀 추스르고, 하고픈 것도 많은데 아이를 돌보려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솔직히 짜증이 많이 났다.
그 와중에 해외에서 걸려오는 남편의 쉴 새 없는 잔소리와 푸념 전화는 나를 더 지치게 했다. 내가 커리어와 미래와 나의 모든 걸 정리하고 함께 가겠다는데, 이 작자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지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화나고 속상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남편은 해외에서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 나와 아이가 무사히 인니로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이것저것 세팅도 하고, 또 한국에서 정리해야 할 거 정리하라고 짚어주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고마운 거였지만 그때는 너무 힘들어 그이가 무슨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건 남편과 전화나 문자로 싸우게 되면 그 분풀이가 아이에게 향했다는 거였다. 아이를 괜히 야단치거나, 아이의 요구에 불응하거나, 아이에게 아예 무반응으로 있는 등. 위험한 시기였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내가 단지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이와 호흡을 마치며 함께 한 시간만큼 내가 아이를 '잘' 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돌봄의 의무를 시터 이모님께 맡겨놓고 주중에는 워킹맘이라고 일하고, 주말에는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니면서 그래도 나는 주말에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위했으니 아이를 잘 돌볼 리가 있나. 택도 없었다. 나는 불안하고 서툴렀고, 그만큼 아이도 불안하고 힘들었다. 나는 막 직장에서 가정으로 돌아온, 초짜배기 전업맘이라 아이의 필요와 힘듬을 잘 케어해주지 못했다. 아이는 업무 플로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성인들처럼 대화가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미지의 세계였다. 일한다고 그동안 애써 외면했다가 직면한 돌봄의 세계는 험난했다. 나의 서툼이 배가 되어 아이를 힘들게 했다. 육아휴직 시작하면서 아이와 함께 근 4주간 꾸준히 발달상담치료를 받았는데, 상담 선생님은 내가 아이에게 잘 반응하긴 하나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아이와 놀아주고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상담을 했고 그나마 그게 있어서 아이가 더 불안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인니로 넘어오고 나서 나는 이게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미디어 중독이 얼마나 나쁜 건지 책도 읽고 영상도 봤는데 인니에 왔으니 인터넷도 TV도 안 된다고 뻥을 치고 아이가 핸드폰과 TV와 이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말이다. 심심해진 아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책을 뒤적거리다가 내게 밖에 나가 놀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매일 말도 안 통하는 아이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바깥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싫은데 아이를 위해 해야 하는 것도 힘들었고, 다른 엄마들은 밀가루나 이런 걸 가지고 아이와 무슨 놀이도 잘한다는데 나는 그걸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인니 이사 오기 전, 아이가 두 번 입원했었다. 유급 휴가와 무급휴가를 탈탈 털어서 겨우 버텼는데 육아휴직 시작하자마자 또 아파서 두 번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었다. 플러스 알파로 해외 나가기 전 혹시 몰라 뵙고 가기 위해 양가 어르신들이 방문하시기도 하고 해외 이사 준비도 하다 보니 내 몸은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몸이 축난 상태에서 인니로 건너왔다. 몸이 한창 긴장된 상태에서 시어머니께서 함께 계셨지만 아이가 엄마에게만 매달리다 보니 가사와 육아 모두 전적으로 내 몫이 되었다. 몸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겠더라. 아이가 낯선 환경에 힘들어 계속 울고 불안해하면서 엄마에게만 매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지독한 근육통과 함께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편두통이 찾아왔다. 진통제를 먹어도 잦아들지 않는 고통에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는 어렵게 차려준 밥을 안 먹겠다고 하고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내내 울며 소리를 질렀다. 