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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시고랭미고랭 Sep 04. 2019

참 빨리 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의 아가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는 기존 Nursery에서 Pre-K 반으로 올라갔다. 새 친구들도 들어왔고, 이젠 개인 학용품도 잔뜩 챙겨줘야 한다. 교복 규정도 추가되었으며 (정해진 양말, 정해진 색깔의 신발), 원한다면 점심 도시락을 친구들과 어린이집에서 먹을 수도 있다. Nursery가 2~3살 아가들을 위한 어린이집이었다면 사실상 Pre-K부터는 유치원 과정에 더 가깝다. 아이는 영어뿐만 아니라 인니어, 중국어로 문장을 만드는 연습을 할 것이고 당연히 기저귀도 뗄 것이고 혼자서 보다 더 잘 먹게 될 것이다.


지난 1월 말, 인니로 건너온 이후 아이는 참 많이 불안해했다. 주 양육자였던 시터 이모님이 떠나고 엄마로서 너무나 서툰 엄마의 형편없는 케어를 받으며 아프기도 참 많이 아팠다. 거기다가 언어도 사람 생김새도 환경도 완전히 다른 곳에 비행기를 타고 넘어왔으니 더 많이 힘들었을 거다. 많은 퇴행이 있었다. 말도 거의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계속 안아달라 하고 불안해하고 사람만 보면 도망 다니고. 오죽하면 외할머니가 너네 엄마 그만 힘들게 좀 하라고 소리쳤을까. 그래도 아이의 마음을 알기에 정말 어깨가 부서지도록 안고 다녔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다.


다행히 아이는 환경에 완전히 적응한 듯하다. 7월 한 달간 낯선 어린이집에서 진행된 Summer Camp도 신나게 잘 적응했고, 이제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지도 않으며, 제법 많이 웃는다. 이제 한국말도 다시 좀 하기 시작하고, 다시 기저귀 떼는 연습을 시작했고(정말 긴 시간이 필요하다), 영어노래를 틀어주면 신나게 따라 부르면서 춤추기도 한다. 아이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면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 아이의 웃는 얼굴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고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매번 노력한다. 안타깝게도 나의 왼쪽 어깨는 가라앉았고 어깨 통증이 너무 심해져 팔을 들어 올리기조차 힘들고, 왼손가락 일부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접시나 물건을 종종 놓치기도 한다. 인니에서 한의원을 찾아가려 했으나 침 맞을 시간 동안 아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 무기한 연기 중이다. 그래도 아이를 생각하면 괜찮다.


어제는 몇 시간 동안 아이 학용품 하나하나에 아이 이름표를 붙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처음 갈 때 엄마가 이렇게 챙겨주었던가. 8살에 걸어서 20분, 차로 30분 걸리는 학교를 다닌다는 건 쉽지 않았다. 내겐 학교가 언제나 고되고 힘든 장소였다. 준비물을 빼먹거나 숙제를 깜빡하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참 많이 맞았다. 가장 서러웠던 건 비 오는 데 우산을 안 가져온 날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가난했고 우산을 살 용돈 따윈 없어서 언제나 비를 맞고 집에 돌아갔었다. 그때마다 교문 앞에서 대기하던 자동차와 엄마 하며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고 참 많이 부럽고 외로웠었다. 다시 한번, 여자로서의 엄마의 삶이 치열하고 힘들었으며 존경할만하다는 건 인정하나 어린 시절 내 마음 또한 많이 헛헛했다는 것을 곱씹는다. 어쩔 수 없다. 어마어마한 가난의 무게에서 엄마가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지만, 아이가 버텨야 했던 무게도 있었으니까. 유년 시절의 기억은 너무나 아파서 대학 입학 후에 나는 19살 때까지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다. 거짓말이 아니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일각에서는 이런 걸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뇌가 기억을 해리시킨다고 그러더라.


