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다니는 preschool은 자카르타의 중심 업무지구인 Sudirman-Thamrin 지역에 위치해있다. 서울로 치면 광화문과 여의도가 합쳐진 지역이다. 거의 모든 금융, 외국계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대사관저가 밀집해있는 지역으로 자카르타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아이 preschool의 학부모 구성은 꽤나 다양하다. 외국 대사관 직원, 주재원 직원 가족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현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워킹맘/대디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다양한 구성의 사람들을 만나 지속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자극을 받고 싶어 이 곳을 선택하기도 했다.
유독 친해진 엄마들이 몇 명 있는데 그중 한 명이 필리핀 출신 S다. S는 언제나 화려한 의상과 화장에 항상 활달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다. 남편 역시 필리핀 사람인데 스위스계 금융 회사에서 일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한다고 했다. preschool celebration day에 우연히 이 부부와 나란히 앉아 인사를 나누다가 외양이며 대화에서 보여주는 에너지와 유창한 외국어(영어, 인니어,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실력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당연히 빈부격차가 큰 필리핀에서 온 만큼 원래부터 잘 사는 집안의 친구들일 거라 생각했다.
두 달 간의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설렘 반 긴장 반의 아이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학부모들로 웅성웅성한 로비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던 S를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S가 방학 동안 한국에 갔냐고 물어보길래 아주 잠깐 들렀다 왔다고 대답하고 너는 필리핀에 다녀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S는 매우 어두운 표정으로 본인의 고향에 뎅기열 감염자가 4,000명이나 발생해서 필리핀에 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깜짝 놀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태어난 곳은 필리핀의 빈민가인데 아이들에게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부모들이 태반이며 그 덕에 이렇게 되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빈민가'라는 단어를 잘못 들었나 싶어서, 부모들이 백신을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고 에둘러 물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이라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 백신이 무슨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혹시나 실례될까 몰라 매우 조심스럽게 네가 언제나 외모도 화려하고 언제나 기운차서 원래부터 잘 사는 줄 알았다고 말하니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본인이 가난을 인지했던 때가 한 8-9살 때쯤 되었던 것 같다고,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저렇게 화려한데 나는 왜 이렇게 사는지 엄마에게 물어봤다가 엄청 혼났었다고 하며 웃었다. 기억나지 않은 어렸을 때부터 재활용 쓰레기를 주었었던 것 같은데 10살쯤 되니 그런 일이 너무 지긋지긋해졌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한참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여동생이 본인을 따라 쓰레기를 줍는 게 너무 싫어서 내 동생은 나와 같은 일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더란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설탕을 녹여 사탕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 기 시작했고 그게 점점 커졌고 운 좋게 돈을 좀 벌 수 있어서 고등교육과정도 밟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편 역시 정말 가난한 지역 출신인데 무슨 미친놈처럼 지독하게 공부해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대화로는 5분 남짓했지만 얼마나 지난한 세월과 치열한 노력이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S는 남편이 일 중독자라며 요 몇 달간은 거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아이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기 때문에 본인도 남편을 이해한다고 웃었다. 그녀는 현재 자카르타에서 가장 비싼 Serviced Apartment 중 하나에 살고 있는데 고층 아파트에서 밑을 보면 Sudirman 뒤쪽에 슬럼가가 내려다보인다고 했다. 매일 그 슬럼가와 Sudirman의 고층 빌딩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을 보면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 다짐한다고 했다. 본인이 15살 때 처음으로 항상 전기가 들어오는 집에 살게 되었는데 그때의 기쁨이 너무 컸었다고 웃으며 말하는 그녀가 너무 대견해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사실 그녀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용기 있는 일이자, 어느 정도 과거를 극복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네 이야기에 깊이 공감한다고 말했다. 나는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산동네에서 태어났고, 부모님 모두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했으며, 어마어마한 빚에 눌려 있을 때 하필 교복 입는 초등학교를 다녀 많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고, 나의 학교 성적이 각박한 부모님 삶의 유일한 보상이자 증명이었기에 내 성적이 낮으면 잔인하리만큼 혼났다고. 여기 오기 직전 다녔던 회사에선 대부분 외국에서 살다 온 경험이며 외국 대학을 나오거나 서울의 좋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해서 나의 힘든 과거를 극복한 현재가 그들에게 너무도 하찮은 것이라 또 많이 힘들었었다고. 다행히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내 삶은 언제나 열등감 투성이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 속 깊이 머금어진 흉터들을 발견했는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고랭. 우리의 지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는 거잖아. 그리고 적어도 우리에겐 우리 아이들에겐 더 나은 삶을 만들어줄 거라는 마음이 있잖아. 우리는 과거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오늘을 열심히 살면 돼. 미래는 더 멋지게 다가오겠지.
