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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시고랭미고랭 Sep 06. 2019

주재원 와이프의 삶이란

별 거 없다. 별 거 있다.

전업주부인 주재원 와이프의 삶이란 별 거 없다. 하루 종일 아이와 라이딩/픽업을 하고 집에 오면 밥 먹이고 아이와 잠깐 부대끼다 씻기고 잔다. 아이가 10살만 넘어가도 혼자 뭐라도 하고 학원이라도 보낼 테니 내 시간이 좀 있을 텐데, 아직 어린 4살 아가를 혼자 둘 수 없어 하루 종일 부대끼고 부대끼는 하루. 그 흔한 네일, 마사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이와 함께 있다는 데 의미를 두는 단조롭고 평화로운 나날들.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 나온 남편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매일 새벽같이 나가 자정에야 돌아와서 일주일 중 6.5일 독박 육아를 감당하고 있다. 하루는 남편 좀 푹 자라고 아이 데리고 키즈카페 나갔다가 그 다음 날 몸살 기운에 끙끙 앓았다. 남편도 지치고 나도 지치지남편이 너무 힘들어하다 보니 넋두리 한 번 하지 못하고 언제나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고 있다. 마음에 울적함이 큼큼이 쌓여도 매일 아이의 웃는 얼굴과 약간의 리프레시(독서와 글쓰기, 아이 낮잠 잘 때 한국 예능 보면서 간식 먹기)로 마음을 매만진다.


며칠 전 남편이 오래간만에 일찍 8시 반쯤 귀가했다. 매일 이어지는 회사 업무며 회식으로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아빠 얼굴을 본 아이가 좋아하며 팔짝팔짝 뛴 덕에 우리 세 가족은 모처럼 저녁 산책을 나갔다. (우리가 사는 지역은 소위 자카르타의 한남동과 같은 곳으로 열악한 자카르타에서 저녁 도보 산책이 안전하게 가능한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자전거 타기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서툰 페달질을 보조해주다 남편이 갑자기 "우리 여기 왜 있는 걸까?"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왜 그래? 물었더니 엊그제 다른 회사 주재원 형님과 밥을 먹었는데 그 형님이 자기처럼 하나도 놀지 않고 일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단다. 동남아에 왔는데 골프도 안 치고, 여행도 안 가고, 취미생활도 없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는데 그 날 또 내가 외식 한 번 없이 일주일 동안 집에서만 밥 먹는 걸 발견하고 여기 생활이 쪼들리나 싶었다고. 자기가 이렇게까지 고생하고 나도 독박 육아하고 있는데 생활이 쪼들리기까지 하면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고.  


"빚 갚으려고 여기 왔잖아."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입 밖으로 저 말이 튀어나왔다. 빨리 대출 줄이고 싶어 외국에 있는 거 아니냐고.

사실 외국 생활이라고 화려하거나 그런 거 없다. 여기 여행 온 것도 아니고 내가 재벌도 아니고. 매일매일 독박 육아하며 말 안 통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아이 학교와 학원, 장 보러 가는 가까운 쇼핑몰만 왕복하는 단조로운 일상. 차라리 한국이면 친구들도 만나고 아이 어린이집에 오후 5시까지 맡겨놓고 학원이라도 다니고 그랬을 텐데 오전 11시 40분(지금은 12시 20분)이면 칼같이 끝나는 아이를 잠들기 전까지 돌보아야 하는 돌봄 노동 속에 무엇을 시도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남편이 해외에서 힘들게 일하며 그 이유에 대해 고민했던 건 만큼 나도 매일같이 쓸데없는 우울증에 잠식당하지 않으려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계속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를 찾았고, 아이 교육, 가족이 함께 있어야 한다 등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명확한 이유는 '돈'이었다.


돈만큼 절실한 게 뭐가 있을까.

설립 멤버로 시작해서 7년 반 일했던 조직과 결별하고 외국으로 나오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다. 더 이상 조직에서 소모당하기 싫다는 마음 30%,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 30%, 그리고 남편만 해외에 나갔을 시 쥐꼬리만 한 내 월급과 남편의 한국 월급만으로 이모님 비용과 대출 주담대 원리금 상환, 생활비를 모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 40%가 합쳐져 퇴사를 결정했다.


남편은 언제나 내가 월급 대비 지나친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퇴사하고 나서야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임을 인정할 수 있었다. 꿈과 희망, 주인의식으로 좋은 사람들 만나며 성장한다고 항상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퇴사하고 나니 내게 실제로 남는 건 얼마 안 되는 퇴직금밖에 없더라. 회사 다닐 때 빈말로 남편이 내 연봉만큼 더 벌면 내가 퇴사하겠다, 했는데 해외 주재원으로 나오면서 남편이 정말 내 연봉만큼 더 벌게 되었다. 그래서 더 미련 없이 퇴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요새 인니 루피아가 달러 대비 강세라 매달 월급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 슬프지만 ㅠㅠ

우리는 한국 월급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모두 주담대와 마이너스 통장, 그동안 한국에서 썼던 카드 할부금을 갚는데 썼다. 나의 퇴직금으로 마통을 한 번에 털었고, 카드 할부금 이제 다 끝났다. 퇴사 후 시댁에서 도와주신 돈과 퇴직금 잔여분, 한국 집 월세로 대출을 많이 줄였다. 대출이 줄어들고 카드 할부금이 없어지니 한 달에 조금씩 들어오는 남편 한국 월급과 월세로 주담대를 터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빚과 빚에 따른 이자가 눈에 보이게 줄어드는 그 짜릿함이 얼마나 좋은지! 밥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 무엇인지 너무너무 잘 알 수 있었다. 대출 빚과 이자가 줄어드니 남편과 내 마음속 부담도 훨씬 덜어졌다.