어렸을 때 한 동안은 버스를 1번 갈아타서 1시간이 넘게 차를 탄 후 20분 정도 걸어 집에 갔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한 번은 버스 시간을 놓쳐서 땡볕 아래에서 1시간을 기다린 후 버스를 탔었다. 그 날 내 호주머니에는 딱 버스요금 동전 몇 개가 있었고 물 한 모금 사 마실 수가 없었다. 거의 탈진 상태에서 집에 돌아와 미친 사람처럼 물을 마시고 대자로 뻗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입버릇처럼 일하는 엄마가 싫다고 말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한창 가속도가 붙던 커리어를 던지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이래서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말이 정말 씨가 되더라.) 이제 막 수습딱지를 떼고 전업의 일에 익숙해지려다 보니 엄마 역할이 참 만만치 않다. 챙겨야 할 것들이 참 많다. 엄마가 신경을 쓰면 쓸수록 아이도 무럭무럭 자란다. 그 유명한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워킹맘의 아이들은 상위권은 될 수 있어도 최상위권은 될 수 없다"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하다 못해 색연필과 사인펜, 크레용 하나하나에 라벨 작업을 하는 것까지 아이에게 신경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정성이 달라지니까. 아이와 라벨작업을 함께 하면서 아이는 또 하나씩 이게 뭐냐고 묻고 선물이라 하니 기뻐한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활짝 핀다. 어제는 처음으로 Preschool communication book에 아이와 관련된 것들(personal insuarance, regular medical check, etc)을 기재했다. 학교에서 요청하는 작은 것들에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학교에서 아이를 보살필 때 참조했으면 하는 것들을 꼼꼼하게 챙길 수 있어 좋았다. 사실상 아이의 학교와 엄마와의 커뮤니케이션도 업무와 다름없더라.


아이는 인니에 오고 나서 차를 탈 때마다 항상 내 무릎에 앉는데(인니는 카시트가 강제가 아니고, 대부분 카시트를 착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 글 작성 후 카시트를 설치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꽤나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키는 100cm에 육박한데 살이 쏙 빠져 12~13kg에서 왔다 갔다 하던 아이가 어제 몸무게를 재보니 드디어 15kg을 찍었다. 이제 잠들어서 안고 집에 올라갈 때면 어깨가 빠질 것 같다. (실제로 어깨가 나갔다ㅠ) 제법 한국말 다운 한국말도 하기 시작하고. 손이며 발이 참 많이 컸다. Preschool 간다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참 대견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일과 가정을 양립할 때 나는 아이가 어서 빨리 크길 바랬다. 아이를 돌보는 건 너무나 힘들었고 내 커리어의 소중한 시간이 날아가는 것 같았고 A부터 Z까지 아이를 케어해야 해서 자유 시간 하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아이가 계속 울거나 생떼 부릴 때면 귀를 막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고, 아픈 아이가 칭얼거리는 게 너무 지쳐서 화를 낸 적도 있었고, 아이가 밥을 안 먹는다고 몇 술 안 먹이고 밥을 치워버린 적도 있었다. (알고 보니 아이가 싫어하는 반찬이었다.) 나는 서툴렀고 나의 서투름만큼 아이는 힘든 시간을 버텨야 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아이가 이렇게 건강하게 버텨준 것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아이가 엄마라는 이유로 나를 버텨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를 마주할 면목이 없었을 것 같다. 


어느 순간 아이가 훌쩍 커 있다. 그리고 더 빨리 큰다. 이제 곧 친구들이랑 논다고 밖으로 뛰쳐나갈 테고, 집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토록 혼자 있는 시간을 바랐는데 막상 아이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보이니 마음이 찡하고 코끝이 시큰하다. 이제야_ 다시 한번 깨닫는다. 아이의 어린 시절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필요로 하던 그 시절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 잠들기 전에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오늘도 엄마랑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우리 아들 덕분에 엄마는 오늘도 너무 행복했다고 말해준다. 아이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엄마가 말해주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좋은 꿈꿀 수 있도록. 이 평범한 하루를 허투루 놓치지 않도록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에 감사하고 행복해해야지. 참 빨리 큰다. 이제. 네 어린 시절을 조금만 더 붙잡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가 네가 매일 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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