너무 화가 나서 아이를 방에 가두고 울든 말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냥 울다 지쳐 잠들었으면 좋겠고 이대로 나는 머리 박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5분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내가 미쳤지 하며 문을 열고 아이를 안아주며 같이 엉엉 울다가 더 이상 혼자 감당하면 내가 위험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뿐이었고 독박육아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은 아이가 발버둥 치며 생떼를 부리는데 너무 얄미워 발로 엉덩이를 살짝 밀었는데 아이가 엄청 충격받은 표정으로 으악! 하면서 나를 뒤돌아보고 서럽게 짜증을 냈다. 어마어마한 죄책감과 함께 아, 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내가 실수로 엉덩이를 민 게 아니고 고의적으로 민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이 표정에서 보이는 상처에 나 자신이 너무 쓰레기 같았다. 일할 땐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을 내가 하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하고 싶어서 왔는데, 아이에게 더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아이의 아름다운 성장, 발달 과정 이런 거 다 좋지만 독박 육아하는데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가 살아야 아이를 돌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좋은 엄마 콤플렉스는 과감히 버리고 최대한 내가 편하게 독박 육아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유튜브, 더 정확히 말해서 한국의 유아 콘텐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단, 지나친 시청은 아이에게 좋지 않으니 한계를 정했다. 처음엔 2시간, 다음엔 1시간 30분, 다음엔 1시간. 그리고 아이가 핑크퐁이나 뽀로로를 보는 동안 나는 커피라도 한 잔 마시거나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면서 에너지를 충전했다. 이 짧은 평화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이 짧은 휴식을 마무리하고 나면 나는 기운 내어 다시 아이와 바깥에 나가 놀기도 하고 아이와 찰흙이나 그림놀이를 하거나,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계속 매달리거나 칭얼거렸도 인내하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와 달싹 붙어 2개월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아이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동안 몰랐던 아이의 취향, 입맛, 성격, 버릇도 눈에 새로 들어오고 아이의 속도에 맞춘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도 알게 되었다. 워킹맘이던 시절, 내가 일과 아이에게 투여한 절대 시간을 놓고 비교하면 아이에게 투입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간의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짧은 시간 놀아주는 것과 매일 돌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나는 그동안 짧은 시간 놀아주긴 했지만 아이를 돌보는 법은 몰랐다. 이토록 험난하고 지난한 수습 2개월 차를 지나서야 '돌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수습 2개월 차쯤에 썼는데 글을 마무리하는 현재는 수습 6개월이 지났다. 이제는 아이와 꽤나 잘 맞아서 함께 잘 논다. 나도 바깥에서 노는 법을 배워서 아이와 수영도 하고 공도 찬다. '돌봄'도 노력해야 가능하다. 저절로 '잘 돌보는' 엄마 아빠는 없다. '돌봄'도 어느 정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익숙해져야) 가속도가 붙고 익숙해지기 위해선 그만큼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1만 시간의 법칙처럼.
이제는 뽀로로 3개만 보자, 라는 게 하나의 법칙처럼 되어서 아이가 뽀로로나 핑크퐁을 보고 싶다 하면 딱 3개만 보여준다. 아이가 더 보고 싶다 하면 1개 정도 더 보여주지만 아이도 엄마와 약속을 알아서 그 정도 선에서 멈추고 다른 걸 하며 논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때 얼마나 만화가 보고 싶었고, 만화책을 보고 싶었던가. 그런데 엄마가 아예 못 보게 해서 서럽고 싫었던 때가 있었는데. 적정한 선에서의 유튜브는 아이와 엄마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게 아닌지 싶다. 아이가 뽀로로를 보며 좋아하고 그 짧은 시간 세상의 모든 전업맘들이 독박 육아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뽀로로에게 노벨평화상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가 뽀로로,라고 말하면 뽀로로 3개만 보자,라고 말하고 주저 없이 뽀로로를 틀어준다. 오늘의 뽀로로가 마무리되면 이제 아이랑 나가서 자전거도 타고, 마트도 가고 또 같이 저녁도 먹어야지.
세상의 모든 독박 육아하는 전업들이여, 유튜브에 너무 죄책감 갖지 말아요. 어쩌면 유튜브는 우리의 유일한 육아 동지일 수 있어요. 적당한 선에서의 유튜브는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용기 있게 말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