그날 밤, 아이를 일찍 재우고 나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내가 태어난 달동네를 검색해보았다. 부동산 가격을 보니 이제는 그냥 맘만 먹으면 지금 당장 부동산에 연락해서 집 한 채는 살 수 있겠더라. 네이버 이미지 검색으로 보인 그 동네의 모습은 내 아주 어린 흐릿한 기억 속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마음이 울컥했다. 그곳을 떠나온 지 30년인데 3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동네. 그리고 여전한 가난의 흔적. 그러나 나는 가난이라 느끼지 못해 기억 속 그냥 그리운 공간으로 머물렀던 곳. 대부분 경매로 넘어간 집들의 이미지를 쭉 내리다가 어릴 적 살던 집과 비슷한 마루와 문 사진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모니터로 손을 뻗어 그림을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부인하고 싶었던 나의 과거, 나의 가난, 나의 상처가 이제는 더 이상 날카롭고 아프지 않아 고맙고 미안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아팠던 건 내가 나를 외면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잘난 체 한다고 욕을 먹었던 것도, 내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도 실은 지난날들의 흔적이었다. 아가, 참 많이 힘들었구나 그리고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다. 하고 나를 안아주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계속 나와서 멈추기가 힘들었다. 이른 잠에 들어 뒤척이다 엄마가 없는 것을 깨닫고 울며 나온 아이가 아니었다면 한새벽 내내 조용히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 옆에 누우며 잠든 아이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다가 엄마가 또 나갈지 몰라 내 가슴팍 옷자락을 꼭 쥔 아이의 손을 쓰다듬었다. 사회생활 10년 동안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어디까지 더 욕심을 내야 하는 걸까. 이게 욕심인 걸까 아니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해야 내 아이가 덜 상처 받고 덜 힘들게 더 나은 삶을 마주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이로 인해 나의 커리어는 단절되었지만, 이 단절로 인해 나를 힘들게 했던 지독한 열등감과 상처도 모두 사라졌다. 아이와 함께 한 조용하고 평범한 매일이 나를 회복시키고 주변을 더 돌아보고 베풀 수 있게 해 주었다면 믿을까. 그것이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는 이 작은 존재가 나를 돌이켜볼 수 있게 해 주었던 게 더 큰 것 같다.
사실 전 직장도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지만, 이제는 5년 동안 나를 우울증에 시달리게 했던 지독한 과거를 끊어낸 것 같다. 내게 상처 줬던 사람들을 만나도 당당할 수 있을 것 같고, 오히려 그때 그런 말 했던 거 기억나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장담컨대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리라. 원래 상처는 받는 사람만 기억하는 거니까. 어느 순간 내게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과거에 누군가에게 주었던 상처가 업보가 되어 돌아온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 역시 그들 나름의 업보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다시 부동산에 접속하여 동네 시세를 본다. 투자로선 가치가 없지만 언젠가 그 동네에 가장 좋은 집을 지어 내게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목표라면 나는 아직 멈춰서는 안 되겠지.
오늘도 조금 더 충실히 하루를 보내자. 목표가 있는 미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