사실 인니 생활이 막 엄청 풍족하진 않다. 남편은 집값 외에 다른 부분은 거의 지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 월급으로 기사/차량 운영비, 아이 교육비를 모두 내야 하는데 비중을 고려해보니 다음과 같다.


    - 기사/차량 운영비 26%

      (인니는 기사 없이 돌아다니기 어렵다)

    - 아이 학비/운영비 24%

    - 하루 2시간 가사도우미 월급 4%

    - 아이 Gym 4%

    - 아파트 관리비 6%

    - 정수기 필터  1%

    - 인터넷/티브이/통신요금 4%


한 달 고정비용이 저렇게 되니 실질적으로 남는 돈은 30% 정도인데 이게 우리나라 돈으로 100만 원 정도 한다. 100만 원으로 한 달 동안 남편 용돈도 쓰고 살림하면서 쓰는 거다. 그러니까 결국 한 60만 원으로 4주 사는데 이게 실질적으로 그렇게 넉넉할 리가 없다. 그나마 인니 현지 식재료비 재료가 싸서, 꼭 필요한 것들만 사고, 교통비가 별도로 들지 않고, 한번 장 보면 냉장고 파먹기 하면서 사니까 살 수 있는 거다. 부수적인 쇼핑이나 이런 것들은 사실 잘 못한다고 봐야 한다.


물론 한국 통장에서 돈을 가져오면 좀 더 넉넉하게 쓰며 살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 회사 다닐 적엔 이모님이 뭐 없다 하면 애기 반찬이며 간식용 부식을 사서 매번 버리기 일수였는데 이젠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아이가 뭐 좋아한다 하면 장난감이든 책이든 세트로 샀는데 이제는 같이 뛰어다니거나 그림 그리거나 춤추며 논다. 낭비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삶이 쪼들리거나 하진 않다. 여기가 인니라서 내가 무엇을 입고 다니던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매일 같이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다녀도 외국인 프리미엄으로 쪽팔리지도 않는다. 인니 현지 월급으로 아껴 살면서 한국 빚을 줄이고 있다. 이 속도면 한국 돌아갈 때쯤엔 월세 보증금을 돌려주고도 대출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긴 한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차피 우리가 해외에 있어서 지금 당장 한국 부동산 투자나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최선을 다해 부채를 줄이는 게 우리의 순자산을 늘리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버티며 살고 있다.


이렇게 적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비록 내 마음이 일시적으로 우울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가는 방향은 틀리지 않으니까. 공동의 목표를 향해 부부가 함께 가는 느낌도 썩 괜찮다. 글을 쓸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우리는 여기에 와서 한국보다 낮은 물가와 외국인 프리미엄으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이에게 양질의 영어와 중국어 교육을 시키고 있고

아이에게 외국에서 사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고 (이건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

전 세계 2.5억이 쓰는 외국어(말레이어/인니어)를 우리 가족 모두가 간단하게나마 배우고 있고

현지의 다양한 주재원 가족들, 인니 친구들을 만나 다채로운 삶을 보고 배우고

적은 돈으로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으며

한국 월급과 월세를 모아 빚을 빠른 속도로 줄여 순자산을 늘리고 있다.


적고 나니 현지 생활이 주는 장점이 참 많다. 잠깐의 우울함에 빠지지 말고 기운 내야 하는 이유다. 남편에게도 말해주었더니 얼굴이 한결 밝아진다.


사실 다들 동남아 해외 주재원 와이프라고 하면 기사랑 내니, 메이드 두고 매일 뷰티케어 받으며 우아하게 티타임 갖거나 골프 치는 줄 아는데 저런 삶을 사는 사람을 나는 주변에서 거의 본 적이 없다. 저런 삶은 아이 없는 신혼, 혹은 아이들이 모두 커서 다른 곳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이미 독립하여 부부만 온 가정에서만 봤다. 기사랑 내니, 메이드가 있어도 그 후의 부연설명을 누리며 우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이 엄마 중에 본 적이 없다. 현지 슈퍼리치 엄마들도 그 시간에 일하거나 자기 계발하지 빈둥빈둥 노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이건 내가 그런 부류라 비슷한 종류의 사람만 만나 그럴 수도 있지만, 결론은 해외 주재원 와이프의 삶이라고 드레스 입은 공주님 삶은 전혀 아니고 한국서 독박 육아하는 전업맘과 다를 바 없다는 거다.


덧붙여 해외 주재원의 전업주부 아내가 하는 주요 업무는 아래와 같다.

아이 전담(독박) 육아

아이 어린이집 행사 참여 전담

가사 전담

해외 업무에 찌든 남편 불평불만 받아주기, 남편 신경질과 짜증 받아주기, 남편 이야기 적당히 맞장구치며 들어주기, 남편 기 살려주기, 남편.... (이러다 가끔 폭발함)


적고 나니 한국서 전업주부 하는 것과 정~말 다를 바 없다! 사실 외국생활도 첫 몇 달만 로망이지 일상이 되면 어디 가서 사나 다 똑같다.


그러니 중요한 건 매일 누리는 평범하지만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것 같다. 오늘 점심은 특별히 맛난 거 먹고 기운 내야겠다.(떡볶이 먹어야지)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남편에게도 주문을 외워준다.

힘을 내요 Suami saya! 아자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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